아트

경제적 교양

2019.03.14

by VOGUE

    경제적 교양

    우리는 경제학 대신 ‘경제적 교양’을 늘려야 한다. 훌륭한 척하는 관료와 경제학자의 꼭두각시가 되지 말길.

    “우리 모두에게는 무지를 벗어나 실제 이 사회가 돌아가는 현실 경제의 진실을 알아채는 경제적 교양이 필요합니다.” <오래된 미래>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연초에 한 국내 신문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기사를 읽다가 ‘경제적 교양’이라는 말이 눈에 꽂혔고 지금 이 글을 쓰는 동기가 되어주었다.

    히말라야의 한 고산 마을 라다크의 소박한 삶에서 인류의 미래를 찾은 그의 책은 1990년대 중반 녹색평론에서 처음 나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한국에서만큼은 생태경제학 또는 지역경제학의 효시가 된 책 아니었을까? 읽지 않은 독자들은 지금이라도 꼭 읽어보시길. ‘경제’라는 말이 원래 ‘살림살이’를 의미하는 (Economy는 가정을 뜻하는 그리스어 ‘Oikos’와 규칙을 뜻하는 ‘Nomos’가 합쳐진 말이다) 것처럼, 인간의 살림살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사실 나는 경제학을 모른다. 우리가 어디 ‘수알못’이기만 한가. 우리 대부분은 수학을 알지 못하는 것만큼 경제도 거의 알지 못하는 ‘경알못’이다. 학교에서 교양으로 겨우 배운 경제학 원론은 까맣게 잊은 지 오래고, 경제하면 어려운 수식과 복잡한 수요-공급 곡선, 무슨 한계효용이니 수확체감이니 하는 말만 머릿속에서 오락가락한다.(그러니 똑같은 수준의 제가 노르베리 호지의 ‘경제적 교양’이라는 말에 눈이 확 꽂혔겠어요, 안 꽂혔겠어요.)경제학이 실제로 우리가 돈 벌고 잘사는 것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고, 경제학자라는 사람들이 우리 살림살이와 국가 경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피부로 알고 있다. 케인스학파의 일원이자 영국의 유명 경제학자인 조앤 로빈슨도 말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경제적 의문에 대해 이미 나와 있는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경제학자들에게 속지 않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우리가 ‘경알못’이 된 것은 우리가 정말 무식해서가 아니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경제학에 대한 냉소가 깊어서인지 모른다. 그래도 마음은 편치 않다. 소득 주도 성장, 최저임금 인상이 어떻게 우리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한다는 건지, 복지 확대가 더 좋은지 기본소득제가 더 좋은지, 좀 따져보고 싶다. 로빈슨의 말대로 기획재정부의 엘리트 경제 관료들과 경제학자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

    노르베리 호지가 말하는 ‘경제적 교양’이 그저 경제적 지식을 늘리자는 뜻이 아닌 건 당연하다. 그것은 세상이 돌아가는 경제적 이치를 알자는 뜻이고, 그것이 우리의 행복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보자는 뜻일 것이다. 기실 경제학은 이런 것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근대경제학, 지금은 주류경제학 또는 신고전파경제학이라 부르는 경제학의 원리가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데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는 ‘희소성의 원리’에 1차적 토대를 두고 있다는 건 모두 아는 얘기다. 아무리 이론이 복잡하게 발전했어도, 사람들의 욕망, 곧 ‘필요’에 대해 가장 효율적인 ‘배분’이 이뤄질 때 ‘만족’의 총량은 올라간다는 믿음은 변함이 없다. 이 원리를 믿음이라고 하는 까닭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필요는 만들어진 것, 즉 그 상품을 보기 전에는 없었던 것이고, 자연은 전혀 희소성이 없이 모든 인간이 먹고살 만큼의 자원을 제공해왔는데 누군가 독차지하고는 모자란 것처럼 말해왔다는 것이다. 이 말대로 ‘희소성’과 ‘필요’의 개념 자체가 허구라면, 여기에 기초한 경제학은 애덤 스미스 이후 몇백 년간 거의 거짓말만 일삼아온 셈이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다. 시장경제 밖의 자연적 경제-사람들 개개인이 주어진 환경에서 자급자족적으로 필요를 해결하며 살아온 생계(Subsistence) 경제-가 수천 년간 존재해왔음을 밝힌 칼 폴라니의 주장이다.

    한정된 자원으로 모두의 필요를 해결한다는 경제학의 명분은 정말로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매일처럼 만들어낸다. 나는 얼마 전 인터넷으로 커피 원두를 주문했다가 깜짝 놀랐다. 판매자는 내가 사는 일산 근처에 주소지를 두고 있었는데, 택배를 추적해보니 커피가 대전의 물류 센터까지 갔다 오는 것이었다.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느라 길에다 기름을 뿌리고 택배 기사가 밤 낮을 일하고, 또 거기서 택배비와 이윤이라는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경제’다.

    어떤 사람은 내게, 물류는 매우 복잡한 고등수학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는 배송처와 물량을 모두 고려하면 대전에 물류를 집중시키는 게 ‘최적’일 거라고 설명했다. 그것을 몰라서 혀를 찬 게 아니다. 결국 우리가 생산하는 ‘부가가치’라는 것이, 기름을 태우고 차량과 도로 건설에 엄청난 자원을 쓰고 저임금 노동력을 동원하여 고작 하루의 시간과 택배비 1,000원을 아끼는 거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물류만이 아닌 장기적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도 그런 인프라와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반박이 가능하리라. 하지만 장기적 성장이라니, 케인스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장기적이란 현 상태를 오도하는 말이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폭풍우 치는 날 경제학자가 말하는 게 결국 폭풍이 지나갈 것이고 바다가 다시 잠잠해진다는 얘기뿐이라면, 경제학자는 너무나 쉽고 쓸모없는 일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경제학자는 언제나 미래를 말하며 현재의 고통을 견디라고 말하는 마약 공급자 같다. 어쩌면 우리는 관료들과 경제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신봉하는 그 경제학이라는 고등 학문을 몽땅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기억한다. ‘모기지론’이라는 부동산 담보부 부채를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 그 상환 가능성에 이율을 매기고, 그 미래의 상환 가능성을 서로 사고팔며 시세를 챙기고, 그런 파생의 파생 상품을 줄줄이 거래하다가 경제가 폭삭 무너진 것이 2007년 세계 금융 위기 아닌가.

    경제학은 그 왕성한 거래 시가의 총량을 가지고 경제가 성장했다고 계산했을 것이다. 노르베리 호지는 말한다. “그래요, 바로 무지입니다. 사람들은 … 슬프게도 경제성장이 우리를 계속 도울 거라고 믿고 그것을 약속하는 지도자들에게 표를 줍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태생적으로 낭비적이며 파괴적입니다.”

    성장과 효율만 받드는 경제학을 벗어나는 길은 노르베리 호지의 제안대로 지역만의 자급자족적 경제 생태계를 만드는 것일 수도 있고, 성장 대신 기존의 부를 최대한 분배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경제학 대신 ‘경제적 교양’을 늘려야 한다. 훌륭한 인간들이 훌륭한 척 말하는 이야기에 속지 말고,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진실, 너무나 상식적이고 쉬운 생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천재이다. 우리는 오래도록 땅 한 뙈기만 가지고도 생계를 훌륭히 꾸려왔다.

      에디터
      김나랑
      포토그래퍼
      김경수 (‘MARIONETTE’, 2017)
      글쓴이
      안희곤(인문사회과학 출판사 ‘사월의책’ 대표, 칼 럼니스트)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