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를 떠나 파리로 간 릭 오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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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를 떠나 파리로 간 릭 오웬스

2019-04-10T13:06:33+09:00 2019.04.10|

캘리포니아를 떠나 파리로 간 릭 오웬스는 마음을 사로잡으며 세상을 반영하는 세계적 현상을 굴하지 않고 만들어왔다.

파리 레프트방크에 자리한 자신의 집에서 포즈를 취한 릭 오웬스.

오후 6시. 파리. 부르봉 궁전 2층. 디자이너 릭 오웬스(Rick Owens)가 와이드 컷 팬츠 그리고 송아지 가죽 하이 스니커 부츠 차림에 안경을 쓰고 대형 스크린 쪽으로 몸을 숙이고 있다. 움츠린 양어깨 위로 흑발을 늘어뜨린 오웬스. 12월의 서늘한 밤기운이 그의 책상 옆 프랑스식 창문으로 스멀스멀 들어왔다.

“저는 발가락 부분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부분을 더 넓게 만들고 발 측면은 곧게 하는 거죠.” 그가 천천히 말했다. 매달 셋째 주마다 의상을 제작하러 가는 이탈리아 콘코르디아에서 근무 중인 남성복 패턴메이킹 파트장 그리고 스튜디오 코디네이터와 함께 곧 출시될 컬렉션의 슈즈 프로토타입에관해 스카이프로 화상회의를 하던 중이었다. 발가락 부분 밑으로 각진 통굽이 가미된 볼 좁은 부츠 모양 신발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세부 디자인을 아직 제대로 정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생각한 것보다 더 부채꼴이군요.” 그가 설명했다. “그리고 나사 구멍이있는 플라스틱 소재 기억하세요? 그것을 본떠서, 나사가 보이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굉장히 독특한 요구 사항이었다. 하지만 릭 오웬스는 기존 것과는 다른 명품을 이제까지 개척해왔다. 그런 특징은 그의 사무실 인테리어에서도 그대로 포착되었다. 벽에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다. 바닥도 콘크리트 그대로였다. 그리고 보풀이 잔뜩 일어난 회색 쿠션이 여러 개 놓여있었다. 2003년 캘리포니아를 떠나 프랑스로 옮겨온 이후부터, 오웬스는 이곳을 자신만의 독특한 궁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화학 실험 도구 모양의 조명기기는 호르스트 에곤 칼리노브스키(Horst Egon Kalinowski)의 조각 작품이었다. 그리고 오웬스가 요즘 푹 빠져 있는 오페라 음악이 한껏 고조되며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57세인 오웬스는 2002년 의 후원으로 첫 컬렉션 쇼를 열었으며, 이것으로 CFDA 페리 엘리스 어워드를 수상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저런 의식적인 특징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불가해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헤드뱅어 스타일의 헤어, 근육질의 상반신, 여기저기 녹아 있는 어두운 색채(오웬은 칼라가 정신을 산만하게 한다고 생각해 칼라 디자인조차 회색 톤으로 바꾼다) 때문에, 그는 섬뜩한 문화의 혜안으로 잘 알려진 고스 로커 아도니스 같은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오웬스의 2016년 봄 컬렉션 무대에서는 런웨이 모델들이 다른 모델을 몸에 묶은 뒤 어깨로 받치고 워킹한 것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것은 여성의 커져가는 연대감과 파워를 엿볼 수 있는 유의미한 창같이 보였다. 한편 브렛 캐버노 미국 대법관의 청문회가 열리던 시기에 개최된 그의 2019년 봄 패션쇼는 마녀가 연상되는 장작더미에 초점을 맞췄다. “저는 정치인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자세히는 몰라요. 하지만 지금의 이 문화적인 불편함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겠죠? 옷은 소통에 관한 것이고, 사람들이 서로 친해지는 방식에 관한 것이죠. 그리고 자신들이 누구인지 말하고 싶어 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기도 하죠.” 그가 말했다. “우리는 모두 여성의 좌절감을 느끼며 살아왔어요.” 심지어,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틀에 박힌 해석도 거부한다. “매장에 걸린 저 의상이 여성의 좌절감을 드러낼까요?” 그가 웃었다. “그 의미가 더 모호해질 뿐이죠.”

그 순간에는 완전히 다른 디자이너가 된 것 같았다. 아르튀르 랭보식 인습 타파 주의자로서 명성이 자자한 오웬스지만, 젊은 시절부터 성공한 천재는 아니었다. 패션쇼를 처음 열었을 때가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그리고 그는 인내, 연륜의 균형 감각으로 자신의 일을 해내고 있다. “제게는 그 무엇보다 우아함이 중요합니다.” 지난해 11월 그는 120명 정도를 초대해 훈훈한 가족같은 분위기 속에서 추수감사절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중에도 그는 솔직했지만, 공손했다. (그는 보통 이런 식으로 말했다. “나 소변 보고 올게요. 그리고 우리 산책 나가 봐요!”) “제 아버지는 말싸움 걸기를 좋아하면서도 지적인 양아치 스타일이었죠. 하지만 어머니는 모든 사람을 편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중재자였어요.” 그는 자신이 부모의 성향을 반반씩 물려받았다고 생각했다. “제게는 아직도 사춘기 소년 같은 면이 많이 남아있답니다. 그렇지만 유연성을 어떻게 가미할 수 있는지 알아요. 그래서 아름다움을 위해 다른 옵션을 제안합니다. 물론 그것은 제안입니다. 그대로 실천하겠다는 약속은 아니죠.”

“그는 자신의 잘 정돈된 세상에 제가 혼란을 가중시킨다고 투덜대요.” 그의 아내이자 아티스트이며, 30년 동안 때때로 그와 협업한 미셸 라미(Michèle Lamy)가 말했다. 그녀는 처음에 오웬스를 자신의 의류 브랜드 패턴메이커로 채용했다. 그 후 오웬스가 직접 만든 의상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라미가 LA 라스 팔마스 애비뉴에서 운영하는 레 뒤 카페 건너편에서 일했다. “그곳은 그들에게 일종의 거실 같은 곳이었죠.” 아리앤 필립스(Arianne Phillips)가 말했다. 그는 할리우드의 영향력 있는 의상 디자이너이자 오웬스 부부와 가까운 친구였다. “결국 그곳은 LA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화 관련 일과 해프닝의 중심지가 되었죠.” 파리에서 오웬스의 에너지는 표면적으로 집중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집요하게 통제된 스케줄대로 움직여왔다. 이를테면 오전 8시에 기상하고 곧바로 간밤에 온 이메일을 처리한다. 그리고 집 근처에 있는 사무실로 11시 정도에 출근하며, 2시에 점심 식사를한다. 그런 다음 낮잠으로 재충전하고 저녁까지 일한다. 그리고 운동하고, 10시경 저녁 식사를 한다. 주로 몇 걸음 가지 않아도 되는 저렴한 프랑스식 식당에 자주 간다. “저는 금욕적인 세상과 피트니스센터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 차분한 사람이죠.”

의류 매장 아홉 개, 바쁘게 돌아가는 온라인 판매 사이트, 여러 하위 의류 브랜드, 가구 브랜드 등으로 이뤄진 작은 제국을 책임지고 있지만, 오웬스는 일과 휴식 면에서 이처럼 수도승 같은 스타일을 고수하기 때문에 패션계가 뒤죽박죽인 순간에 오히려 신선함을 느낀다. (그가 생활하는 스타일이 아마도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데 도움을 주는 듯하다. 릭 오웬스는 파리에 본사를 둔 몇 개 남지 않은 대형 독립 브랜드 중 하나이지 않는가!) “모든것이 빠르게 돌아간다는 것이 저를 힘들게 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저는 빠른것을 좋아하거든요.” 오웬스가 말했다. 그는 갑옷, 극장, 자연주의 등 수천년 동안 이어진 인류 의상의 원형을 참고하며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고전주의자 같은 면을 지녔다. “그런 것은 불안감을 없애주면서 사소한 것을 볼 수 있게 하죠.” 그리고 돌고 도는 역사에 관심이 많은 그는 예술적이고 근사한 모든 것이 결국은 새 생명을 가지고 되돌아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그가 옳았다. 그의 디자인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매력을 지니지는 않았다. 그래서 오웬스는 종종 ‘컬트 추종자’로 일컬어졌다. 그렇지만 그의 매력은 세대와 국경을 불문하고 놀라울 정도로 널리 퍼져갔다. 그의 의상을 ‘로맨틱하면서도 과하게 신경 쓰지 않은 듯하며, 돋보일 정도로 정교하면서도 신기하게도 편안하다’고 인식하는 여성들은 제품이 출시되면 넘치는 구매 욕구를 느낀다. “그는 정교한 디자인 미학을 소유하고 있죠. 그래서 당시에 럭셔리하다고 여겨지지 않던 특이한 패브릭을 사용했죠.” 필립스가 말했다. “밤 문화를 즐기려고 외출할 때도 굳이 옷을 차려입지 않는 LA 여성을 떠올려요. 그녀는 아마도 신발이나 갈아 신고 립스틱을 살짝 덧바르는 정도만 하겠죠. 그런 모습이 수수하면서도 우아했죠. 그의 옷을 입으면 개성도 그대도 살릴 수 있었던 거죠.” 한편 그가 초창기에 만든 남성 컬렉션은 너무 단정하지도 너무 근육질도 아닌, 동성애 남성에게 적합한 어두운 톤의 새로운 미학을 정립하는 기반이 되었다. (사실 오웬스는 양성애자다.) 10년 전부터 칸예 웨스트가 릭 오웬스의 옷을 즐겨 입으면서 신세대뿐 아니라 자신의 광범위한 팬들에게 오웬스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알렸다. 짜임이 좋으면서도 늘어진 스타일의 각 잡힌 코트, 멋들어지게 늘어진 세련된 다용도 드레이프 의상 등을 소개했다. (웨스트는 오웬스의 소탈한 가구에도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나무가 굳어서 돌이 된 규화목으로 만든 릭 오웬스 테이블을 샀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이 신선한 매력 덕분에 끊임없이 협업이 이뤄지고 있다. 1월에는 나파 시어링 코트, 플랫폼 부츠, 셀비지 데님 등의 의상으로 디자이너 래리 레가스피(Larry LeGaspi)를 회고했다. 또한 가을 남성 컬렉션의 친환경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스니커즈 브랜드 베자(Veja)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그리고 그는 음악적인 행보도 시작했다. 에스토니아 래퍼 토미 캐시(Tommy Cash)의 데뷔 음반 피처링에 참여해, ‘검은 마법의 양아치(Black-magic Fuckboy), 괴상한 야만(Necromantic Savage), 초자연적인 왜곡(Supernatural Distortion)’ 등과 같은 상징적인 가사를 노래했다. 이렇듯 그의 협업은 계속되고 있다.

모델 샤넬 니아시아스(Shanelle
Nyasiase)가 릭 오웬스의 2019 S/S
컬렉션의 구조적인 의상을 입었다.

그의 사무실에서 흘러나오던 오페라 속 테너 솔로 파트가 소프라노의 아리아로 바뀌었다. 오웬스는 스카이프 회상회의에서 주제를 니트웨어로 바꾸었다. “지난번에 본 그 조깅 팬츠 정말 멋졌어요.” 그가 말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캐시미어 소재로 만들었으면 해요.” “캐시미어와 비스코스를 섞어서 만들 수 있어요.” 젊은 디자이너 마르코 리사(Marco Lisa)가 스크린상으로 제안했다. (오웬스는 동료들에게 닉네임을 붙인다. 컬렉션에서 그의 오른팔 역할을 하는 앤 반 덴 보셰(Anne Van den Bossche)의 닉네님은 반덴더스트(Vandendust)다. 여기서 더스트는 오웬스의 시그니처 색상이다. 그리고 그의 어시스턴트 애나 필리파 울프(Anna-Philippa Wolf)는 처음에 애나루포(Anna Lupo), 그다음에는 앨(Al)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렸다.) “런웨이 무대에 오르는 색상이 블랙, 적갈색이네요.” 오웬스의 시그니처 컬러인 그레이도 있다. “정말 멋져요!” 오웬스가 이 아이디어를 처음 듣는 것처럼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레이, 정말 좋아요!”

사실, 그는 그레이 오웬스라 불리기 전에 베이지 오웬스라 불렸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 “저는 보수적인 마을에서 자란 온순한 아이였죠.” 멕시코계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오웬스는 캘리포니아 포터빌에서 자랐다. 그곳은 내륙에 있어 사방이 막힌 도시였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가까운 도시인 LA로 갔다. 그는 그림을 공부했고, 자신을 물리적으로 다른 이미지로 연출하기 시작했다. 원래 그는 타고난 곱슬머리다. 습관적으로 유행을 좇고 밤에는 클럽에 드나들었다. “제 자신을 감정과 극적인 상황에 완전히 몰입시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죠. 갖은 방법을 동원해 그렇게 했어요.”

오웬스는 2003년 파리로 옮겨간 이후 LA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의 창의적인 인생이 LA의 작은 공간에서 한 재봉사와 함께 시작되었지만, 캘리포니아에서 보낸 젊은 시절 자신에 대한 기억이 그를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저는 그곳을 생각하면 ‘나약하던’ 제 모습이 떠올라요. 성숙하지 못한 모습이었죠.” 그가 말했다. 마약, 술, 그가 너무나 떨쳐내고 싶어 하는 무질서로 얼룩진 시절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 대신, 구세계의 금욕주의를 통해 깔끔하고 짜임새 있는 스타일을 만들어냄으로써 그리고 통렬함과 고전의 균형을 잡아감으로써 캘리포니아를 버린 대표적인 패션계 인물로 부상했다. LA 지사에서 오랫동안 에디터로 일했고, 레 뒤 카페의 어둡고 작은 공간에서 열린 오웬스의 초창기 시제품 쇼 개최를 도와주기도 했던 리사 러브(Lisa Love)는 오웬스의 최근 작품에서도 LA 시절의 연장선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자유를 추구하는 놀라운 특징을 모두 지녔던 할리우드 시절’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 어둡고 좁은 공간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의 맥락이 늘 보여요.” 그녀가 말했다. “그가 만든 모든 티셔츠, 양성적인 사람들, 손가락을 덮을 정도의 소매길이 등이 제게는 그때를 연상시키는 끈입니다.” 프랑스어를 자주 사용하는 아내와 16년간 파리에서 살았지만, 오웬스는 프랑스어를 쓰지 않겠노라 단언하고(아마 그가 허용하기로 마음먹은 것보다는 프랑스어를 조금 더 알아들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파리 7구에 살고 있다. 이런 점은 그에게 다소 오만한 인상을 더해준다. 덕분에 그는 스스로를 ‘이방인’같이 느끼고, 편안함을 갖게 되었다.

“그는 구세계 문화의 맥락 속에 할리우드 스타일의 감성을 담는 방법을 파리에서 찾아요.” 라미가 말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에 캘리포니아의 유토피아적 접근법을 접목시키죠.” 캘리포니아 남부의 고스 문화가지닌 어둡고, 모호하게 종말론적이고, 무심한 듯하며, 가죽 소재로 치장한 시크함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릭 오웬스는 고스 문화를 전 세계로 전파하는 가장 강력한 표현 주체가 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잘 익은 아보카도를 비행기에 실어 콘코르디아로 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여름이면 베네치아 근처 섬 해변 모래에 누워 책만 파는 해변족이다(특히 전기문을 많이 본다). 다음 날 아침 들른 그의 사무실 소파에는 산업디자인과 아트에 관한 책이 여기저기 펼쳐진 채 잔뜩 놓여 있었다. 그는 요즘 루마니아 출신 조각가 콘스탄틴 브란쿠시(Constantin Brâncuși)와 미국 출신 현대미술가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zer)의 책을 보면서 그들의 곡선을 연구하고 있다. “한참 열쇠를 찾고 있었어요. 그런데 굳이 열쇠가 필요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가 유쾌하게 안경을 집어 들고, 쓰고 있던 술 달린 털모자에 잘 어울리는 검은색 파카를 걸쳤다. 줄일수록 더 나아지는 법이다. 바깥으로 나온 그는 근처 쌍둥이 고딕 첨탑이 있는 19세기 대성당 성 클로틸드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 스리피스 블랙 수트를 입은 한 젊은이가 그를 보고 눈이 동그래지더니 가던 길을 멈췄다.

“릭 오웬스 아닌가요? 엄청 좋아해요! 사진 찍어주실 수 있나요?” “제가 셀카 도사예요!” 오웬스는 기꺼이 응했다.
“당신이 디자인한 신발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 젊은 남자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쪽 신발도 마음에 드는군요.” 오웬스가 답했다. “협업하고 싶습니다.” 그 젊은 남자가 기회를 포착해 말을 이어갔다. “이 신발은 아프리카에서 만든 거예요. 아프리카 발전이 제 목표입니다. 저는 아프리카 토착어도 구사해요!”

오웬스는 그에게 웹사이트로 연락하라고 설득했다. 멀어져 가던 그 젊은 남자가 다시 뛰어오더니 자신의 가죽 백팩을 벗었다. “이 가방도 아프리카에서 만든 거예요. 드릴게요.” 릭 오웬스가 거절했다. 그러나 그 남자가 끈질기게 요구했다. “저는 릭 오웬스의 열렬한 팬입니다.” 그가 상냥하게 말하면서 오웬스가 가방을 돌려주기 전에 가버렸다. 오웬스는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가방, 구체적으로 말하면 짐을 들고 다니는 것을 끔찍하게도 싫어한다. 그가 주머니가 열두 개나 달린 자신의 코트를 디자인한 이유도 물건을 들고 다니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 선물을, 울며 겨자 먹기로, 거의 끌고 가다시피 들고 다녔다.

그 아치형 대성당은 회색 톤이었고 정말 근사했다. 어린 시절 오웬스는 가톨릭 신자로 자랐지만, 좀 크면서 종교와 멀어졌다. 그러나 이 동네로 이사 온 후, 늘 침실 창문으로 이 첨탑들을 내다보았다. 그러다 심각한 문제를 논의하러 온 부모님과 함께 그 성당에 가게 되었다. “어린 내게 이국적인 것과 품행의 도덕성이 연결된 첫 예가 바로 종교였죠. 화려함이 있으면서도, 더 숭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지난해 그는 대담하게도 ‘이곳 성 클로틸드에서 패션쇼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리 불경한 생각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가 다니는 교회이므로 개인적이면서도 신성한 장소였고, 그는 그것을 제대로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해 동안 파리의 웅장한 곳을 돌며 화려한 쇼를 열다 보니, 작은 규모에 덜 퇴락한 패션쇼를 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저는 큰 장소를 빌리는 대신 청소년 쉼터를 위해 돈을 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이렇게 말하더니 오웬스가 사제에게 다가갔다. “그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아름다운 협업을 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성서 말씀을 포함시키고 싶어 했죠. 그것도 괜찮겠다 싶더라고요.”

오웬스가 성당 뒤편의 칙칙하고 낡은 태피스트리를 마음에 들어 하며, 찬찬히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그 동네에 있는 앤티크 소품 매장을 몇 군데 들렀다. 에스파스 에마뉘엘 에이로(Espace Emmanuel Eyraud)에서는 알렉상드르 놀(Alexandre Noll)이 만든 흑단상자를 유심히 보았다. “얼마예요? 되게 비쌀 것 같아요. 그쵸?” 그가 점원에게 물었다. 그다음, 파리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 쇼룸 중 하나인 갤러리 J. 퀴젤(Galerie J. Kugel)에 갔다. “피에르 베르제와 이브 생 로랑 컬렉션의 많은 작품을 이곳에서 영감을 얻었죠.” 그가 메인 홀에 들어서면서 말했다. “여기 있는 것 모두 판매용이에요.”

오웬스도 직접 골동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름의 규칙이 있다. 그는 아르누보를 좋아한다. “아르누보에는 음산한 관능미가 담겨 있죠. 그것은 제가 만드는 것에 담긴 것, 즉 브루탈리즘, 환원주의, 통제에 관한 것과는 상반되죠.” 그러면서 그가 설명했다. “붕괴와 관능. 그것이 바로 아르누보가 제게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사무실과 생활공간에 아르누보 작품을 단 몇 점만 놓아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마치 관능미가 통제되는 것 같으니까요.” 그가 말했다.

그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최근 그는 관광객이 많이 다니는 길을 우회하는 루트를 찾아냈고, 그 덕분에 루브르 박물관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피트니스에 가다가, 잠깐 들러 관람하는 것을 즐긴다고 한다. 그곳을 향해 길을가던 우리는 더블 에스프레스를 마시려고 튈르리 정원에 들렀다. 오리 연못옆에 그가 좋아하는 카페가 있기 때문이다. 오웬스는 하루 종일 신중하게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한정된 에너지에 집중하는 방법이었다.

“통제력을 얻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리고 그 통제력이 제 안에 있는 아르누보적 성향을 간신히 누르고 있죠.” 그가 설명했다. “저는 컬렉션을 준비할 때 감정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아요. 어쩔 수 없어요. 그것은 제 통제력의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올 테니까요.” 그가 말하는데, 작은 새가 테이블 위로 날아와 그를 향해 지저귀었다. 그는 웃으며 이 관심을 즐거워했다. 이 장면을 보며 이상하게 왠지 가슴이 뭉클했다. 연못에서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고, 뭔가 전할 메시지가 있는 것처럼 새가 지저귀고, 과거 방탕한 생활을 했던 로커 헤어스타일의 컬트 디자이너 릭 오웬스가 넓은 마음, 특히 평안의 이미지를 가진 성 프란체스코처럼 보이니 말이다. 요즘도 오웬스는 가끔 춤을 추러 다닌다. 그는 자정에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 옷을 차려입고, 커피를 마시고,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로 외출한다. 다른 사람들이 광란의 밤을 보내며, 끝자락을 잡고 있을 새벽 4시경에 말이다. “정말 또렷한 의식 상태에서 얻는 근사한 경험이죠.” 그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토요일 밤은 과해지고 행복감에 젖곤 하죠. 그렇지만 지난주 토요일에는 콘코르디아의 인적 없는 텅 빈 하얀 공장에 혼자 있었죠. 남성복 컬렉션을 마무리 지으면서 말이에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죠. ‘어떤일이 이보다 더 매력적이고 기분 좋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