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조명하는 우리나라 붓글씨
영화 <라라랜드>의 배경으로 유명한 LA 카운티 미술관에서는 한국 서예 2000년의 역사를 조명하는 특별한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손가락 터치 하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시대에 먹을 갈고 붓을 들어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지난 6월 7일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우석 최규명 선생의 서예ㆍ전각 특별전 <보월(步月), 통일을 걷다>는 그에 대한 답이 될 것 같습니다. 개성 출신의 사업가이자 고미술 시보 <순간>을 창간한 작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이번 전시 작품은 최근의 어떤 타이포그래피나 현대 예술품보다 독창적이고 실험적입니다. 예를 들어 ‘산고수장 山高水長’이라 적힌 작품을 보면 각 한자의 필획이 마치 금강산 만폭동 계곡물처럼 콸콸 흘러내리며 서로 얽히고설켜 전혀 다른 하나의 이미지를 창출해내죠. 단순히 글씨가 아니라 한 폭의 그림이며 조각입니다. 높은 산의 바람과 물소리를 담은 음악이기도 하고요. 전시를 기획한 우석재단과 서예박물관 측은 “사실 동아시아 서(書)에서 필획 자체는 선이 아니라 입체로서 이미 추상 언어”라고 말합니다. 추상표현주의에 가깝다는 뜻이죠.
해외에서도 한국 서예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LA 카운티 미술관은 2000년 동안 이어져온 한국 서예의 역사를 총망라하는 대규모 특별전 <Beyond Line: The Art of Korean Writing(선을 넘어서: 한국의 서예)>를 개최했는데요. 2015년 현대자동차와 10년 장기 후원 파트너십을 맺으며 시작된 ‘더 현대 프로젝트’의 일환입니다. 세종대왕과 추사 김정희부터 학자와 승려, 여성, 노비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회계층을 아우르며, 한지와 도자기, 금속판, 직물 등 다양한 매체로 구성된 90여 점의 작품을 오는 9월 29일까지 전 세계 관람객에게 공개합니다. 오프닝 당일, 영화 <라라랜드>의 배경으로 유명한 크리스 버든의 202개 가로등 작품 ‘Urban Light’가 설치된 미술관 야외 마당에서는 초대형 붓을 든 서예가 정도준의 서예 퍼포먼스가 펼쳐지기도 했답니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붓끝에서 탄생한 이 놀라운 우주를 보는 건 어떨까요? 21세기 서예의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입장이나 시각에서 우석 서(書)의 실험성, 전위성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여전히 문제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지금까지 본 대로 우석의 서(書) 각(刻)에서 일자서 대자서의 구조 혁명과 동시에 특히 두드러지는 질삽(疾澁: 매끄러운 획과 까칠한 획)의 미학 문제죠.
사실 따지고 보면 동아시아 서(書)에서 필획 자체가 선이 아니라 입체로서 이미 추상 언어죠. 한마디로 ‘괴(怪)’. 그야말로 심수상응(心手相應)이고 서구 현대미술의 추상표현주의 언어로 말하면 작가의 무의식 세계까지 문제 삼는 오토마티즘과도 맥락이 닿아 있습니다. ‘괴(怪)’의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우석의 서(書)를 본다면 앞서 본 일자서 대자서 구조/게슈탈트 자체의 혁명적 변화에 방점이 찍힙니다.
전통/고전을 토대로 서언어(書言語) 자체를 필획에서부터 문자 구조/게슈탈트까지 현대적으로 전복, 해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차별적입니다. 더욱더 서단 주류의 필묵 행보와는 죽어도 보조를 맞출 수도 없는, 전혀 다른 ‘독선(獨善)’의 걸음걸이, 즉 독보(獨步)죠.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Courtesy Photos
- 글
- 이미혜(컨트리뷰팅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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