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가 된 여자들: DJ 예지
추구하는 삶의 가치로서 성공은 사어가 되었지만 고여 있길 사양하며 계속 전진하는 삶은 여전히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시대와 호흡하며 섬세하고 다정한 서사를 펼치는 소설가 김애란, 자신의 정체성을 음악으로 창작해 전 세계 클럽에서 한국어와 영어가 울려 퍼지게 한 DJ이자 싱어송라이터 예지, 감각의 재평가를 주장하며 예술을 실험하는 아니카 이, 아이들을 작품 세계의 화두로 삼으며 성장 영화를 부활시킨 윤가은 감독. 이들 앞에 따라붙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신선한’, ‘독특한’, ‘독창적인’ 같은 수식어는 고유성을 증명한다. 지치지 않는 질문과 세상에 대한 관찰로 스스로를 장르로 만든 여자들. 변화보다 내면에 파동을 일으키는 여자들의 오늘을 만났다.
예지는 예지
예지를 DJ, 프로듀서, 뮤지션 혹은 예술가라고만 할 수 없다. 국적과 언어로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 철 지난 유행인 시대. 예지를 아는 것은 지금 세대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브루클린에 있는 예지의 작업실을 찾았다. 벽에는 예지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고, 미팅을 위한 긴 책상과 널찍한 소파, 여러 개의 스피커, 스케이트보드, 농구공, 책, 식물이 있다. 여럿이 편하게 머물다 가는 휴게실 같기도 하고, 창작 집단의 ‘팩토리’ 같기도 하다. 그날도 음악, 적어도 어떤 분야의 예술에든 종사할 것 같은 친구들이 자연스레 오갔다. 예지는 8월 1일 광장동 예스24 라이브 홀에서 단독 공연을 한다. “그런데 왜 다들 내한 공연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한국 사람이고, 얼마나 한국에 자주 간다고요.” 그러고 보니 대부분의 뉴스가 ‘내한 공연’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예지는 언어에 민감하다. 영어로 더 정확하게 답할 수 있지만, 번역하면 의도와 달라진다며 곤란해한다(예지의 촬영은 현지 사진가가 진행하고, 인터뷰는 영문 서면으로 진행했다). 그는 파티를 열 만한 ‘Warehouse’를 보러 다니는 중이지만 창고로 표기하지 않길 바랐다. 예지가 알고 있는 ‘창고’라는 한국어와 자신이 본 공간의 이미지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지를 주목받게 한 노래가 그랬다. 영어와 한국어 라임이 기가 막히게 떨어지는 두 번째 EP <EP2>의 수록곡 ‘Drink I’m Sippin On’은 2주 만에 유튜브 100만 회를 기록했고, ‘피치포크’ 선정 ‘2017년 앨범 50선’ 및 ‘베스트 뉴 트랙’이 되었다. 2018년에 우리는 예지의 이름을 더 자주 듣게 된다. 아델, 샘 스미스 등을 알아본 BBC의 ‘Sound of 2018’에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나는 예지를 청담동 버버리 플래그십 스토어 파티에서 보았고, 뉴욕의 사진가는 그의 공연을 보아왔으며,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현지 DJ들이 나에게 예지의 안부를 물었다. 이제 예지는 전 세계를 순회하는 DJ 겸 프로듀서다. 지금은 예지를 비롯해 페기 구(Peggy Gou), 벨기에 출신의 DJ 샬롯 드 위트(Charlotte de Witte), 트랜스젠더임을 밝힌 소피(Sophie) 등 여성, 성 소수자 뮤지션이 주목받고 있다. 국적, 나이, 인종, 언어, 장르를 뛰어넘어 ‘나’를 얘기하며, 소수가 오히려 개성이 되는 시대다. 하지만 이로 묶기는 예지에게 미안하다. 예지는 예지다. 예지가 추구하는 독자적 패션처럼.
지금 뭘 하다가 이 답변지를 작성하는 건가요?
올해 브루클린에서 아주 특별한 파티를 열 예정이라 괜찮은 장소를 둘러보고 오는 길이에요.
여름에 싱가포르, 방콕, 자카르타, 홍콩, 타이베이, 니가타 등 아시아 투어를 합니다. 특히 오는 8월 1일 서울에서 단독 공연을 하죠. 2018년 1월에 공연했으니 1년 7개월 만이에요. 한국에는 가족을 보러 종종 들른다고 들었는데, 공연하러 올 때면 기분이 남다를 것 같아요.
한국에 가족을 보러 올 때마다 공연을 했어요. 작년 방문 때는 콘서트 전에도 국내 클럽 몇 군데에서 디제잉했고요. 한국을 방문할 때면 늘 흥분되고 신이 나요. 서울은 제가 올 때마다 급격하게 바뀌어 있지만 막상 제 가족은 늘 같은 모습이에요. 익숙한 편안함과 낯선 이질감이라는 전혀 다른 두 감정을 동시에 느낄수 있어서 재미있어요.
한국에서 본격적인 활동 계획은 없나요?
디자이너 서 혜인, 스타일리스트 모니카 킴과 서울 콘서트에서 입을 의상을 준비 중이에요. 디자인 작업은 그래픽 디자이너 정새우, 강문식과 연락을 주고받고, 일러스트레이터 람한과 협업해 비주얼 프로젝트도 진행할 거예요. 한국 아티스트와 다양한 방식으로 협업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워요. 이는 특별히 한국 관객만을 위한 준비는 아니지만 한국과 한국의 인재를 제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에 소개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지난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허니 사운드시스템(Honey Soundsystem)의 제이콥 스퍼버(Jacob Sperber)를 만났습니다. 작년에 당신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고, 정말 즐거웠다고 하더군요. 전 세계의 많은 음악인과 교류하고 무대를 함께하는 것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다른 뮤지션과 협업은 스튜디오 작업보다는 댄스 플로어에서 이루어졌어요. 새로운 도시를 방문할 때면 현지 DJ와 파티 기획자를 꼭 만나려고 해요. 다른 도시의 언더그라운드 음악 문화를 이해하고, 거기서 영감을 얻고, 사람들을 만나고, 제가 사는 도시로 초대하기도 해요. 이런 만남으로 형성된 관계는 제게 아주 중요해요. 특히 제가 아시아 투어를 하는 동안 만나게 될 서포트 DJ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대학에서 만난 싱핏(Sin-pit)이라는 친한 한국 친구가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데 이런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되면 정말 특별한 느낌이 들 것 같아요.
이미 북미, 유럽 순회공연을 마쳤지요. 음악가, 특히 DJ에게 투어와 이동은 숙명입니다. 계속 이동하는 삶의 어려움 혹은 즐거움이 있나요?
세계를 돌아다니며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좋아요. 여행은 몸도 마음도 피곤한 일이기에 때로 제가 원하는 만큼 많은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 깊이 있게 친해지는 경험을 하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함께 작업하는 친구들과 같이 투어를 가서 새로운 경험을 함께 나눌 때면 정말 즐겁죠. 저는 다른 사람과 삶을 공유하고 소통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 같아요. 힘든 점은 새벽 비행기 타기, 짐 풀기, 사운드 체크, 잠이 부족한 상태로 디제잉하기, 건강한 식단 유지하기, 운동하기 같은 것입니다. ‘집순이’ 같은 면이 있어서 오래 집을 떠나 있으면 힘들어요. 유럽에서는 밥이 나오는 식당 이나 한국 음식을 찾기가 어려워서 향수병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투어는 제 삶에서 별도의 ‘챕터’로 존재하는 것 같아요. 투어 기간에는 시간이 저와 상관없이 흘러가버립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모든 것이 그대로예요. 정말 이상하고 신기한 경험이에요.
대부분 투어를 마치면 다음 투어를 위해 급히 떠나기 마련이죠. 하지만 당신이 다른 나라에 갔을 때, 특히 낯선 나라에서 경험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투어 스케줄에 따라 크게 좌우돼요. 투어 일정을 마치면 다음 날 그 도시를 바로 떠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호텔, DJ 장소, 공항 이외의 지역을 돌아다니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요. 그러다 보니 한 번 이상 가본 도시라도 별로 아는 것이 없죠.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은 허탈하고 울적합니다. 도시와 도시 사이 이동 스케줄에 여유가 있는 경우에는 지역 맛집을 찾아보거나 주변 주택가를 산책해요. 저는 관광지보다 현지인의 일상에 더 관심이 많아요. 현지에 친구가 있거나 친한 사람들과 함께 간다면 여행지에서 훨씬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요.
‘Drink I’m Sippin On’에서 ‘그게 아니야’란 가사가 반복되는데 “‘ㄱ’ 발음이 만트라(주문)처럼 느껴져서 아름답다”고 말한 적이 있죠. 당신은 언어에 굉장히 민감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답한 서면 인터뷰를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 의미가 달라져 곤란해하곤 했다고요. 당신에게 ‘언어’는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중국어나 일본어를 배우면서 21세기의 언어는 제게 소통의 도구라기보다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걸 알게 됐어요. 언어는 문화를 보여줍니다.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은 아주 다양해요. ‘보디랭귀지’로 소통할 수도 있고, 음악을 통해 소통할 수도 있습니다. (번역 앱을 사용할 수도 있죠.) 그런데 당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무엇인지에 따라 나라, 문화유산을 생각하는 방법이 결정될 수도 있어요. 영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우리말 표현을 떠올릴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이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한국어 가사와 영어를 섞어 부르는 것이, 예지 음악의 특징 중 하나로 거론됐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기조를 이어갈 건가요?
저는 그게 자연스러워요. 지금까지 제가 살아온 방식이기도 하고요.
일전에 어느 사이트에서 ‘Welcome to the whispering pop’이란 기사를 봤는데, 요즘은 속삭이는 듯한 보컬이 유행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신의 보컬도 해당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추구하는 보컬 사운드가 있나요?
초기에 쓴 곡은 모두 속삭이는 듯한 보컬이었습니다. 아마 세 가지 이유 때문일 거예요. 첫째, 저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요. 둘째, 제가 가진 마이크는 ‘H4 Zoom 레코더’뿐이었어요. 셋째, 제가 음악 작업을 하던 대학 기숙사의 방이 너무 작아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없었어요. 지금은 저의 지식과 취향이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보컬 스타일을 시도해보고 있습니다. 저는 가수이기 전에 프로듀서이기 때문에 녹음된 목소리에 효과를 넣어 더 재미있고 독특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당신을 소개할 때 흔히 ‘한국계’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습니다. 하지만 점점 국적, 인종, 언어가 정체성을 가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에 국적이나 인종이 아니라 제각기 다른 답을 하는 시대가 오는 거죠. 이것에 동의하나요?
세계적으로 다른 문화와 인종 간의 교류가 늘고 있어요. 인터넷 덕분에 지구촌 곳곳의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사람이 더욱 쉽게 교류할 수 있죠. 정체성은 다양한 방법으로 대답할 수 있는 개방형 질문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정체성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어요. 특히 뉴욕에서는 더 그래요. 소수자(인종, 성 정체성)는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파악해서 서로 돕는 것도 중요해요. 저를 한국 뮤지션이라고 부르는 것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아요. 저는 한국 뮤지션이 맞으니까요. 하지만 누군가 제가 ‘마이너리티’라는 사실을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려 든다면 그때는 문제가 됩니다.
-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이현우
- 메이크업
- 마르셀로 구티에레스(Marcelo Gutierrez)
- 스타일리스트
- 모니카 킴(Monica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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