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윤형근의 깊은숨 in Venice

2021.05.14

by 김미진

    윤형근의 깊은숨 in Venice

    어느새 여름이 중반에 접어들었다. 제58회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베니스에서 열린 200여 개의 크고 작은 전시도 그 무렵을 보내고 있다. 대부분 5월 중순에 시작했으니 이제 엄밀한 평가를 마주하는 중이기도 하다. 개막의 열기와 혼란에서 빠져나온 후의 평가는 대체로 더 날카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중 호평이 줄을 잇는 전시도 있다. 바로 한국 단색화의 대표 작가 윤형근(1928~2007)의 회고전 <윤형근>이다. 지난 5월 11일부터 시작해 11월 24일까지 포르투니 미술관(Fortuny Museum) 세 개 층을 가득 채우는 전시다. 세계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뤽 튀망(Luc Tuymans)과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의 회고전이 아쉬운 시점에 가히 주목할 만한 반응이다.

    생전의 윤형근의 모습. Courtesy: The Estate of Yun Hyong-keun

    이 전시는 세계적인 미술 전문지 <프리즈(Frieze)>와 <포브스(Forbes)>가 선정한 비엔날레 외부에서 열리는 주요 전시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프리즈>에서는 시니어 에디터가 “윤형근의 능력은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La Repubblica)>에는 이탈리아의 원로 평론가 프란체스코 보나미(Francesco Bonami)가 리뷰를 남겼다. 제50회 베니스 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은 영향력 있는 미술인이다.

    <윤형근>은 지난해 MMCA 서울에서 개최되어 성황리에 막을 내린 전시다. 32만여 명이 전시장을 방문했으며 인기에 힘입어 전시 기간을 연장하기도 했다. 당시 베니스의 유력 미술관인 포르투니 미술관 관장도 전시장을 직접 방문하였다. 작품과 기획에 감탄한 그는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에도 전시하자고 제안했다. MMCA에서 그것을 받아들여 작가의 첫 해외 순회 회고전이 마련되었다. 

    포르투니 미술관 전시장 전경. Image Copyright: Laziz Hamani

    전시는 MMCA 서울 전시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 대신 미술관 규모에 맞춰 유럽에서 소장하던 작품을 몇 점 추가했다. 윤형근의 조형 언어가 발전하기 시작한 1960년대 드로잉을 시작으로 대표 회화 작품까지 총 6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시대별로 이루어진 전시 구성을 따라가면 작품 세계의 변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시장에 흑백사진으로 되살아난 윤형근의 생전 작업 사진에서 묵직함이 느껴진다.

    포르투니 미술관 전시장 전경. Courtesy: The Estate of Yun Hyong-keun, Image Copyright: Laziz Hamani

    윤형근은 1928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역사적으로 참혹한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다. 1947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시위에 참여했다가 구류 조치 후 제적당했다. 1956년에는 전쟁 중 피란 가지 않고 서울에서 일했다는 명목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한 바 있다. 이후 숙명여고 미술 교사로 재직 중에는 중앙정보부장과 관련한 부정 입학을 고발했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77~1978년의 작품. 부정 입학 고발 건으로 고초를 겪고 장인 김환기가 세상을 떠나며 작업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Yun Hyong-keun, Umber-Blue, 1977-1978, Oil on cotton, 142×200cm
    Courtesy: The Estate of Yun Hyong-keun, Image Copyright: Yun Seong-ryeol

    젊은 시절 윤형근의 작품에는 맑은 푸른색이 자주 등장했다. 스승이자 장인 김환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 번의 복역은 삶뿐 아니라 작업하며 사용하는 색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푸른색에 암갈색을 섞어 점차 어두워지다 오묘한 검은색이 되어 면포를 물들였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 색에서는 숭고한 감정마저 느껴진다.

    1972년의 작품. 여전히 맑고 푸른색이 화면 전반을 채우고 있다.
    Yun Hyong-Keun, Drawing, 1972, Oil on hanji (Korean mulberry paper), 49×33cm
    Courtesy: The Estate of Yun Hyong-keun, Image Copyright: Yun Seong-ryeol

    한국 현대미술사의 주요 평론가인 이일은 1975년 문헌화랑에서 열린 윤형근 개인전 비평을 썼다. ‘텍스처로서의 여백’이라는 제목을 달고 윤형근 작품이 담은 여백의 미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백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그것을 하나의 결정적 현존으로 살게 하는 것은 바로 ‘관계’라는 매개물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윤형근의 회화에서 일차원적으로는 평면으로서의 빈 공간과 색면과의 관계, 나아가서는 공간과 색채와의 그것이요, 다음으로는 화면과 화면 밖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의 관계다.”

    1993년 뉴욕 개인전 당시 윤형근과 미니멀리즘의 거장 도널드 저드(Donald Judd).
    Courtesy: The Estate of Yun Hyong-keun, Image Copyright: Yun Seong-ryeol

    포르투니 미술관은 베니스의 유명 디자이너 마리아노 포르투니의 아틀리에였다. 디자이너가 세상을 떠난 뒤 시에 기증하여 1975년 미술관이 되었다. 건물의 목적이 달라졌지만 인테리어 등에 크게 변화를 주지 않았다. 장소에 깃든 시간이 주는 힘을 알기 때문이다.

    포르투니 미술관의 파사드. 유서 깊은 건물을 아름답게 보존하고 있다. Image Copyright: Claudio Franzini

    미술관의 오래된 벽돌 벽, 나무 바닥과 만난 윤형근의 작품은 강렬한 감동을 남긴다. 화이트 큐브에 놓일 때와 전혀 다른 깊은 울림을 준다. 그 울림 속에 서서 작품을 바라보노라면 작가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극도의 분노와 울분을 경험한 뒤에 화려한 것이 싫다고 고백한 이가 비로소 숨을 쉬는 것 같다.

    포르투니 미술관 전시장 전경. Image Copyright: Laziz Hamani

    전시를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큐레이터.

      에디터
      김미진
      김한들(큐레이터, 국민대학교 겸임교수)
      포토그래퍼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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