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호르몬
호르몬은 통제 불가능하며 여자들을 괴물로 만든다는 정보와 ‘모두 호르몬 탓’이라는 프리 패스 변명은 여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만든다. 생리 전이나 임신 중에도 여자들의 업무 능력은 떨어지지 않는다.
지구에서 멸종돼야 할 농담 하나를 신께서 꼽아보라 하신다면 “그날이야?”라고 대답할 사람이 지구 밖까지 늘어설 것이다. 다리 사이로 뜨거운 굴이 예고 없이 불쑥 떨어지는데 그 상황이 농담 소재가 된다고? 정말 농담도 심하다.
달라진 사회 분위기로 이미 사라진 농담이 아니냐고 되묻는다면 당신은 “그의 눈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어디에서도 피가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던 도널드 트럼프를 잠시 잊은 것 같다. 대선 주자 TV 토론에서 맞는 말만 하던 뉴스 앵커 메긴 켈리에게 했던 발언 말이다. ‘생리하는 여성은 히스테릭하다’는 편견을 진지하게 믿어온 자만이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발언이었다.
사회는 여자를 대량의 감마선에 노출되어 이중인격이 된 헐크를 품고 있는 존재처럼 취급한다. 인생 주기를 놓고 보면 생리 전, 임신 중, 완경 후다. 사람들 머릿속에서 생리 중인 여자들은 스치는 바람결에도 소리를 지르고, 임신 중에는 리모컨을 냉장고에 넣고 외출하며, 완경을 맞이하면 남편을 윽박지르며 집안일을 내팽개친다. ‘생리하는 여자’, ‘임신 중인 여자’, ‘완경기의 여자’는 클리셰로 소비되어왔다.
평창동 사모님처럼, 갤러리 관장처럼, 부잣집 막내딸처럼 평평하고 단순한 이미지로 드라마, 영화, 노래에 등장한다. 며칠 전에도 나는 린 코플리츠가 스탠딩 코미디 무대에 올라서 “우리는 미치지 않았어요. 우리는 호르몬 덩어리예요!”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남자들에게 해결법은 없으며 찬송가를 부르며 버티다 보면 여자들이 다시 돌아온다고 조언했다.
‘여성 잡지’ 기자로서 우리도 이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여성 건강에 대한 기사는 늘 통과되는 기획안이다. 레이스업 샌들이나 타투 스티커 같은 선택지가 아닌 근본적 문제고 기자와 편집장은 대체로 건강염려증이 있다. “생리 전 증후군에 대처하는 자세”, “‘피’할 수 없다면”, “마녀력을 잠재우는 법”… PMS에 관해서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수십 개의 제목을 뽑아낼 수 있다. 하지만 PMS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의문조차 품어본 적 없다. 숫자, 통계를 근거로 하는 생물학은 사실이자 곧 증거 아니었던가? 무엇보다 생리 전 불쾌감으로 차오르는 나 자신이 증거 아닌가?
우리가 알고 있는 호르몬에 관한 과학 정보가 사실 통념이나 미신에 불과할 수 있음을 처음 의심하기 시작한 건 심리학자 로빈 스타인 델루카의 TED 강연 ‘생리 전 증후군(PMS)에 대한 좋은 소식’을 본 이후부터다(이 강연을 토대로 책 <호르몬의 거짓말>도 펴냈다). 그녀는 PMS는 여전히 정의, 원인, 치료 등에서 의견 일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밝힌다. 연구 방법에 문제가 많은데 이 같은 오류는 은폐되고 증상은 부풀려져 있다고 지적한다. 여성은 대부분 PMS를 앓고 있다고 가정하지만 실제로 대부분 PMS 진단까지 받지 않고 생리 전 불쾌 장애인 PMDD 진단을 받는 경우도 3~8%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떤 연구도 호르몬 변화가 여성의 인지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입증하는 일관된 증거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녀는 호르몬 때문에 여자들이 괴물이 된다는 ‘정보’로 엄청난 이익을 얻는 집단은 따로 있다고 폭로한다. 매일 모든 여성이 한 알씩 약을 먹는다면 의학계, 제약 회사가 벌어들일 엄청난 수익에 대해 상상해보길. 진통제, 카페인, 이뇨제만 함유된 약도 PMS 치료제로 둔갑하면 매해 수천 달러 이상의 수익을 낸다.
과학과 의학을 증거로 내린 처방에 우리는 너무도 쉽게 동요한다. 조작되었다거나 과장되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대체로 약은 크게 비싸지 않고 구매가 어렵지도 않다. 매일 알약 한 알 삼키는 것으로 PMS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노화를 늦출 수 있다면? SPA 브랜드에서 옷 한 벌 살 때보다 고민 없이 구매할 것이다. 약 역시 유행처럼 돌고 도는데 요즘은 달맞이꽃 종자유가 말 그대로 ‘핫’하다. 생리 전 증후군과 갱년기 증상 완화에 효과가 뛰어나 딸과 엄마가 함께 섭취하는 영양제라니, 사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앞서 강연을 듣고 충격을 받거나 반발심이 생겼다면 생리나 임신으로 가볍지 않은 고통을 받고 있거나 호르몬이 우리를 조종한다고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임신기나 PMS에 대해 듣고 상상하고 두려워하다 보면 실제 그러한 증상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 약이 부작용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을 때 실제로 부정적 효과를 경험하는 노세보(Nocebo) 효과다(전문가들은 PMS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라는 걸 알기만 해도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호르몬 신화에 대한 의문 제기는 여자들의 통증을 부정하고자 함이 아니다.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의학이 발달했기에 이해받지 못하는 여자들의 통증은 여전히 너무나 많고 여성의 건강은 엄살이나 히스테리로 무시되어왔다. 이 주제에 대해서도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한다.) 생리 전이나 임신 중에도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으니 배려할 필요가 없다거나, 누구는 출산 직전까지 일하고도 5분 만에 아이를 낳았다는 무용담 따위를 추가하고자 함도 아니다. 생리, 임신 등은 분명히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지만 인지 능력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이 당연한 사실이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얘기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생리 전에 겪는 변화는 배란 후 임신을 하지 않았을 때 프로게스테론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 실제로 PMS인 경우 에스트로겐이 함유된 호르몬 피임약으로 생리를 아예 중단시키거나, 정신적으로 고통이 심한 경우 신경정신과를 찾아 항우울제를 처방받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 같은 정확한 지식이다.
사실 호르몬 탓하기는 여자들 스스로 애용해온 방어기제이자 핑계다. 인스타그램 에서 ‘호르몬’을 검색하면 ‘#호르몬탓’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우울한 얼굴을 찍은 사진 게시물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치킨 한 마리에 초콜릿,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난 뒤 스스로에게 건네는 “호르몬이 널뛰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위안은 얼마나 보편타당하면서도 트렌디한지. 회사 동료와 격한 언쟁을 벌인 후 “호르몬 때문에 예민했다”고 건네는 사과는 얼마나 인간적이며 생물학적인지. 호르몬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면죄부다. 하지만 프리 패스 ‘호르몬 탓’은 여자들에게 다시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일단 “그날이야?”라는 비아냥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정당한 이유로 화를 내도 호르몬 때문에 화낸다고 오인을 한다. 그 과정에서 진짜 문제점을 놓친다. 누군가는 이 고정관념에 일조하지 않기 위해 생리 중이거나 임신 중에 몸이 편치 않음에도 무리하게 일해서 건강을 망치기도 한다. 여성은 감정적이고 변덕스럽고, 남성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는 고정관념이 강화되면 여성의 능력은 늘 의심받게 된다. 여자들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남자들은 거칠 필요가 없는) 고정관념까지 넘어서야 한다. 잘못 알려진 생물학은 차별을 강화한다.
지난달 <보그>와 만난 <질의 응답> 저자 엘렌 스퇴켄 달은 성에 대한 정보는 왜 은폐되고 미신화되는지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사회가 여성의 삶을 통제하고 싶기 때문이다. 여성을 묶어두는 가장 쉬운 방법은 여성의 성을 긴장되고 불안한 상황에 몰아넣는 것이다. 진짜 정보는 감추고 거짓말을 해가면서. 정보 부재와 외부의 통제는 직결된다.” 여기서 통제의 주체는 남성 중심의 사회다. 여자를 가정에 묶어두기 위해 모성을 여성의 특권이자 권리로 만들었듯 호르몬 신화도 빠르게 퍼져나가 여성의 능력을 폄하하는 데 일조한다.
나는 여자들부터 호르몬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단체 카톡 창에 로빈 스타인 델루카의 TED 강연을 찾아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강연을 본 한 친구는 짜증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생리나 임신 때문에 힘들어죽겠는데 힘들다는 얘기까지 왜 눈치 보면서 해야 해? 결국 사회가 문제인데 호르몬이 ‘신화’인지 ‘실화’인지 왜 여자들이 입증까지 해야 하느냐고!!!?” 친구는 PMS 때문에 예민하거나 극단적 상태가 아님을 밝혀둔다. 히포크라테스가 자궁이 몸속을 돌아다니다가 뇌 옆에 안착하면 비정상적인 감정과 행동을 보인다고 주장한 지 수천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과학을 무기로 여자들을 열등한 존재로 몰아가는 사회를 향해 발산하는 정당한 분노다.
- 피처 에디터
- 조소현
- 패션 에디터
- 이소민
- 포토그래퍼
- 이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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