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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반드시 했어야 할 이야기, ‘검을 현’의 노래

2019.10.29

누군가는 반드시 했어야 할 이야기, ‘검을 현’의 노래

검은돈의 검은 속내가 숨을 곳이 없을 때 진실은 드러날 것이다. 누군가는 반드시 했어야 할 이야기. 정지영 감독과 배우 조진웅, 이하늬로부터 흐르는 ‘검을 현’의 노래.


대중이 영화감독의 세계를 인지하는 순간은 감독의 이름만으로 장르가 떠오를 때다. 정지영 감독의 이름 석 자는 사회 고발 영화의 상징이다. 1980년대부터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그려낸 <남부군>, 베트남전의 현대사적 의미를 재조명한 <하얀 전쟁>, 영화를 통해 현실을 직시한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까지 우리 사회의 이면을 조명해온 그는 2007년 석궁 테러 사건을 다룬 <부러진 화살>과 1985년 민주화 운동 당시 남영동 고문 사건을 담은 <남영동 1985>로 영화를 통해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을 만들어냈다. 실화가 가진 무게 때문에 극장에 가기까지, 집에서 플레이 버튼을 누를 때까지 심호흡이 필요하지만 실화와 영화적 재미의 균형감이 탁월한 정지영의 영화는 두꺼운 역사서보다 치열한 다큐멘터리보다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블랙머니>의 출발점도 실화다. IMF 이후 자산 가치 70조원에 달하는 은행이 한 외국 자본에 1조7,000억원이라는 헐값에 인수된 사건. “은행은 군대보다 무서운 무기다”, 정지영 감독은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며 기득권자들의 금융자본주의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검은색 터틀넥과 수트 팬츠는 김서룡(Kimseoryong), 워커는 에르메스(Hermès).

모티브가 된 금융 스캔들 이면에 다른 이야기가 있음을 어떻게 알게 됐나요.

2003년부터 2011년까지 8년 동안 일어난 사건입니다. 국회, 언론, 사회단체에서도 시끄러웠던 사건인데도 대부분 이런 사건이 있었다 정도만 알지 깊은 내용은 잘 몰라요. 여러 자료를 통해 공부해보니 많은 사람이 토론해야 하는 이야기였고 또 영화화하면 흥미롭겠다 싶었어요.

취재 과정이 어렵지는 않았나요. 쉬쉬하는 분위기도 예상됩니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들은 못 만났지만 그들과 가까운 사람들과 문제 제기를 했던 재야 사회단체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물론 다 털어놓진 않죠. 그래도 느낌으로 알잖아요.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를 새로 찾아낸 건 아니에요. 불가능하지요. 밝혀졌는데도 사람들이 모르는 이야기죠.

배우 조진웅이 영화로 나오기까지 다사다난했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준비한 지 6~7년 됐으니까 오래됐죠. 시나리오 작업부터 어려웠어요. 저는 대중들이 별로 안 좋아하는 소재를 선택해요. 사회 문제, 정치 문제는 골치 아프니까 싫어하잖아요. 어렵고 난감한 문제를 어떻게 하면 관객이 재미있게 보도록 풀 수 있느냐가 가장 큰 고민이었어요.

소재가 가진 어려움과 대중의 관심 사이에서 어떻게 접점을 찾았나요.

주인공 캐릭터에 대해 별별 생각을 다 했다가 결국 검사로 설정했어요. 신문기자면 경제부 기자이니 전문가고 은행원이어도 마찬가지더라고요. 그 사람에겐 쉽지만 관객한테는 어려워요. 그래서 일반 사범들을 조사하는 검사가 우연히 그 문제에 부딪혀 파고들면 관객과 함께 맞춰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관객은 조진웅에게 감정 이입해 따라가기만 하면 돼요.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감히 재미있게 만들었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영화감독의 자세로 ‘트렌드를 놓치지 않되, 진정성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것’을 여러 번 꼽았던 기억이 납니다. <블랙머니>의 트렌디한 면과 진정성은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요.

트렌디하다는 것이 패션이나 영화적 테크닉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분위기라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당대 대중 영화를 접하면서 감독의 ‘감’도 잡히잖아요. 그럼 그걸 영화에 쏟으면 됩니다. 진정성은 ‘관객과 재미있게 토론하고 공유하고 싶다’는 영화를 만든 목적에 있어요. 무조건 흥행을 바라는 자세는 진정성이 아니에요.

개봉 후 어떤 논란 혹은 토론을 일으키길 바라나요.

‘이렇게 어마어마한 사건이 묻혀 있었단 말이야?’, ‘아직도 문제가 남아 있네?’, ‘그럼 이 사건이 묻힐 수는 없지’ 이렇게 논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다들 무관심하지만 경제는 우리 삶에 연결되어 있어요. 경제 이슈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행에 돈만 맡기지 은행이 그 돈을 어떻게 활용해 이득을 내는지 잘 몰라요. 바로 그 문제를 알아야 한다는 게 이 영화의 내용이에요. 기득권자들이 서민들의 돈을 마음대로 활용해 자신들 배만 불렸어요. 예를 들어 미국에서 거대 금융회사가 파산했을 때 정부에서는 공적 자본을 투입해 살리려고 애썼어요. 하지만 퇴직하는 간부들한테 회사에서는 큰돈을 줬어요. 은행이 망하고 서민들 돈은 다 뺏겼는데 간부들은 배불리 돈 받고 나온 겁니다. 이런 것이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폐해예요. 저 돈이 우리 돈임을 똑바로 알아야죠.

평소에 어떤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달라는 제보를 받기도 하나요.

익명의 사람들이 “이건 꼭 감독님이 만드셔야 합니다” 하며 책도 보내고 자기가 쓴 원고도 보내와요. 물론 나에게만 보내는 건 아니겠죠.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다른 사람은 모르고 자기만 안다고 하면서 사회 이슈로 하소연하죠.

소재를 제공한 사람을 만나거나 이야기를 진척시켜본 적 있나요.

꽤 있죠. 그런데 그걸 다 소화할 수는 없어요. 작품 한 편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잖아요. 시나리오만 해도 몇 년 동안 쓰니까요. 소재는 내가 찾기도 하고 영화가 되겠다 싶으면 그때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요.

제보가 늘어난 시점은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부터일 듯합니다.

그렇죠. 그런데 알다시피 그 이후로 제가 영화를 많이 못했거든요.

<천안함 프로젝트>, <직지코드>, <국정교과서 516일: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 같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지만 상업 영화까지 몇 년의 공백이 있습니다.

나에게 투자하지 않더라고요. 부담 된다는 이유였죠. 멜로 드라마는 괜찮겠지 싶어 준비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것도 안 되더라고요. 정지영은 찍혔구나 생각했죠. <블랙머니>도 어렵겠다 생각했는데 다행히 풀렸어요. 시나리오는 계속 고치면서 쓰고 있었는데, 이 작품의 투자자가 “혹시 시나리오 준비하고 계신 거 없어요?” 하며 보자고 하더라고요. 좀 어렵긴 하지만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해서 제작할 수 있었어요.

<부러진 화살>이나 <남영동 1985> 때 홍보 없이 개봉한 기억이 납니다. 혹시 생길 압박을 피하기 위해 영화 제작 사실 자체를 알리지도 않았죠. 심의도 통과한 <천안함 프로젝트>는 극장에서 갑자기 상영 중단했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대처할 굳은살이 생겼으리라 생각됩니다. 2019년에도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나요.

표현의 자유는 확보됐다고 봐야죠. 블랙리스트 시절에는 표현의 자유 자체가 아니고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을 시간과 공간이 다 차단되어 있었으니까요. 나는 영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시점이 검열이 없어진 후부터라고 보거든요. 검열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후배들에게 행복한 시절을 살고 있다고 해요. 그들의 무한한 상상력으로 한국 영화가 풍부해졌어요. 그 풍부한 상상력을 계속 보여주게 만들어야 하는데 자본이 한쪽으로 자꾸 몰아가네요.

또 다른 폭력이군요.

말하자면 정치 검열에서 자본 검열로 넘어온 거예요. 그게 안타깝죠.

영화를 만들기 가장 좋은 시절은 과거와 현재 중 언제인가요.

지금이 좋은 시절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지금 영화 산업 환경이 썩 좋지는 않아요. 대기업 매뉴얼에 따라가기 때문에 다양성을 죽이잖아요. 나는 지금 한국 영화 극장 점유율이 50%는 되니 계속 좋다고 생각하는데 좋은 시절이 꺾이고 있다고도 봐요. 근본적으로 영화계가 극복하지 않으면 위기가 오죠. 내가 제일 흥이 나던 시절은 젊었을 때죠. 옛날에는 스태프도 전문가라기보다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지금은 각 분야에서 다 전문화되어 있고 실력도 뛰어나죠. 과학적이고 조직적으로 일하고요. 투자자들이 이들을 잘 활용하기 위한 방법을 많이 연구해야 해요.

<블랙머니> 연출 면에서 새로운 시도도 있었나요.

변화가 좀 있었죠. 좋아진 환경이 나한테 생각할 시간을 많이 줬어요. <블랙머니>에서는 조금 계산을 달리했어요. 사회적 이슈를 다루지만 관객에게 재미를 전하기 위해 장르적 기법을 동원했어요. 하지만 테크닉은 최대한 줄었어요. 카메라 워킹을 화려하게 하거나 인물의 분장을 특별히 해서 화면을 강조하면 리얼리티가 떨어지기 때문이에요. 움직이는 인물을 따라가기 전에는 감독이 관객의 감정을 유도하기 위해 카메라를 움직이는 걸 절제했어요. 마지막에 그런 기법을 좀 사용했고요.

조진웅, 이하늬라서 가능한 장면도 있겠죠.

두 사람 다 시나리오에 반했어요. 그 점이 가장 흐뭇했죠. 그리고 어떤 사명 같은 걸 갖고 작업에 임했어요.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제작 보고회 때 이하늬 안에 주인공 김나리가 있다고 얘기한 이유는 내면의 심지가 아주 단단한 배우임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조진웅은 그냥 배우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배우예요. 두 배우와 작업은 아주 즐거웠어요.

37년 가까이 현장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50세 넘으면 은퇴라고 할 만큼 중년 이후 영화감독 대부분이 현장을 떠납니다. 소재 헌팅부터 기획, 투자까지 직접 해오며 이 상황을 돌파해왔습니다.

다른 동료 감독들보다 내가 더 집요하게 계획적으로 잘 대처해서가 아니라 운이 좋았다고 봐요. 사실 영화는 투자자들이 결정하거든요. 투자자들은 나이 든 사람들을 별로 선호하지 않아요. 거기에 문제가 있어요. 나이 든 감독은 낡았다고 여기고 대하기 불편하니 외면해요. 나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봅니다. 그들의 노하우는 엄청난 것이에요. 그래서 이번 작품이 중요해요. <블랙머니>가 성공해야 지금 일하지 않는 동료 혹은 후배들에게 무슨 작품 있는지 물어볼 것 같아요.

영화계만의 상황은 아닙니다. 나이 든 전문가를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실무에서 배척하죠.

대한민국 사회가 조루해요. 영화는 노하우가 상당히 중요해요. 중국, 일본, 미국에서는 80대 감독들이 계속 일해요. 그들의 경력과 노하우에 투자하는 거죠. 우리는 신인 감독들도 한 작품만 흥행이 실패하고 나면 사장시켜요. 그들이 더 연구하고 공부해서 3년 후에 데뷔했으면 좋은 작품을 만들었을지 모르잖아요. 제일 먼저 시나리오를 보고, 다음에 감독을 선택하고, 세 번째로 연기자를 봐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연기자를 먼저 보고 작품의 투자 여부를 결정해요. 모순이에요. 작품을 보고 투자해달라는 거죠.

나이가 들면 둥글둥글해진다고 하는데 당신은 날카로움을 놓지 않은 듯합니다.

모든 구석이 둥글둥글할 순 없어요. 어떤 면에선 날카로운 게 있기에 둥글둥글한 거죠. 나는 사람들과 일하고 의사소통하는 데는 둥글둥글한 편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물에 대한 관점을 말할 때는 주관을 뚜렷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 차이일 뿐이에요.

한순간도 영화를 내려놓은 적 없습니다. 지금도 준비 중인 작품이 있나요.

<부러진 화살>에서 사법부 얘기를 했잖아요. 이번에는 돈 얘기지만 끌고 가는 주체는 검찰이고요. 그런데 진짜 우연히도 다음 작품은 경찰 이야기입니다. 의도치 않게 삼작을 하게 됐어요. 옛날에 어느 평론가가 내 작품을 두고 ‘현대사 삼부작’이라고 한 말이 떠오르더라고요. <남부군>이 현대 정치사, <하얀 전쟁>이 현대 경제사,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현대 문화사를 그렸다고 카테고리를 만들어줬거든요(웃음).

영화가 지닌 힘에 대한 소견을 듣고 싶습니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순 없다고 봐요. 다만 옛날에 “감독님을 보고 제 삶의 목표를 바꿨어요”라는 말을 들었어요. 아, 어떤 사람에게는 그만큼 중요한 거구나 했어요. 이 영화를 보고 생각이 바뀐다면 그것이 변화죠. 세월이 지나 그런 변화가 모였을 때 그게 힘일 겁니다. 내 작품 하나가 어떤 힘을 발휘하긴 어렵습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남색 오버사이즈 코듀로이 재킷을 걸친 이하늬가 나타나 정지영 감독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하늬는 늘 즐거웠어요. 현장에 나오는 것이 아주 신나는 거야.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정지영 감독은 만면 가득 웃음을 터뜨리며 이하늬를 반겼다. 화보 컨셉을 ‘블랙’으로 잡은 탓에 <보그> 촬영장은 검은색 옷이 산을 이루고 소품으로 검은 바다를 이뤘지만 이하늬는 묻히지 않았다. 그녀의 뺨에 파인 보조개가 정반대로 흙빛 세상 속에서 도드라졌다. 촬영장을 누비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건네는 인사에 사람들은 생기를 선물 받았다.

수트 재킷과 팬츠는 송지오 옴므(Songzio Homme), 구두는 유니페어(Unipair).

그사이 매끈하게 머리를 만져 올린 조진웅이 의자에 앉았다. 뱃살 및 기타 여러 가지를 감춰주는 데 협조적인 색상이기에 블랙 의상을 좋아한다고 농담 같은 진담을 한다. 조진웅으로부터는 스크린에서 익히 봐온, 거대한 장악력이 느껴진다. 의자와 벽이 검은색이 아니었더라도 그가 앉아 있던 배경 색깔 따위는 기억나지 않았을 것이다.

<블랙머니>에서 조진웅이 연기한 양민혁은 수사를 위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검사다. 강렬한 목적의식을 별것 아닌 듯 드러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실제보다 강렬한 언어로 내보이는 사람도 있는데 조진웅은 후자다. 금융 비리 사건의 실체를 파헤쳐가기에 더할 나위 없다. 조진웅의 막강한 장악력은 악역을 만났을 때는 위협적으로 쓰이고 진실을 밝히는 데는 뜨겁게 사용된다. 얼굴에 자리한 선이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하면 대중은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듯 이 양가적인 남자를 두 눈으로 좇는다.

<시그널>, <독전> 등을 거치며 사건을 추적하고 진실을 밝히는 캐릭터는 조진웅의 전공이 됐다. “맞아요. 몇 차례 해봐서 많은 데이터가 쌓여 있어요(웃음). 양민혁은 결이 다른 케이스예요. 아파하고 끝내는 영화가 아니라서 양민혁 검사에게 기존 좌충우돌식이 아닌, 어느 정도의 지성과 이성적 잣대, 객관성이 필요했어요. 관객이 양민혁을 따라 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누군가가 외쳤던 말을 우리가 배턴 터치해 말하는 거니 편안한 상태에서 건조한 호흡을 갖고 갔어요. 최대한 무게를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도 했고요. 인물을 정형화하면 보는 사람도 지치잖아요.”

진실을 좇는 자들은 무던하지 않다. 예민하다. 불편함을 보면 눈을 질끈 감고 지나치지 못한다. 캐릭터의 DNA를 자신의 DNA 속으로 집어넣는 ‘자기화’ 과정을 통해 새 인물을 맞는 조진웅에게 진실을 좇는 자들의 DNA가 있다. 집요함에는 정의 같은 가치가 작용하기에 문제의 출발점 자리에 조진웅은 썩 잘 어울린다. 조진웅의 실제 성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이것이다. 길을 가다가 통제구역이 있어 다들 우회하는데 특정 차만 지나갈 때, 조진웅은 이유를 꼭 알아야만 한다. “성격이 좀 모났어요. 주변 사람들은 제발 그냥 가라고 하죠. 뭔가 부당하면 못 참아요. 아무리 피곤해도 반드시 알아야 하죠. 그래서 차라리 안 보려고 집에만 있으려고요(웃음).”

조진웅이 입은 네이비 컬러 셔츠는 코모도(Comodo), 이너로 입은 블랙 터틀넥은 김서룡(Kimseoryong), 블랙 팬츠는 송지오 옴므(Songzio Homme), 정지영 감독이 입은 스트라이프 재킷은 송지오 옴므, 이너로 입은 네이비 컬러 터틀넥은 에르메스(Hermès).

조진웅은 아버지와 동갑인 정지영 감독과 <보그> 카메라 앞에 섰을 때 <퍼펙트맨>, <광대들: 풍문조작단>, <우리는 형제입니다> 엔딩에서 지을 법한 편안한 얼굴이 됐다. 조진웅이라고 한국 영화사 100년 중 37년의 지분이 있는 거장 감독이 부담스럽지 않았을 리 없다. 정지영 감독을 처음 만난 날, 조진웅은 선수 쳤다. “감독님, 제 앞에서 <하얀 전쟁>, <남부군> 얘기하시면 저는 아무 얘기도 못하고 영화 새내기처럼 앉아만 있어야 해요. 제 앞에서 그 아성을 드러내지 마세요.” 정지영 감독은 손사래 쳤다. “오, 아냐, 그런 거 아냐.” 조진웅이 선언하지 않았더라도 정지영 감독은 똑같았을 것이다. 또래 감독과 미팅하듯 첫 미팅을 마쳤다. “이종호 피디가 같이 계셨는데 정지영 감독님께 지적도 하시더라고요. 그때 철옹성 같았던 벽이 녹아내렸고 작품 이야기를 심도 있게 할 수 있었어요. 감독님과 얘기하다 너무 심장이 두근거려서 그날 아주 진하게 술 한잔했죠.”

조진웅은 정지영 감독에게 “돈 되는 영화를 하시지 왜 고발 영화를 하시나요?”라고 질문을 던진 적 있다. 정지영 감독의 답변은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다”였다. 문제를 알아버려서, 할 수 있는 방법이 영화뿐이라 영화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그렇다면 조진웅은 돈 되는 영화에 출연하지 왜 고발 영화에 출연했을까. “돈 되는 영화를 왜 안 합니까? <독전> 같은 영화는 극영화로서 웰메이드 작품이고 저는 그런 영화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코미디도 좋아하고. <블랙머니>처럼 우리가 사는 시대에 화두를 던지는 영화도 필요합니다. 이런 영화에는 또 다른 신명이 있는 것 같아요. GV나 기자 간담회 때 치열한 공방이 오고 갔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관객과 우리 의식이 합일될 수 있을 테지요. 관심 없다고 묻힐 이야기인지 생각해보면 관심 없을 수밖에 없게 만든 뭔가가 있어요. 이 시국에 정지영 감독님이 화두를 던졌고 저희는 발현자이자 연희자로 같이 공유하는 거죠.”

가죽 봄버 재킷은 비바스튜디오(Vivastudio), 흰색 셔츠는 까날리(Canali), 검지에 낀 골드 반지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약지와 새끼손가락에 착용한 골드 반지는 락킹에이지(Rocking Ag).

배우이기 전에 국민으로서 조진웅은 이 사건에 관심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대학생이었고, 월드컵이 있었죠. 물밑 작업은 훨씬 전부터 이뤄지고 있었고요. 생각해보면 IMF 때도 어려웠는데 그 힘든 시기를 거쳐 도약할 수 있는 시기에 다시 이런 사건을 맞았을 때 우리는 왜 휘청거리는지 이유를 몰랐어요. 모두 그들의 소행이었어요. 그렇게 환경까지 만들어버리는데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무서운 건 물에 물 탄 듯 없애버린 현실 속에 우리가 있었다는 거죠. 이런 소재를 두고 지겹다고 한다면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똑같아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참지 않고 외치는 사람이 있어야 해요. 우리가 그걸 하고 있으니 봐보시라 이거죠.”

물음표가 달린 문장에 대응할 때도 조진웅의 에너지는 대단하다. 표정이나 움직임이 크지 않지만 화이트 큐브에서 울리는 듯 입체적 음성으로 막힘없이 정확히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하늬는 제작 보고회에서 조진웅을 향해 질문했다. “도대체 뭘 드시길래…” 에너지는 섭취 행위로만 나오지 않는다. 거대한 산 같은 에너지는 매번 작품의 메시지로부터 비롯됐다. “에너지는 정말 중요해요. 저에겐 콤플렉스도 꽤 많지만 콤플렉스가 큰 에너지가 되기도 합니다. 감추기 위해 혹은 더 당당하고자 드러내는 에너지가 작품의 메시지와 맞닿으면 더 좋은 에너지가 나와요. 좀 창피한 얘기지만 에너지의 원천을 저에게서 찾기도 해요. 양민혁을 연기할 때 제가 저를 못 믿으면 누가 믿어주겠어요. 배우는 스스로를 믿지 않으면 한 컷도 찍을 수 없어요. 창피해서.”

사람들은 자꾸 그의 든든한 등을 떠민다. 아이스 버킷 챌린지처럼 앞장서야 하는 종류의 일에 가장 먼저 지목당한다. 몇 년 전 <보그> 인터뷰 당시 조진웅은 연극·영화계 선후배들이 예술가로서 최소한 대우를 받도록 힘을 보태고 있었다. 고시원에서 홀로 아사한 연극배우에 대해 말할 때면 그의 얼굴은 여전히 안타까움과 몰랐다는 죄책감 범벅이 된다. 지금도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한다. 재능 기부로 고전극을 낭독해 연극배우들에게 후원금이 가도록 하는 식이다. 은퇴해도 변함없이 이어나갈 생각이다.

얼마 전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갔을 만큼 조진웅에게는 휴식보다 연기가 먼저였다. 과거 연극을 종교로 여기는 듯했다는 어느 후배의 증언처럼 조진웅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보여주는 배우라는 직업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오랫동안 연기하고 싶습니다’를 목표로 삼는 배우가 아니다. 좋은 쪽으로 영향을 발휘하고 싶어 하지만 영향력이 영원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계속 더 가혹하게 군다. 매일 자신에게 묻는다. “몸과 마음이 지쳤다고 목소리가 작아지는 순간 저에게 물어요. 너 오늘 괜찮니? 이렇게 어설프게 할 거면 그만둬. 스스로에게 매일 얘기합니다.”

조진웅이 입은 블랙 재킷은 송지오 옴므(Songzio Homme), 네이비 컬러 하이넥 저지 톱은 에르메스(Hermès), 이하늬가 입은 다크 그레이 재킷과 팬츠, 뷔스티에와 벨트는 프라다(Prada).

이하늬가 보는 조진웅은 모든 삶의 채널이 영화 안에 머물러 있는 배우다. 같은 소속사에서 오래 봐왔지만 작품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다. 조진웅 앞에서 이하늬는 ‘현실 남매’처럼 담배 좀 끊어라, 술 좀 줄여라 하며 툭탁거리지만 조진웅이 없는 곳에서는 탄복만 이어간다. “영화를 위해 사는 사람이에요. 그 모습이 어떨 땐 소년 같아요. 열정과 에너지가 원석 같은 배우예요.”

배우들의 입을 통해 듣는 ‘사명감’이라는 단어는 견고하다. 이하늬는 형사소송법 제234조 “누구든지 범죄가 있다고 사료하는 때에는 고발할 수 있고 공무원은 그 직무를 행함에 있어 범죄가 있다고 사료하는 때에는 고발하여야 한다”로 영화 <블랙머니>를 설명했다. “시나리오를 처음에 읽었을 때 세상의 빛을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하겠다는 의지를 지닌 선배들의 엔진에 얹혀가는 느낌으로 동참했어요. 알 권리를 가진 국민에게 영화인으로서 이런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꺼이 의지가 생겼죠.”

<블랙머니>에서 이하늬는 국제 통상 전문 변호사 김나리를 연기한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이성과 지성을 겸비한 인물이다. 차분하고 냉철하게 소신을 지키기에 “이거 불법이면 내가 용납 못해”라고 선포할 때 더 큰 무게감이 실린다. <극한직업>, <열혈사제>에 이어 이하늬는 또 한번 성별이 떠오르지 않는, 독립적 개체로서 온전한 직업인을 그린다. “김나리는 똑똑한 인물이라 똑똑한 척할 필요 없어요. 단어만으로 지적인 느낌을 보여줘야 했죠. 제가 뭔가 원할 때, 날이 선 전투 모드로 전환됐을 때 에너지를 가져다 썼어요. 보통 처음부터 대본을 숙지하기보다 그냥 허공에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많이 그려요. 문득 김나리라면 어떤 음식을 먹을까, 어떤 옷을 입을까, 친구들은 어떨까, 어떤 책을 읽을까 계속 생각해요. 저로부터 출발해 상상으로 구체화시켜나가요.”

이하늬의 연기에는 극적인 드라마가 있다. 자신의 얼굴을 쥐락펴락한다. 개화 과정을 빠르게 재생한 듯 환하게 피었다가 주먹으로 백지를 쥔 듯 순식간에 일그러뜨린다. 스스로 인정한 얼굴과 골격에 있는 ‘판타지성’은 그 온도 차를 극대화한다. 그런 이하늬를 보노라면 등 어딘가에 감정 조절기라도 달려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된다. 수직 상승과 하강을 오가는 연기는 <타짜-신의 손>, <부라더> 같은 작품에 기묘한 활기를 부여하고 <극한직업>, <열혈사제>에서는 능청스러운 웃음을 선사한다. 셰프, 약혼녀, 기묘한 여자, 로봇 박사 등을 연기해왔지만 ‘자신의 일에 전문가이며, 말 잘하고 싸움도 잘하며 웃기기까지 한 여자 캐릭터’로 데뷔 이래 가장 주목받은 건 우리가 이하늬에게 이상향으로서 대리 만족을 바랐음을 증명한다. 배우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존재고 이하늬는 그 역할을 해내는 데 재능이 뛰어나다.

‘대세’라는 편리한 단어로 이하늬의 성과가 설명되는 요즘이지만 연기 열정을 의심받던 시절이 있었다. 의심을 자양분으로 끌어다 썼고 멈추지 않았다. “언젠가 연기자라는 얘기를 듣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월의 이끼가 끼게끔 계속 구르는 것밖에 없었어요. 성실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죠. 미친 듯 성실함을 보이면 ‘와, 쟤가 연기를 정말 하고 싶구나’ 봐주리라 믿었죠. 미스코리아는 매우 감사한 영광이지만 과거에 매여 있는 아티스트만큼 초라한 존재가 없어요. 계속 조금씩 전진하는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이하늬가 꼽은 배우로서 전환점은 <침묵>이다. “이 작품으로 완전히 저를 내려놓게 됐어요. 또 다른 나를 찾을 수 있다는 설렘과 두려움으로 촬영장에 갈 때마다 날아갈 것 같았어요. 제가 가진 추함과 약점을 완전히 드러냈을 때 아트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어요. 마지막 장면은 아예 대본에 없었는데 정지우 감독님이 ‘태산’을 향해 어떤 말을 할 것인지 연기하면 된다고 디렉션을 주셨어요. 화장실 장면도 스무 테이크를 갔는데 전부 다른 디렉션을 주셨고요.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즉흥연기가 살 떨리면서도 재미있었어요. 이 한 번의 느낌을 위해 천 번도 연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가죽 트렌치 코트는 인스턴트펑크(InstantFunk).

<블랙머니>처럼 사명감과 유사한 감정으로 선택한 작품도 있다.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장녹수 역할이다. 가야금 연주자로 활동하며 한국무용과 판소리에도 능한 이하늬는 가야금 무형문화재인 어머니를 비롯 형제자매까지 국악을 전공한 집안에서 자랐다. 누구보다 한국 문화를 가깝게 접한 이하늬는 세계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한국 문화의 정수를 작품에서 구현해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이 시도는 한국 문화를 보여주려던 목표를 넘어서 환경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여성상으로서 장녹수를 남겼다.

“연기만 고민한다고 연기가 되지는 않는다”는 이하늬는 자발적 고립, 다른 활동에서 얻는 영감이나 에너지로 삶의 균형을 맞춘다. 마음의 건강을 중요히 여기고 그걸 담는 육신이 든든히 지켜줘야 모든 활동을 넉넉히 할 수 있음을 깨닫고 매일 아침 운동을 한다. 자신의 일상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누고 싶어 유튜브도 시작했다. 얼마 전에는 발리에서 리브어 보드를 타는 영상을 업로드했다. 바다 생물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플라스틱을 쓰지 맙시다’라는 구호보다 자연스럽게 우리 의식을 바꿔놓듯 이하늬의 밝은 에너지와 열정, 성실함이 우리에게 기분 좋게 스민다.

새틴 라펠 칼라 장식
턱시도 수트는 발맹(Balmain).

미국 에이전시와 계약도 맺었다. “‘진출’ 같은 단어는 정말 쓰고 싶지 않아요. 정말 많은 플랫폼이 열렸어요. 세계에서 동시에 넷플릭스를 보죠. ‘진출’이 아닌 ‘협업’이고 ‘상생’이에요. 12월에 김지운 감독님과 작업이 예정되어 있는데 이 역시 프랑스와 협업이에요. 배우로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관해 답을 찾기 위한 시도죠. 새로 자극받고 도전해서 성숙해지는 제 모습을 볼 때 성취감이 큰 사람이에요. 도전해서 성장할 수 있다면 멈추지 않아요. 그 연장선이자 한국뿐 아니라 어디서든 가능성을 열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조진웅과 이하늬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에너지를 뿜어내며 전혀 다른 방식의 공조를 이루었을 것이다. 대학생이었고 사회 초년생이었으며 회사원이었을 우리의 2003년을 떠올린다. 세상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고 영화는 세상을 바꿀 수 없지만 진실한 이야기의 힘은 여전하다. 야망보다 명분에 움직이고 낙관적인 긍정주의자보다 노력하는 현실주의자인 이 배우들은 어떤 이야기를 전할까. 이들이 건네는 메시지에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움직인다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당장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변화는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어도 좋겠다.

    패션 디렉터
    손은영
    피처 디렉터
    조소현
    에디터
    이소민
    포토그래퍼
    김보성
    스타일리스트
    김지혜(이하늬), 진보람(조진웅)
    헤어
    이혜영
    메이크업
    이영
    세트
    최서윤(D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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