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

찬 바람이 불면 순댓국

2019.11.29

찬 바람이 불면 순댓국

찬 바람 불면, 미떼인가요? 저에겐 순댓국입니다. 진득하게 우러난 그 국물에 도톰한 순대, 온갖 내장을 떠올리면 몸이 따뜻해지는 계절이 왔어요. 맵싸한 다진 양념 한 술 풀어 먹으면 3년 전 숙취마저 풀리는 느낌이죠.

일종의 패션이 된 노포 열풍 덕분에 이 자리에서 당당히 고백합니다. 멋진 레스토랑과 카페, 바에 가는 것도 좋지만 이 계절엔 순댓국 정취도 좋지요. 찬 바람을 이겨낼 순댓국 리스트 몇 곳 방출합니다.

약수순대국

모델 휘황(요즘 젊은이들은 모를 수도)의 선택이네요. 약수동 소방서 앞의 약수순대국은 서울에서 으뜸으로 꼽습니다. 듬뿍 넣은 들깻가루와 거친 고춧가루가 매콤하게 추위를 털어내는 다진 양념이 발군인 곳이죠. 그 강렬한 맛을 견뎌내는 육수의 두꺼운 질감 또한 훌륭합니다.

분위기는 어떠한 의미로도 힙한 노포 열풍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봐도 여긴 그냥 노포. 점심, 저녁 시간대에 가면 아무렇게나 합석은 기본이고 빨리 먹고 나가라는 압박이 저 멀리까지 늘어선 대기 줄에서 느껴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수순대국은 꼭 경험해봐야 할 곳입니다.

화목순대국전문

화목순대국이라고 보통 부르죠. 여의도와 광화문에 있습니다. 약수순대국이 을지면옥의 평양냉면 같은 정결함과 터프함을 갖고 있는 데 비해, 화목순대국은 을밀대나 유진식당의 평양냉면처럼 입에 대자마자 팡팡 터지는 쾌활함을 갖고 있습니다. 낮에는 주변 직장인의 해장 메뉴, 밤에는 주변 직장인의 안주가 되는 맛이죠. 위치에 걸맞은 맛을 제대로 내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양념해서 부글부글 끓으며 나오는 시뻘건 국물의 순댓국은 얼큰하고 통쾌합니다. 하지만 제가 좀더 좋아하는 것은 모둠 수육. 어차피 술국이 딸려 나와서 국물이 아쉽지 않거든요. 간과 오소리감투, 암뽕과 막창, 머릿고기 등 다양한 부위가 만족도를 높여줍니다. 가끔 원치 않는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진한 술국 국물과 함께라면 그마저도 구수합니다.

와가리피순대

피순대는 전라도에서 즐겨 먹는 향토 음식입니다. 한국의 부댕 누아르라고 할 만큼 새카맣게 꽉 채운 돼지 피가 시그니처입니다. 정말 잘 만든 피순대는 핑크빛을 띠기도 한다는 사실은 좀 다른 얘기지만 말이죠. 전국구 명성을 가진 조점례남문피순대 등 전주가 유명한 피순대의 고장입니다. 논산, 군산 등 주변까지 피순대가 주종을 이루죠.

서울에서 꽉 찬 피순대를 먹을 수 있는 곳은 흔치 않습니다. 동대문구 용두동에 꽤 훌륭한 피순대를 선보이는 곳이 한 곳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랄까요. 새카맣기보다는 좀더 밝은, 버건디 컬러에 가까운 피순대는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쫄깃한 내장 안에 꽉 찬 크리미한 질감이 마치 푸딩을 먹는 듯하죠. 암뽕을 곁들여 내는데 참 잘 삶았습니다. 다소 외진 위치라 큰맘 먹어야겠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산수갑산

을지로 노포 열풍을 이끈 몇 곳의 태풍의 눈 중 하나죠. 산수갑산이라는 간판을 단 노포입니다. 찹쌀밥이 꽉 찬 내장 순대와 다양한 내장 부위로 두말할 것 없는 명성을 갖고 있죠. 오죽하면 네이버의 한 줄 설명이 “수요미식회와 최자로드도 인정한 대창순대”로 되어 있습니다.

너무 맵지 않게, 주홍빛을 띤 국물의 진득함과 일정한 품질로 삶아내는 순대, 내장의 맛이 노포의 위용을 과시합니다. 발렌시아가 운동화와 엘칸토 신사 구두가 함께 놓인 풍경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낮술에 제격인 곳이지만, 안타깝게도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브레이크 타임을 두고 있습니다.

    이해림(푸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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