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근영이라는 어른
문근영은 배우의 올바른 예를 만나는 패스트 트랙이다.
9년 전, 연극 <클로저> 기자 시사회에 갔다. 영국 극작가 패트릭 마버 (Patrick Marber)의 두 번째 희곡으로 1997년 런던에서 초연했으며, 우리에겐 2004년 주드 로, 나탈리 포트만,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로도 익숙하다. 문근영과 신다은이 오직 사랑을 믿는 분방한 영혼, 앨리스 역을 맡았다. 기자 시사회는 객석 앞에 사진가들이 자리 잡고 기사에 쓸 홍보 사진을 촬영한다. 플래시가 터지고 다소 번잡한 분위기라 배우에겐 꽤 어려운 무대다. 그렇다고 공연 내내는 아니고 하이라이트에서 촬영이 진행되곤 한다. 그런데 앨리스(문근영)가 담배를 피우는 장면에서 일제히 플래시가 ‘다다다’ 터졌다.
전까진 조용했기에 플래시 소리는 확성기에 댄 듯 컸다. 문근영이란 배우가 감내해야 하는 것이 한순간에 느껴졌다. 후에 기사를 찾아보니 문근영은 “연극보다 자신의 노출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오래전 이야기를 꺼내자 문근영이 큰 눈을 그렁그렁하게 뜬다. 그의 눈은 평소에도 슬퍼 보이지만. “그런 것들이 답답하곤 했죠. 하지만 익숙해졌는지, 적응됐는지, 포기했는지, 이젠 제 몫이라 생각해요.” 그래도 전보다 나아지지 않았나요? “많이 나아지고 있죠. 사람들의 시선도 관심도도 예전과는 조금 바뀌었어요. 저 자신도 편해진 것도 있고. 아무래도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니 여유가 생겼나 봐요.”
우리는 문근영에게 몇 가지 프레임을 씌운다. 예전 기사를 찾아보면 ‘미보단 선으로 스타가 된 배우’, ‘우리 시대 도덕적 아바타’, ‘영원한 국민 여동생’처럼 연기 잘하고 착하고 동생 삼고 싶은 문근영을 찬양한다. 최근에도 문근영은 독도 캠페인 일환으로 제작된 ‘두 유 노우(DO YOU KNOW)’ 티셔츠를 입은 사진과 ‘독도는 우리 땅!’이란 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워낙 기부도 많이 하고, 인성과 개념이 바른 친구로 유명하다. 이는 배우와 별개의 인간적인 면인데, 우린 그 도덕적 기준을 배우 활동에도 입히곤 한다. 영원히 순수한 여동생으로 남아주었으면 하는 대중의 바람은 문근영의 꾸준한 연기 변신으로 많이 사라졌지만, 담배 피우는 앨리스에게 플래시가 터진 것처럼, 여전히 그의 연기를 바르고 착한 프레임으로 보려고 한다. 문근영은 얼마나 오래 힘들었는지 구태여 말하지 않는다. 그는 연극의 다른 고민을 꺼낸다(<클로저>에 이어 2017년 배우 박정민과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을 연기했다). “연극은 제게 흔치 않은 기회라 제안을 받고 덥석 잡았어요. 진짜 무대에 서고 싶었고, 조금 부족하지만 하나씩 배워가고, 연기하는 사람들과 같이 호흡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다른 매체로 인지도를 얻은 배우가 연극하는 건 쉽지 않아요. 동료 배우와도 이런 얘기를 한 적 있어요. 같은 캐스트의 배우가 연기를 훨씬 잘하는 거 아는데 자기 표만 매진이라 자괴감이 들었다고요. 공감 가요. 이젠 그것도 제 몫이라 생각하지만.” 스타 캐스팅은 연극 수요층을 더 넓히는 장점도 있지 않냐고 물었다. 문근영은 그저 “연극은 또 하고 싶어요. 다만 준비를 단단히 해서 더 잘하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최근 문근영은 tvN 드라마 <유령을 잡아라>의 촬영을 끝냈다. 드라마는 현재 중반부를 방영 중이다. 문근영은 지하철 연쇄살인마를 쫓는 지하철경찰대 신참 형사 ‘유령’ 역을 맡았다. 연쇄살인마가 누구인지 미스터리를 가져가지만 “상극콤비 밀착수사기”라는 드라마 설명처럼 전반적으로 유쾌하다. 유령도 비밀은 안고 있지만 열정이 넘쳐 가끔 민폐를 끼치는 귀여운 신참이다. 솔직히 <마을-아치아라의 비밀> 이후 4년 만의 드라마 컴백작이 <유령을 잡아라>라서 의외였다. “4년 만의 드라마라고들 하시는데, 그 4년이 저에겐 ‘크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이 쉬었기 때문에 다른 공백과는 다른 것 같아요. 그저 재미있는 걸 하고 싶었 어요. <유령을 잡아라> 대본을 보고 좋은 의미로 정신없었어요. 진지했다가 웃겼다가 슬펐다가 빵빵 터졌다가. 남자 주인공도 멋있었다가 귀여웠다가 지질했다가. 처음 2회 차 대본을 받고 읽는데 훅훅 넘어갈 만큼 재미있어서 했어요.”
문근영은 1999년에 70분 단편영화 <길 위에서>로 데뷔한 뒤 미성년일 때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조언으로 작품을 선택했다. 스스로 선택하게 됐을 때 문근영은 “작품마다 그때의 내 상태가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제가 재미있으면 했지만, 그 재미라는 게 돌이켜보니 그 당시의 나와 닮았거나, 내게 자극을 주거나,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어요. 나와 밀접하죠.”
문근영의 영화 중에서도 2017년 <유리정원>을 가장 좋아한다. 영화 <어린 신부>, <댄서의 순정>,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사도>는 영화 안에 문근영이 있었다면 <유리정원>은 영화 자체가 문근영 같았기 때문이다. 신수원 감독의 <유리정원>은 2017년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이었다.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 혈액을 연구하는 과학도 재연(문근영)은 마음의 문을 닫고 스스로 숲의 유리정원에 고립된다. 당시 문근영도 그런 공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숨고 싶을 때가 있지만. 문근영은 둘러 이야기한다. “캐릭터와 제가 늘 똑같지 않아요. 지금 상태의 반대 캐릭터에 끌릴 때도 있고, 아예 캐릭터엔 매력을 못 느꼈는데 드라마 자체에 꽂히기도 해요.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 그랬죠. 대본이 공감되거나, 내가 느낀 바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을 때도 선택하죠. 하긴, 돌이켜보면 그조차 내 안의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지만요.”
문근영은 <유령을 잡아라>를 하기 앞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동물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은밀하고 위대한 동물의 사생활>(2018)과 역사 여행을 떠나는 <선을 넘는 녀석들-한반도 편>(2019)이다. 2017 년 급성 구획 증후군을 진단받아 네 차례 수술을 받고 회복한 뒤 활동이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우수아이아에 가서 펭귄을 만났어요. 그때 저에게 동물도 필요하고, 여행도 필요하고, 그런 힐링이 필요했나 봐요.” 문근영에게 투병으로 인한 변화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본인은 덤덤히 답한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아플 때도, 회복할 때도 별로 충격적이거나 고통스럽거나 괴롭지 않았어요. 그래서인지 변화도 잘 모르겠어요. 알아채지 못했을 수 있죠. 그거 하나는 알겠어요. 제가 병원에 입원할 거란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거든요. 그런 적도 없고, 입원할 뻔했어도 병원이 너무 싫어 거부했어요. 그런데 이번엔 제 의지와는 별개로 병원에 무조건 있어야 했죠. ‘사람 일은 모르는 거구나’ 싶더라고요. 진심으로 깨달은 한 가지죠. 덕분에 나를 더 표현하면서 살려는 거 같긴 해요.” 문근영은 <지식채널 e>의 ‘타인’ 편에서 이렇게 인터뷰한 적 있다. “(예전에는) 제 삶에 너무 많은 타인들이 있었거든요. 너무나 영향을 주는 타인들이. 그 타인들을 미워하면 참 편했을 텐데 그걸 못해서 자꾸 저를 미워했던 거 같아요.” 그런 문근영에겐 좋은 변화가 아닐까. “좋은 건지는 모르겠어요. 아직도 늘 모르는 게 많아요.”
문근영이 <선을 넘는 녀석들-한반도 편>을 한 것은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다. “정말 좋은 취지였고 여섯 번만 하면 된다잖아요. 긴 회차면 전문 예능인이 아닌 제가 하긴 어렵죠. 평소 역사에도 관심이 많은데 공부도 되고 즐거웠어요.” 문근영은 사극을 하면서 한국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사극 드라마는 아역으로 출연한 <명성왕후>(2001), 신윤복이 여자라는 상상에서 출발한 <바람의 화원>(2008), 조선시대 최초의 여성 사기 장인을 다룬 <불의 여신 정이>(2013)에 출연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2014)에서도 혜경궁 홍씨 역을 맡았다. “제게는 사극이 판타지 같아요. 역사적 사실이고 고증을 하지만 내가 사는 세계가 아니잖아요. 입는 옷도, 문화도 달라서 판타지처럼 느껴져요. 그래서 사극을 하는 거, 보는 거 재미있어하다가 자연스럽게 역사에 관심을 가졌어요. 고전문학을 공부하면서도 역사를 접하기도 했고요.”
알다시피 문근영은 공부하는 배우, 다독가로도 알려져 있다. “다른 건 욕심이 없는데, 책은 마음이 앞서요. 약간 우울할 때면 서점에 가서 목차와 작가의 말을 살펴보다 이것저것 구입해요. 인터넷 서점에서 종종 신간 서평도 캡처해요.” 집에 책이 쌓여가 때때로 처분해야 한다. 지난번엔 아름다운가게에 기부하고 친구들에게 선물해 어느 정도 정리했다. 앞으론 적당히 책을 사야지 하면서도 “다시 병이 도진다”고 말한다. <유령을 잡아라>의 촬영이 다 끝난 요즘도 10여 권의 책을 사서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중 좋아하는 책을 물을 때면 거론하는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도 있다. “스무 살 때 처음 읽고 20대 중반에 두 번째 읽고 최근에 다시 읽었어요. 나이마다 받는 느낌이 달라요. 처음엔 모모가 불쌍해서 슬펐는데, 점점 씁쓸함이 커져요. 뭔가 써요. 쓴맛이 나요.”
사실 문근영은 소설을 한 권 읽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다. 어릴 적부터 대본을 읽던 습관 때문에 소설의 대사나 감정을 일일이 느끼고 확장시켜 머리에 그리다 보니 진도가 쉽게 나가지 않는다. “하루 종일 한 페이지만 보고 있을 때도 있어요. 그래서 인문서나 사회과학 서적처럼 정보가 들어오는 게 편해요.”
문근영은 소설도 그냥 읽어 넘길 수 없는 ‘직업병’이 있을 만큼 오래전부터 배우였다. 그러나 본인은 한 번도 자신에게 합격점을 준 적 없다. 이전 인터뷰에도 자신을 배우로 인정한 적도 없고, “연기가 좋지만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문근영이 생각하는 배우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름은 남이 불러주는 거잖아요. 나는 배우라고 생각할지언정 남들이 날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소용없어요. 그런 맥락에서 아직 더 채우고, 더 배워야 해요.” 문근영은 영화계에서 여성 배우의 권익을 위해 할 일을 물었을 때도 사안은 공감하지만 “그 문제를 제가 거론해도 되는 사람인가, 그 자격에 대한 문제”를 얘기했다. 문근영은 자신에게 엄격하다. 스태프를 다정히 챙기면서도 스스로를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것이 ‘거의 모두가 사랑하는 문근영’이란 사람이자 배우를 만들었을까. 마지막으로 물었다. 요즘 문득 행복한 때는 언젠가요? “행복이 별건가요? 불행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 피처 에디터
- 김나랑
- 패션 에디터
- 남현지
- 포토그래퍼
- 이준경
- 스타일리스트
- 마연희
- 헤어
- 임진욱
- 메이크업
- 조히
추천기사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