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극장을 지켜줘
3월 17일 미국 정부가 10인 이상 외부 모임을 금지하면서 미국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일제히 문을 닫았다. 뉴욕에서 개봉 영화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사람으로서 한 달 동안 극장에 못 가게 되자 금단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 심정으로선 어떤 불쾌한 관객도 용서해줄 수 있을 듯하다. 앞에서 눈부신 휴대폰을 켜고 텍스트를 보내던 분, 옆에서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동행인에게 으스대며 영화 줄거리를 중계하던 분, 뒤에서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끝없이 내 의자를 발로 차던 어린 분, 어딘가에서 영화 대사가 마치 자장가인 양 잠에 빠져들어 코를 골던 분 등, 극장에 갈 때마다 인류애를 상실하게 만들던 관객들이 스쳐간다. ‘극장에 와서 이렇게 힘겹게 참아가며 영화를 봐야 하나’라며 극장 관람을 회의한 두 달 전의 나는 배가 불렀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30분 넘게 지겨운 광고를 반복해도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비싼 극장 팝콘에서 종이 씹는 맛이 나더라도 행복해할 수 있다. 이제는 모두 그리운 추억이다. 기대하던 영화의 개봉을 기다리고, 배우와 감독의 인터뷰를 읽고, 영화를 본 후 지인들과 호평이든 혹평이든 감상을 공유하던 모든 행위가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 시대의 노스탤지어가 되고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전 세계 영화 팬들이 함께 열광했던 2월 초 <기생충>의 기억도 어느덧 까마득하다.
극장이 문을 닫는 세상에선 영화로 설렐 일이 없다. 영화를 보여줄 극장이 없어지자 할리우드는 스트리밍 배급 실험에 나섰다. <트롤: 월드 투어>가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직행하자, 관객 없는 극장에서 일주일을 버티던 <온워드: 단 하루의 기적>, <인비저블맨> 등 화제작도 스트리밍 옵션으로 갈아탔다. 클릭만 하면 우리 집 소파에 앉아 거슬리는 어떤 타인도 없이 편하게 개봉작을 관람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장소에 각양각색의 몇백 명이 모여 한 영화를 보며 같이 울고 웃는 집단 경험의 기억은 생각보다 중독성이 있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영화의 첫 장면을 마주할 때의 그 설렘, 커다란 스크린과 웅장한 사운드가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공간감, 관객들이 다 함께 울고 웃을 때의 연대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의 만족감 혹은 허망함까지, 온전히 극장에서 한 편의 영화 보기를 완수해야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다. 휴대폰과 태블릿으로 편하게 영화를 접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영화인들과 영화 팬들에게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것이다. 7월에 신작 <테넷>을 공개할 예정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얼마 전 신문에 극장 영업 재개를 호소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영화 매체의 본질적 경험을 위해 지금까지도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 감독 입장에서 극장의 붕괴는 실존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우려와는 반대로 미국 최고 프랜차이즈 극장인 AMC는 부도 위기에 봉착한 상태다. 뉴욕의 유서 깊은 예술 영화관은 직원을 감축하고 상품권 구매를 권장하며 근근이 버티는 중이다.
한 해를 선도할 신인 감독 영화와 예술 영화를 선보이는 봄 시즌 영화제가 미뤄지면서 영화계 그늘은 더 짙어졌다. 프랑스 칸영화제가 잠정적으로 연기되고, 텍사스의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SXSW)는 취소되었다. 이 외에도 신인 감독의 반짝이는 결과물을 감상할 수 있는 중소 규모 영화제도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중이다. 4년 동안 도쿄 올림픽을 준비해온 사람들이 있듯이 몇 년간 열심히 영화를 준비하며 그 결과물이 관객과 만나는 순간을 고대해온 사람들이 있다. 그 모든 기회가 멈췄다. 극장이 사라진다면, 축제 기운에 취해 상영관을 돌아다니며 좋은 영화를 발견하는 영화제 경험도 앞으로 가능할까 의심스럽다. 더불어 웨스 앤더슨의 반가운 신작 <프렌치 디스패치>, 새로운 여성 히어로 마블 시리즈 <블랙 위도우>, 디즈니의 고전 <뮬란>, 예고편부터 성공을 거둔 <원더 우먼 1984> 등 할리우드 기대작도 날짜를 미루며 바이러스 재난에 대처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 극장이 몰락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 불허다.
감독과 배우를 만날 일이 없어진 미국의 영화 기자들은 넷플릭스에 숨어 있는 보석을 업데이트하고, 자가 격리 중 꼭 봐야 하는 고전 영화를 추천한다. 고퀄리티의 TV 드라마가 일상의 결핍을 채우고 시청자들이 SNS로 감상을 열심히 공유하지만 극장에서 영화를 보지 못하는 결핍을 채워주지 못한다. 영화에 빠져들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영화 관람의 문화가 너무도 당연하고 영원한 것이라 믿었다. 영특한 사람들이 구현해낸 2시간의 마법 같은 세계는 현실을 잃게 하거나 현실을 살아갈 영감을 주곤 했다. 누군가에게 영화는 산소호흡기이고, 다른 이에겐 한 달에 한 번은 맛봐야 하는 별식이다. 하지만 바이러스 재난의 한복판에서 한국 극장 관객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는 가운데, 극장은 전 세계적으로 기피하는 공간이 되고 있다. 마스크를 착용한 관객들이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한 자리 건너 앉아 영화를 보게 되더라도 극장이라는 플랫폼이 소생할 수 있기를 빈다. 한때 관객이었던 사람들이 이 결핍을 안타까워하고 극장을 지키려 한다면 우리는 영화 성전을 계속 지킬 수 있을지 모른다. 극장이 우리의 일상으로 어서 돌아오기를, 빌고 또 빌어본다.
- 에디터
- 조소현
- 글
- 홍수경(영화 칼럼니스트)
- 사진
- Krists Luhaer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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