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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건축계의 노벨상

2020.04.24

by 김나랑

    2020 건축계의 노벨상

    건축은 조각이 아니다. 건축은 공간으로 사람과 환경을 매개한다. 그래서 시각적 감상만으로 그것이 내포한 가치를 온전히 가늠하기 어렵다. 공간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건축적 가치를 판단하기 쉽지 않은 이유다. 2020년 프리츠커상 수상자로 아일랜드 건축가 이본 패럴(Yvonne Farrell, 1951~)과 셸리 맥나마라(Shelley McNamara, 1952~)가 선정되었다. 참고로 프리츠커상은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린다. 그만큼 최고 권위의 상이란 얘기다.

    2020 프리츠커 수상자는 아일랜드에서 활동해온 이본 패럴과 셸리 맥나마라다. 이들은 1978년부터 그래프턴 아키텍츠를 운영하고 있다.

    이본과 셸리의 건축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관계 만들기’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건축을 들여다보면 도시와 건축, 자연과 사람의 관계 맺기에 대한 고민이 보인다. 실제 이들은 건물이 들어설 문화적, 지형적 맥락을 해독하고 건축으로 지형을 더해간다. 다시 말해 조형미보다 맥락적 조응을 창출하는 데 더 집중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들의 건축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양한 사회적 교류를 유발할 공간 만들기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내부 이용자들 간이나 내외부인 간의 다양한 시각적, 공간적 교류를 가능케 하는 공간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는 얘기다. 이들의 건축을 보면 사람들 간의 다양한 교류를 촉진하고 거리에 그 풍경을 적극적으로 제공한다. 그럼으로써 건축은 공동체 의식(Sense of Community) 강화를 유도한다. 공동체 의식은 지속 가능한 사회 만들기와 개인의 행복 추구를 위한 필수 요소다. 이렇듯 이본과 셸리는 건축을 통한 사회적 가치 창출에 집중한다.

    그래프턴 아키텍츠가 설계한 어반 인스티튜트 오브 아일랜드(더블린, 2002).

    건축은 다양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어느 가치에 좀 더 집중하느냐는 건축가마다 다르다. 프리츠커상 수상자들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2004년 수상자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故 자하 하디드의 경우 틀을 깨는 비정형적 공간과 형태를 바탕으로 랜드마크를 만드는 데 집중했고 2009년 수상자인 페터 춤토르의 경우 물성과 공간으로 시학적 감성을 자아내는 데 집중했다. 반면에 2016년 수상자인 알레한드로 아라베나의 경우 건축적 아이디어를 통해 저소득 계층의 주거 문제 해결에 집중했다.

    2009년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페터 춤토르.

    프리츠커상 수상 소식은 매해 수상자들의 다양한 건축 철학만큼이나 다각적으로 건축을 이해할 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건축 문화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부는 여전히 일차원적으로 건축을 이해하는 듯하다. 심지어 건축을 ‘문화’가 아닌 ‘경쟁’ 프레임으로 오독하기도 한다.

    지난해 정부는 프리츠커상 수상 지원 전략을 발표했다. 국토교통부가 청년 건축가를 선발해 해외 유수의 설계 사무소에서 설계 기법을 배울 수 있게 연수비를 지원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여덟 명이나 수상자를 배출했는데 우리는 한 명도 없다는 이유였다. 건축설계를 손 기술 정도로 이해하는 건지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은 학원 근성과 엘리트주의가 작동한 까닭은 아닐까? 그래서 소수 정예가 단기간에 비법을 배워 목표를 선취할 수 있다는 발상으로 귀결된 게 아닐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문화는 학원 근성과 엘리트주의로 한순간에 쟁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상 수상이 정부의 정예 감독 육성 결과가 아니듯 말이다.

    그래프턴 아키텍츠는 유니버시타 루이지 보코니(밀라노, 2008)로 올해의 세계 건축상(World Building of the Year)을 수상했다.

    건축에 대한 척박한 인식은 비단 국토교통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규모 민간 자본과 지자체는 여전히 ‘훌륭한 건축 = 랜드마크’라는 강한 믿음 외에는 건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보인다. 그러다 보니 상품 차별화나 도시 경쟁력 확보를 앞세워 우월적 랜드마크 만들기에 집중한다. 다시 말해 건축을 문화로 보지 못하고 전략으로 보는 것이다.

    문화적 토양이 척박하면 프리츠커상 같은 꽃은 피기 어렵다. 설사 핀다 한들 화려한 꽃 한 송이로 척박한 건축 문화를 가려낼 수도 없다. 문화적 토양이 비옥해지면 꽃은 자연스레 핀다. 최근의 대중문화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K-팝의 세계화는 기획사의 체계적인 인큐베이팅 시스템이 자리 잡은 덕이며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상 수상은 오랜 시간 스크린 쿼터제로 한국 영화를 지지해준 결과다. 건축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 건축의 문화 산업적 성격을 이해하고 건축이 문화 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노력하다 보면 프리츠커상은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자. 이본과 셸리도 40년이 넘는 세월을 정진해 일흔이 다 된 나이에 프리츠커상을 받지 않았나. 꾸준히 걷고 또 걷자.

    그래프턴 아키텍츠의 내번 솔스티스 아트센터(내번, 2007).

    전상현(Space Matter 대표, 국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에디터
    김나랑
    사진
    GettyImage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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