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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전쟁

2020.05.15

by 이주현

    장미 전쟁

    자주적 인간, 성실한 관찰자, 리더. 샬로트 페리앙을 회상하며 출현한 방랑적인 향.

    1925년 파리 국립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한 22세 전도유망한 여성 디자이너는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그녀의 사촌이자 협업자 피에르 잔느레와 공동 설계한 아파트 모형을 선보였다. 1929년에 열린 미술 전람회 ‘살롱 도톤’에 출품한 이 모형은 중간 높이의 수납 가구로 공간을 분리했는데, 겹겹이 쌓인 여행 가방에서 영감을 얻었다. 한쪽에는 다이닝 룸과 거실을 겸한 공간이 있으며, 다른 쪽에는 쇠구슬을 달아 재설치가 용이한 침대가 붙어 있다. 작은 부엌에는 중앙 회전 블록을 구상해 필요에 따라 블록을 접거나 펼쳐 조리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무려 91년 전, 샬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이 일으킨 디자인 혁명은 한 세기를 지나 새로운 세기로 넘어가고 있다. 곧 홍콩과 일본에서 출시될 이케아의 전동 레일 기반 접이식 가구 ‘로그난(Rognan)’의 원리와 흡사하니 말이다.

    일본에서 오래 생활하고, 1920년부터 1946년까지 극동 지방에 체류하며 ‘다다미’에 매료되기 전에도 페리앙은 거주 공간의 간결함을 추구해왔다. 더 쉽고 단순한 생활을 위해서였다.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의 아트 디렉터 수잔 파제는 페리앙을 일컬어 “‘유용한 형태’라는 선구적 컨셉을 대중화한 선각자”라 정의한다. 또 그녀의 손이 닿는 모든 것은 살아 움직인다. “제 직업은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현재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삶의 형태를 창조하는 일입니다. 결국 자유로운 삶을 위한 것이죠.” 페리앙이 남긴 말이다. 잘 알려진 긴 의자 ‘셰즈 롱그(Chaise-Longue)’와 회전 의자 ‘포퇴이 피보텅(Fauteuil Pivotant)’에서 눈치챘듯 이 반항적 여인은 모든 규칙과 장벽을 파괴했다. 1929년 선보인 방의 원통형 샤워실은 파문을 일으켰다. 커플 간에 친밀감을 형성할 공간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제시한 대담하고 선구적인 작품은 한정된 공간에서 지속 가능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토지와 자원을 소비하는 요즘, 더 유효하다. “샬로트 페리앙은 20세기에 움직임을 이용하던 유일한 디자이너입니다.” <샬로트 페리앙, 완벽한 작품>을 저술한 그녀의 사위이자 영화감독 자크 바르삭의 전언이다. “샬로트의 손길을 거친 오브제는 정적이지 않아요. 살아 움직이고, 회전하고 미끄러지며,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죠.”

    80세까지 스키를 타며 산을 사랑했던 환경주의자 샬로트 페리앙은 자연 친화적 삶을 다짐한다. 1934년 노동자 가정을 위해 고안한 조립식 수상 건축물 ‘물가 위의 집(La Maison au Bord de l’Eau)’ 내부에는 통나무로 제작한 가구가 있으며 지붕엔 빗물을 담기 위해 구멍을 냈다. ‘레퓌주 토노(Refuge Tonneau)’는 유목 건축의 진수를 보여준다. 우주 로켓처럼 생긴 이 피난 가옥은 사람의 등에 지고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가장 무거운 부품의 중량이 40kg을 넘지 않으며 중앙 기둥과 벽면으로 이어지는 받침대로 이루어진 ‘우산’ 모양의 공간은 스키어 8인의 피난처다. 중앙 기둥에는 난방 시스템이 있고, 밤이 되면 가죽끈으로 연결된 침대를 펼 수 있다. 당시 열차 침대칸에 쓰던 것과 동일한 방법이다. 개수대에는 눈을 모을 수 있는 수집기가 있어 식수 공급이 가능하다. ‘메종 드 테 에페메르(Maison de Thé Ephémère)’는 페리앙의 말년 작 중 하나. 기초공사를 최소화한 이 건축물은 중앙 기둥 대신 아시아 고대 건축자재인 대나무 줄기에 혁신 소재로 만든 직물을 매달았다. 이처럼 시대 초월적 디자인으로 각광받는 페리앙의 유산은 그녀의 딸인 큐레이터 페르네트 페리앙과 사위 자크 바르삭이 운영하는 페리앙 재단을 통해 보존, 전승되고 있다.

    바로 그 샬로트 페리앙이 이솝에 무한 영감을 안겼다. 마라케시 인텐스, 테싯, 휠에 이은 이들의 네 번째 향수 ‘로즈 오 드 퍼퓸’ 제작 과정에 페리앙의 인생이 스며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페르네트 페리앙과 자크 바르삭이 장미를 사랑한 20세기 희대의 모더니스트 디자이너를, 이솝의 조향사 바나베 피용이 21세기형 유니섹스 향수를 말한다.

    Vogue 샬로트 페리앙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Pernette Perriand-Barsac & Jacques Barsac ‘끝없는 호기심을 가진 훌륭한 협력자’. 샬로트는 유기체, 생체 표현, 장인 정신에 대한 탐구를 통해 산업화 시대의 인간을 표현했다. 그녀에게 좋은 디자인은 곧 높은 접근 가능성이기에 고품질의 조립식, 모듈 구조에 그치지 않고 저렴한 대량생산 가구 제작에도 힘썼다. 또 샬로트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의 표출로 도시 거주자에게 위대한 자연경관이 펼쳐지는 알프스 산간 지역을 전파하는 동시에 시각적, 생태학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캠페인을 펼쳤다.

    이솝과 샬로트 페리앙. 둘 사이엔 어떤 공통점이 있나?

    자연과의 관계, 근본적이고 자연스러운 산물, 불필요한 것이나 세부적인 것이 아닌 본질에 기반한 미적 요구, 얼굴에 드리운 순수주의, 특정한 형태로 정립하는 관계.

    ‘로즈 오 드 퍼퓸’ 메인 캠페인 컷에 그녀의 의자 ‘517 Ombra Tokyo’가 등장한다.

    샬로트 페리앙이라는 역설적 디자인의 아이콘을 매우 간결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그녀는 늘 합리적인 가격의 자연 친화적 작품을 만들고, 동서양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의자 역시 일본에서의 삶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파리지엔 특유의 대담함 역시 돋보인다.

    장미에 대한 샬로트의 애정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샬로트의 아파트 창문과 발코니 어딘가에는 늘 장미가 존재했다. 자서전 <창조의 일생(Une Vie de Création)>을 집필할 무렵, 그녀는 항상 창문 앞에 큼직한 장미 덩굴을 놓아 한 해의 절반 이상을 장미와 함께 보냈다.

    그녀의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큰 전환점은 무엇이었나?

    샬로트는 20세기 내내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것에 도전했다. 아마도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까지 매 시기가 터닝 포인트로 작용했을 것이다.

    트렌치 코트에 진주 목걸이, 화사한 패턴의 원피스와 스카프 등 샬로트의 빛바랜 사진에서 패션을 향한 남다른 관심이 느껴진다. 패션계에 종사한 부모님의 영향이 크다. 평소 샬로트는 단순하고 실용적인 스포츠웨어를 즐겼다. 1996년 런던 왕립미술대학 박사 학위 수여식에선 심플한 디자인의 이세이 미야케 코트에 나이키를 매치했다.

    샬로트 페리앙이 이 향수를 처음 접했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반응을 예상하나?

    몹시 흡족해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질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요, 마음에 드나요?”

    Vogue 이솝에 향수는 어떤 의미인가?

    Barnabé Fillion 복잡 미묘한 브랜드 철학을 표현하는 매개체. 이번 ‘로즈 오 드 퍼퓸’은 이솝 최초의 플로럴 향수로 대중적 향료인 장미의 비정한 면모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해석이 돋보인다.

    ‘샬로트 페리앙’이라는 뮤즈의 등장이 새롭다.

    ‘로즈 오 드 퍼퓸’은 샬로트 페리앙의 다층적 삶에 관한 통찰과 이해에서 출발해 그녀의 삶과 일, 유산을 떠올리도록 디자인했다. 특유의 자신감과 명랑한 대담성으로 전진하는 그녀를 동경했기에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온실 속 만개한 꽃, 연약한 꽃잎의 생명 주기를 향으로 표현했고 ‘샬로트 페리앙 로즈’로 불리는 일본 장미 ‘와바라 가든 로즈’와 그녀가 함께 작업한 목수들의 작업장, 즐겨 오르던 알프스산맥의 쾌청함을 한 병에 녹였다.

    특히 눈여겨볼 향조가 있나?

    베티버. 샬로트의 대담한 성격을 반영하기 위해 그녀가 애용한 남성 코롱인 지방시 ‘베티버’를 살펴봤고, 이를 베이스 노트로 활용했다. 그런가 하면 장미와 쿠민, 클로브는 이솝의 디자인에 대한 역설적 접근에 부합한다. 이솝의 이런 철학은 기존 장미의 통념을 깨는 향기를 사용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시소 향은 알프스 등반과 등산에 대한 샬로트의 애정을 담고 있다. 정상에서 느껴질 법한 상쾌한 아로마 노트는 설원에 자리한 듯 감각적 터치를 선사한다.

    이솝만의 장미 향을 창조하기 위해 어떤 도전을 감행했나?

    시작은 장미 향이지만 미묘하게 가미된 시트러스 향, 스파이스와 우드가 균형을 잡아준다. 기술적 설명을 덧붙이면 강렬하면서도 미묘한 아로마를 창조하기 위해 CO₂ 추출법을, 앱솔루트(Absolute) 형태의 천연 향료를 통해 향의 깊이를 더했다. 시중에 장미 향수는 수백, 수천 개에 이른다. 관습과 통념을 뒤흔든 이솝식 장미 향수는 훨씬 개인적이고 독특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조향사이기 전에 사진가로 활동했는데, ‘로즈 오 드 퍼퓸’을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샬로트 페리앙 로즈는 베이지색이 구릿빛으로 바래기도, 회색빛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 오묘한 매력의 장미 향을 위한 촬영지는 높은 산 정상. 산맥의 앞뒷면을 희미한 베이지 그레이 톤으로 촬영, 장미가 시드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것이다.

    에디터
    이주현A
    Courtesy of
    Aesop, ACHP/ADAGP 2020
    Sponsored by
    Aes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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