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미가 말하는 정체성
선미의 정체성은 이 말로 함축된다. “아티스트라면 패션, 뷰티뿐 아니라 시대정신과 문화를 이끌어야죠.”
선미는 친동생과 <보그> 촬영장에 왔다. 사진을 전공한 동생 이승동은 지난해 선미의 해외 투어부터 전담 사진가로 활약 중이다. 오늘도 당이 떨어질까 봐 가방에 젤리며 초콜릿을 싸온 선미, 몸을 옥죄지 않는 드리스 반 노튼의 H라인 원피스로 갈아입고 퇴근을 준비하는 선미 등 화보에 등장하지 않은 일상을 촬영했다. “렌즈를 사진가의 눈으로 여겨요. 눈으로 서로 감정을 교류할 때 좋은 사진이 나오죠. 하지만 동생의 렌즈는 조금 달라요. 그 앞에선 아티스트 선미가 아니라 ‘찐 누나’ 선미가 돼요. 해외 투어 때 일부러 한 방을 썼어요. ‘세팅된’ 모습이 아닌 진짜를 동생이 담아주리라 믿었거든요. 잊고 있던 나를 발견하길 원했나 봐요.” 선미는 동생의 대학 생활을 지켜보면서 그의 열정을 지지해주기로 했다. “장비 가격도 만만치 않아서 그 돈을 다 갚으려면 열심히 촬영하라고 했죠(웃음). 언젠가는 동생의 렌즈에 아티스트 선미로 서게 될 날이 오겠죠?”
선미는 2007년 열여섯 살에 원더걸스로 데뷔하기 전부터 동생들을 돌봤다. 두 남동생과 두 살, 네 살 터울이지만 선미는 엄마 같은 누이였다. 이제 자신보다 훌쩍 커버린 남동생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고, 선미는 화보를 위해 마련된 주얼리만큼 눈을 반짝이며 웃는다. 흐를까 봐 참은 눈물이 눈동자를 윤나게 했을지도 모른다. 음악 외에 다른 무대에선 얼어버리고 마는 선미가 <찐세계>라는 웹 예능을 시작한 이유도 동생들이 함께해서다. 남매가 덕후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으로 팬들은 알고 있지만, 대중은 익숙하지 않은 엉뚱하고 허술한 선미와 마주할 수 있다. “예능에선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인데 동생들과 하니까 편해요. 무대에 선 모습 때문에 강하고 깍쟁이일 거라는 오해를 받는데, 실제 선미를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아요.”
선미는 데뷔 이후 처음으로 SBS 파일럿 프로그램 <선미네 비디오가게>라는 토크쇼도 진행한다. 첫 번째 게스트는 코미디언 박미선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운동신경이 떨어진다”는 차별 발언을 서슴지 않던 시대부터 33년간 여성 방송인으로 살아온 박미선에게 데뷔 14년 차, 여성 솔로 아티스트로는 8년 차를 맞이한 선미는 궁금한 게 많다. “제 고민을 이미 겪으신 분이니 말씀마다 와닿았죠. 솔직히 저는 구설수에 휘말린 적도 별로 없고 스캔들이 난 적 없어요. 연예인이라면 가십거리가 있어야 하지 않나, 너무 무던하게 지내진 않나 걱정했거든요. ‘임팩트’ 있게 사람들에게 각인돼야 좋은지, ‘업다운’ 없이 무던하게 오래가는 편이 좋은지 헷갈렸어요. 미선 선배님과 방송하고 나서 결심했어요. 해온 대로 성실히 살아가려고요. 그게 미선 선배님이 지금도 우뚝 서 계신 이유라고 생각해요.”
2000년대생이 활동하는 아이돌계에서 1992년생 선미도 종종 상담 요청을 받는다. 이들의 SOS 요청 방식은 의외로 손 편지가 많다. 개인 휴대전화를 소지하지 못하는 아이돌이 많아서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꾹꾹 눌러쓴 글씨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어떤 방향으로 나가면 좋을지, 이런 상황에서 선배는 어떻게 이겨냈는지 등의 물음을 읽으며 선미는 힘들던 기억을 소환한다. “어떤 마음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안쓰러워요. 그만큼 가진 답을 다 주고 싶어요. 후배들이 제 말을 듣고 힘을 얻거나 방향을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오면 뿌듯해요. 솔직히 제가 친화력은 좋지만 친구가 많이 없어요. 하지만 후배들에겐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언니로 가깝게 있고 싶어요.”
선미가 후배들뿐 아니라 어린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걱정도 벼락치기”다. 올해 가장 잘한 일은 코로나19를 위해 싸우는 의료진에게 1,000만원을 기부한 것과 이 ‘표어’를 생각해낸 것이다. “시험 전날에 벼락치기 하듯 걱정도 닥치면 하자는 의미죠. 후배들을 보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면서 정신이 피폐해지곤 해요. 돌아오지 못할 소중한 시간을 무거운 감정으로 망치죠. 의식적으로라도 밝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사실 선미는 5년 전까지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수년간 천천히 극복해왔어요. 지금은 약도 줄였고 감사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지내기에 행복해요. 후배들도 힘들겠지만 조금씩 노력하면 좋겠어요.” 선미는 오래도록 무대에 서길 원한다. 이를 위해선 정신 수련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언젠가 박진영 PD님께 데뷔 14년 차라고 말씀드렸더니 10년 더 하라고 하셨어요. 나이 들어서도 함께 무대에 서자고요. 그러려면 건강한 정신을 가져야 해요. 정신이 흔들리면 몸도 아프거든요.”
선미는 5년째 밤마다 기도한다. 종교는 없지만 기도를 통해 마음을 다잡는다.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오늘 하루 사랑하는 부모님과 동생들이 무탈하고, 무거운 감정에 압도되지 않고 조금이나마 밝은 기운으로 보냈음에 감사한다. 그날 투정한 말을 바로잡고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답을 부탁한다. “매일 기도해서인지 신기하게도 소망대로 잘 지내고 있어요. 마음도 긍정적으로 바뀌었어요. 우울한 일이 생기면 좋은 일이 올 차례라고 믿죠. 사람은 저마다 주어진 운명의 선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스케치에 얼마나 아름답게 색칠하느냐는 제게 달렸죠.”
선미는 6월 말 새로운 앨범으로 컴백한다. 카카오톡으로 관련 파워포인트 파일을 받았다. 제목은 ‘보라빛 밤’. 보랏빛 이미지로 가득했다. 선미는 앨범마다 PPT를 만들어 자신이 하고 싶은 컨셉,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정리한다. “저의 느낌이나 아이디어를 명확히 설명해야 스태프들과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으니까요.” ‘보라빛 밤’은 더운 여름밤 카페에 앉아 있던 순간에서 출발했다.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고 하늘에 보랏빛이 맴도는 날이었어요. 낮에 달궈진 땀을 식혀주면서 여전히 몸은 따뜻하고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 저뿐 아니라 많은 분이 공감하시는 설렘일 거예요. 드라이브하거나 한강에 앉아서 들으면 어울릴 노래죠. 무엇보다 제 곡에선 드물게 예쁘게 사랑해요(웃음).”
그러고 보면 선미의 노래 가사는 냉소적인 어투가 있다. 현대인의 고충이나 사회의 아이러니를 다뤄왔기 때문이다. ‘블랙 펄’은 가면 우울증을 다뤘고, ‘누아르’는 좋아요(Like)를 받기 위해 위험한 곳에서 셀카를 찍다 목숨을 잃은 뉴스에서 영감을 받았다. 선미가 사회에 관심이 많은 이유는 대중음악을 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어떤 생각을 갖는지, 어떻게 아픈지 알아야 그들이 공감하는 음악을 만들죠. 갈수록 제 음악을 소비하는 연령대가 어려지니까 특히 새로운 세대의 문화에 관심을 가지려고 해요.”
지금 선미는 멀티 페르소나가 궁금하다. “‘누아르’를 만들 때 SNS의 폐해를 공부했어요. 그때 사람들이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SNS 종류마다 다른 자아로 접근한다는 걸 알았죠. 정신과 상담의가 요즘 어떠냐고 물어보면 ‘본캐요? 부캐요?’라고 되묻는다고 해요. 제 세대의 문화와 달라 처음엔 놀랐어요. 2020년 키워드를 검색하니 ‘멀티 페르소나’더라고요. 내가 생각한 것이 올해의 키워드구나 또 한 번 놀랐죠.” 선미라는 아티스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티스트는 트렌드를 선도해야죠. 패션, 뷰티뿐 아니라 시대정신이나 문화도 이끌어야 해요.” 이렇게 멋진 말을 하고선 동생과 손을 잡고 나간다. 선미가 멀티 페르소나라면 그중 ‘찐 누나’가 세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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