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형,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이규형의 과거를 추적하는 일은 숨이 차다. 슬퍼할 겨를 없이 달렸다.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런 표현을 기사에 쓰면, 여러분이 보기 전에 편집장이 날려버렸을 거다. 퇴직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사용하자면, 서른다섯에 <비밀의 숲>(2017)에 출연한 배우 이규형이 그랬다. 그가 맡은 서부지검 사건과 과장 윤세원은 네이버 등장인물 소개에 스무 번째지만, 반전의 핵심이었다. (드라마를 종영한 지 3년이니 이 정도 스포일러는 허용하길.) 치밀한 시나리오 덕도 있지만, 포마드 머리의 단정한 과장님이 얼마나 포커페이스를 잘했는지 결말에 배신감마저 들었다. 뮤지컬에 익숙하지 않은 시청자는 연기 잘하는 이 배우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했다. 나 역시 공연계에서 활동하다 드라마로 넘어왔거니 짐작했을 뿐이다. 맞기도, 틀리기도 하다. 넘어왔다고 하기엔 한 해도 쉬지 않고 공연 무대에 오르고 있으니까.
이규형은 <비밀의 숲> 이후 흥행작에 연이어 출연했다. <슬기로운 감빵생활>(2017~2018)에선 약에 절어 해롱대는 재벌 2세, <라이프>(2018)에선 휠체어에 앉아 괜찮은 척 웃는 건강보험심사평가위원회 심사위원. 지난 4월 종영한 <하이바이, 마마!>에서는 죽은 아내(김태희)가 살아 돌아와 인생이 흔들리는 남편으로 주연이 되었다. 영화 <증인>(2019)에선 변호사(정우성)를 돕는 정직한 검사였다.
<비밀의 숲> 이전 삶이 궁금해 대화는 자꾸 과거로 흘렀다. 이규형도 요즘 가족사를 비롯한 자기 과거를 좇고 있기에 그리 어긋나지 않는 대화였다. 대화를 마치고 노트에 세 문장을 적었다. ‘계속 문을 두드리는 사람’, ‘뿌리를 찾는 사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
그는 초등학교 때 연극반에 들었다. “길을 굉장히 빨리 정했죠.” 고등학생으로 연극제에 참가하고, 교회 무대에도 꾸준히 올랐다. “아마추어의 연기에도 마음을 움직여주는 관객을 보며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사람들을 울고 웃게 하고 싶었죠. 무대는 카메라가 낼 수 없는 호흡이 있기에 놓지 못할 거예요.” 언급했듯 그는 대학생 때부터 무대를 거른 해가 없다. 스물세 살 군 복무 중에도 무대에 올랐다. 군 연극단원으로 노인 복지 회관을 돌면서 트로트를 부르고 봄이면 문화센터에서 아동극을 했다.“ 군 연극단에 잘하는 배우가 넘쳐 오디션이 치열했어요. 운 좋게 거의 매일 공연을 했죠. 지금 트로트가 엄청 인기라죠? 그때도 트로트를 부르면 반응이 가장 좋았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이규형은 동국대학교 연극과에 입학했다. 많은 배우들이 인생의 은사로 꼽는 故 안민수 교수의 <연극연출>을 닳도록 들고 다녔다. 그 당시 안민수 교수는 대학원 수업을 진행했기에 학부생 이규형이 직접 사사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원하면 두드리는 타입. 직접 교수를 찾아가 청강을 허락받았다. 다른 학교에도 들렀다. 한양대학교 최형인 교수의 저서 <백세개의 모노로그>에 감명받아 청강을 부탁했고, 1학년이 듣는 기초연기수업 과목에서 타 학교 고학생 이규형은 발표까지 했다. “제가 목표로 삼는 길이라면 적극적입니다.” 사실 이규형은 다른 대학에 진학했다가 최민식, 한석규를 존경하는 마음에 그들의 모교인 동국대학교 연극과에 재입학했다. “말리시는 부모님께 한 번만 믿어달라고 빌었죠.” 학교에서 만날 수 없는 선배들은 소속사를 찾아갔다. 말리는 매니저를 뒤로하고 돌아서다 우연히 선배를 만나 책에 사인도 받았다. 그는 동국대와 자매결연을 맺은 러시아 학교로 연기 유학을 가려다 대학로에 입성하며 포기했다. 코로나19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해외 진출을 위해 <하이바이, 마마!>를 끝내고 언어 유학을 갔을 거다.
보통 배우를 만나면 열에 아홉은 자신이 내향적이라고 한다. 순수하게 외향, 내향형 인간을 구분할 수 없지만, 눈도 못 마주쳐 어깨를 보고 답하는 배우도 있다. <콰이어트>의 저자 수잔 케인이 “내향적인 사람이 고독한 내면에서 사색할 때 역량과 창의성이 최대로 발휘된다”고 했듯이 이런 성격이 도리어 적극적으로 타인의 삶을 표현하는 배우란 직업에 유용할 수도 있지 싶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고 꿈을 위해서 무던히 움직인 진격의 배우를 만나니 반가웠다. 언제부턴가 내면으로만 파고들지 실제 걸음을 내딛는 사람이 귀해졌으니까.
“돈은 없고 남는 것은 시간이었어요.” 이규형은 웃으며 말했지만 한가하다고 4~5시간씩 자며 프로필을 돌리진 않는다. 영화사, 대학로 소극장, 국립극장 등 연기할 수 있는 모든 자리에 지원했다. “거짓말 안 하고 수백 번 떨어졌을 겁니다.” 공연계는 아는 사람끼리, 같은 극단끼리 정보를 공유하고 역할을 주는 경우가 있었다. 다행히 뮤지컬은 공개 오디션이 많았고, 이규형은 이탈리아 성악 교육 박사과정을 수료한 이모에게 노래를 배우러 다녔다. “동료 조성윤과 함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연습하러 갔어요. 덕분에 뮤지컬 <빨래>에 캐스팅됐어요. 몽골에서 한국으로 온 이주 노동자 솔롱고 역이었어요. 오디션에서 베테랑 배우가 많아 위축됐는데 이런저런 연구를 해간 정성을 봐주신 것 같아요.” <빨래> 팀에 투입돼 연습하던 2009년에는 신종 플루가 덮쳐 지방 공연까지 취소됐다. 이규형은 다시 학교로 돌아와 공부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언제 오를지 모를 공연에 대비했다. 되는 일이 없던 시기를 한탄한 적 있느냐고 물었다. “그럴 땐 자가 트레이닝을 했죠.” 몇 달을 준비하며 기다린 덕에 11월, 첫 무대에 올랐다.
현재 코로나19로 이규형은 뮤지컬 <팬레터>의 출연을 미루고 있다. 1월 1일 마지막 공연을 하고, 지금쯤 다시 무대에 올랐어야 했다. 촬영을 마친 두 편의 영화 <스텔라>와 <디바> 역시 개봉 미정이다. “영화 보려면 자동차극장에 가고, 공연도 보고 싶은데 타인에게 피해를 줄까 봐 참아요. 다들 그렇듯 넷플릭스만 보고 있군요.” 그는 넷플릭스 같은 OTT에 긍정적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인간수업>(2020)을 보며 영화 <트레인스포팅>(1996)이 떠올랐어요. 그처럼 파격적인 소재는 지상파에서 불가능했겠죠. (<인간수업>은 돈을 벌기 위해 성매매하는 고등학생 등 현실에 내몰린 10대를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영화관의 고유성도 존중받고, 반대편이라 할 수 있는 OTT도 팽창하면 작품 파급효과가 더 커지지 않을까요.” 이규형은 웹툰 원작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을 준비 중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고등학교에 고립된 이들을 구하려는 자들의 극한 상황을 다뤘다. 영화 <완벽한 타인>(2018)의 이재규 감독이 연출한다. 이규형이 영화 <증인>으로 베니스에 갔을 때 우연히 이재규 감독을 만났다. 그전까지 고개 인사만 나눴는데 자연스럽게 베니스를 함께 여행하게 된 것이다. “낯선 곳에서 만나니 금방 친해졌어요. 그때만 해도 작품을 함께 할 줄 몰랐는데, 인연이 신기해요.”
노트에 ‘이규형은 뿌리를 찾는 사람’이라고 썼듯, 요즘 그의 취미는 가족사 듣기다. “제가 어디서 왔는지, 유래 혹은 기원이 궁금해요.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뵙고 이야기를 듣죠. 고등학교 선배기도 한 친할아버지께서 하셨던 학생운동, 고모께서 온천 근처에서 밥집을 운영하다 청와대 주방장으로 섭외된 얘기, 그 온천으로 소풍 온 유치원 선생님이셨던 어머니에게 반한 아버지, 노래를 부르고 영화를 공부했던 친척 등 한 가족에 이렇게 많은 얘기가 얽혀 있다니 놀랍죠.”
이규형은 외할아버지 故 안수길 선생이 쓴 장편소설 <북간도>를 읽을 예정이다. 1967년 발간된 <북간도>는 북간도에 이주한 일가가 조선 후기부터 8·15 광복까지 겪어낸 수난을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은 한국인이 주체성을 잃지 않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문학으로 인정받아 40여 년이 지난 2004년에 재출간됐다. 실제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간도로 이주하고 월남한, 살던 땅을 여러 차례 떠나야 했던 안수길 선생의 이력이 작품에 녹아 있다. “외할머니께 듣는 외할아버지 일대기는 경이로워요. 우리 모두가 하나의 역사이고 현대사임을 보여주죠. 외할머니도 계속 글을 쓰세요. 곧 책으로 엮어서 선물해드리고 싶어요.”
이규형은 영화로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우리 현대사이기도 한 제 뿌리를 정리하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꾸준히 기록하고 있어요. 과거와 현대 이야기가 조화를 이루면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아요. 물론 시나리오와 제작 공부를 꾸준히 해야겠지만요. 무엇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게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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