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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만 산다: 요즘 물건의 수명

2023.02.12

한 달만 산다: 요즘 물건의 수명

Photo by Ronan Furuta on Unsplash

지난겨울 한국에 갔을 때 소형 전자 제품을 몇 개 샀다. 휴대용 구강 세정기, 실리콘 전동 클렌저, 보조 배터리, 스킨케어 마스크 등. 소형 가전 천국 대한민국의 여행 기념품이라면 역시 ‘이런 것까지?’ 싶은 분야에서 인간의 일을 거들어주는 작은 기계들 아니겠나.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휴대용 구강 세정기는 치실과 치간 칫솔 때문에 늘 염증투성이던 잇몸을 회복시켜주었고, 실리콘 전동 클렌저는 갓 삶은 달걀처럼 매끈한 피부를 선사해주었다. 단돈 몇만 원에 이런 기쁨이라니, 세상 참 좋아졌다고 콧노래를 불렀다. 너무 감격한 나머지 쇼핑몰에 한 달 사용 후기도 남겼다. 이건 사야 해요, 정말 좋은 물건이에요, 더 비싼 것도 필요 없어요, 바로 이 물건이 당신이 찾던 그것이에요. 그리고 정확히 두 달째에 그 물건들은 고장이 났다. 보조 배터리는 성능이 절반으로 줄었고 구강 세정기는 내부 물길이 막혔고 전동 클렌저는 충전이 되다 말다 한다. 이미 기간이 지나 리뷰를 수정할 수도 없었다. 누군가는 지금도 내가 남긴 후기를 보고 결제 버튼을 누르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내 집엔 플라스틱 쓰레기만 한 아름 늘었다.

과거에도 쓸모없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물건은 많았다. 홈쇼핑을 틀면 항상 나오는 이른바 ‘아이디어 상품’을 떠올려보자. 내 평생 목격한 가장 더러운 집의 주인은 아이러니하게도 홈쇼핑 청소용품 수집이 취미였는데 항상 ‘저 물건만 있으면 나도 청소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아’라는 기분으로 물품을 구매한다고 했다. 홈쇼핑 운동기구도 비슷한 영역으로, ‘저것만 있으면 나도 건강하게 살을 뺄 수 있을 것 같아’라는 기분으로 매 시즌 유행 상품을 사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청소용품이나 운동기구 같은 간단한 기계 장치는 고장 나서 버릴 일은 별로 없다. 인간이 게을러서 못 쓸 뿐이다. 하지만 충전식 배터리나 첨단 디스플레이가 들어간 제품은 다르다. 배터리 수명이 2년을 넘기면 <장수만세> 같은 프로그램에 내보내야 할 지경이다. 그런데도 어지간한 전자 기기는 무선 충전, 블루투스, 일체형 배터리가 필수가 되었고, 소비자들은 곧 쓰레기가 될 제품에 끝없이 돈을 쏟아붓는다. ’세상에 이런 것도 나오다니, 기술 좋아졌구나’ 싶은 제품이 막상 써보면 지하철역이나 동묘 좌판에 널린 장난감 수준이라 ‘좋아진 건 디자인과 마케팅 기술뿐’ 싶은 순간도 많다. 홈쇼핑 운동기구를 시큰둥하게 본 지 15년쯤 된 나도 새로운 섹터의 디지털 디바이스가 나오면 번번이 혹하곤 했는데, 그것도 다 부질없다는 깨달음을 요즘에야 얻고 있다.

Photo by euralíz bravo on Unsplash

스마트폰 제조사가 일부러 제품 수명을 짧게 만들거나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를 중단하는 식으로 제품 교체를 유도한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혹여 그 전에 어딘가 고장 나서 부품을 구해 고치려면 수리비가 새 제품 가격보다 비싸기 일쑤다. ‘사고 – 버리고 – 또 산다’는 게 당연한 소비 패턴으로 정착하자 긴 수명과 튼튼함은 더 이상 물건의 미덕이 아닌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리하여 패션 피플이 ‘메이드 인 차이나’는 진짜 럭셔리가 아니라며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봉제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나는 선풍기 한 대를 40년 동안 쓰던 시절의 향수에 빠져 있다. 정확히는 그 시절 물건이 아니라 소비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향수다. 나는 고장 난 구강 세정기와 전동 클렌저와 보조 배터리를 버리지 않고 있다. 그것들을 볼 때마다 불과 2년도 못 쓸 플라스틱 덩어리를 파는 행위, 제조 기술보다 빨리 발전하는 상술에 분노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게 없으면 내가 당장 죽는 것도 아닌데, 실은 오래 못 갈 물건인 걸 뻔히 알면서, 순진한 척 저 쓸모없는 것들을 사들인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반성하는 차원에서 곁에 두고 보는 중이다. 사실 여전히 안 믿기기도 한다. 어느 날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정말? 진짜로 벌써? 그렇게 허망하게?’라는 생각이 들어서 괜히 보조 배터리를 다시 충전해본다거나, 더 이상 진동하지 않는 전동 클렌저의 실리콘 부분으로 거품을 내어 세안을 한다거나, 구강 세정기에 뜨거운 물을 흘려 넣어본다. 내가 환경에 아주 나쁜 짓을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이숙명(칼럼니스트)
에디터
조소현
사진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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