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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자궁 널 미워해

2023.02.20

미안해, 자궁 널 미워해

나는 나를 사랑한다. 상한 아보카도 같은 몸매나마 내 몸도 사랑하며 여자로서의 삶도 긍정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여자 만세!’, ‘나는 나를 사랑한다!’, ‘여자의 몸은 잘못이 없다!’ 부르짖고 유행하는 말로다가 ‘임파워링’인가 뭔가를 해봐도 여자가 어떻게 생리까지 사랑하겠나, 그냥 자길 사랑하는 거지. 솔직히 지난 30년간 나의 인생은 ‘자궁과의 투쟁’이라 요약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내가 ‘완경’ 전에 사망하여 땅에 묻힌다면 내 묘비명은 ‘말썽쟁이 자궁 놈아, 이제 안녕이다!’쯤 될 것이다. 내가 행복하거나 도전 정신에 불타오르려 할 때, 성취감에 환호할 때도 자궁이란 녀석은 불쑥 존재감을 드러내며 이렇게 속삭이곤 한다. “자기야, 나를 잊어버린 건 아니지? 나는 오늘 네 침대를 반드시 피바다로 만들 거야.”

지난해는 특히 심했다. 어느 아침, 나는 찬란한 이국의 햇살 아래 눈을 떴다. 마당에는 알록달록 꽃이 만발했고 그날따라 마감도 없었다. “굿 모닝, 마이 슬리피 헤드.” 애인은 다정하게 웃으며 따뜻한 커피를 내밀었다. 그 영화 같은 순간, 나는 왈칵 분노가 치밀어서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저 구석에 있는 쓰레기 당장 치우지 못해?” 천둥벌거숭이 같은 서양 젊은이들과 어울리면서 본의 아니게 ‘성숙하고 초연하고 사색적인 신비의 동양인’ 캐릭터를 담당하던 내가 처음으로 감정을 폭발시킨 순간이었다. 암흑의 에너지파를 직격으로 맞은 애인은 충격에 휩싸여 눈이 휘둥그레졌고, 나는 미안하긴 했지만 몇 달째 내 집 테라스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빈 맥주 상자가 꼴 보기 싫어 죽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나는 침대에 돌아가 이불을 덮어쓰고 비관에 휩싸였다. ‘저 망할 놈의 맥주 상자, 알아서 처리하겠다더니 좋게 말해선 도통 들어 먹지 않는 게으른 애인 놈, 이 쓰레기장 같은 집 구석, 다 미워, 다 싫어, 아 지긋지긋해, 이 따위 인생…’ 하지만 마냥 침대에 드러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질 속에 처박혀 있던 생리컵이 질질 새기 시작한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침대보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조심히 몸을 일으킨 뒤 엉거주춤 걸어서 화장실에 갔고, 진한 피비린내를 맡으면서 생리컵을 갈고 샤워를 하는 동안 사냥꾼의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 작은 산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비관할 일은 끝이 없었다. ‘아니, 이 생리컵이 짐승 용량이라며? 왜 나는 2시간도 못 돼서 차버리는 건데? 딴 여자들은 하루 종일도 쓴다며? 이 사기꾼들아, 그냥 날 죽여줘!’ 그로부터 12시간이 지나 호르몬 폭풍이 잦아들자 나는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평생 생리 불순, 생리 과다, 생리통을 달고 살았다. 10여 년 전에 자궁근종과 자궁내막종 수술도 한 번 했다. 하지만 생리 증후군이 정신 상태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았다. 그저 만사가 귀찮고 무기력한 정도였다. 내 심리가 몸만큼 예민하지 않은 것에 나는 늘 감사했다. 그러나 다음 달 또 한 번 스스로도 이해 못할 일을 저지르고 나서는 나의 생리 증후군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도 나는 심각한 빈혈 때문에 하루 종일 유체 이탈 상태였다가 콸콸 쏟아지는 생리혈을 실리콘 컵으로 틀어막고 간신히 영혼을 수습한 다음 자객처럼 시커먼 옷을 입고 외식을 하러 나갔다. 하지만 친구들은 모두 술에 취해 신나게 떠들어대는 중이라 뒤늦게 나타난 내게 의자를 내줄 정신이 없었다. 애인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나는 다른 자리에서 스스로 의자를 가져다 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따라 그게 너무 서러웠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도 않고, 누구한테 부탁하기도 너무 귀찮았다. 나는 잠시 가만히 서서 시끌벅적 떠드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지켜보다가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뒤늦게 따라온 애인은 영문도 모르는 채 나를 달래기 위해 애를 썼고, 이제 그만 내 방 침대에 누워 조금이라도 편하게 피를 흘리고 싶어 하는 나를 굳이 끌어내 다른 식당으로 데려갔다. 다시 집을 나서기 위해 그날의 다섯 번째 샤워를 했다. 몸에서 물비린내가 났다. 식당에선 왜 기분이 좋지 않은지 집요하게 묻는 그에게 “괜찮으니까 그만 물으라”고 뚱하게 대답하길 몇 번, 마침내 나는 질질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나한테 의자를 권하지 않았잖아. 예의 없어. 흑흑.” 잠시 후 내 울음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자 ‘닥치고 사과’ 모드이던 애인은 분위기를 전환한답시고 “오늘 자기 감정이 풍부하네”라는 농담을 했고, 나는 다시 나라 잃은 사람처럼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하라면서? 막상 솔직하면 감정적이라고 하는데 누가 솔직하게 말을 해.” 그는 착잡한 얼굴로 말없이 내 손을 잡았고,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오늘은 내가 모든 일을 서러워하기로 한 날이란 사실을 드디어 눈치챈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평소에 나는 예민한 사람이 아니다. 이 모든 일에 그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다음 날 나는 한결 가벼운 몸으로 아침을 맞았다. 2시간마다 생리컵을 갈기 위해 억지로 깨는 대신 면 생리대를 차고 잤더니 그나마 수면 시간이 길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애인에게 어제 일을 사과했다. “곤란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한 달에 세 번씩 생리를 하면 인간이 정상일 수가 없다고.”

그즈음 나는 한 달에 두세 번씩 생리를 했다. 정상 생리가 끝나고 닷새나 일주일 뒤 생리보다 점성이 낮고 색이 탁한 출혈이 있곤 했다. 부정 출혈이라기엔 양이나 기간이 정상 생리처럼 많고 길었다. 자궁 폴립이 생긴 탓이었다. 그게 끝나면 또 닷새쯤 지나 정상 생리 같은 출혈이 있었다. 나는 반쯤 미쳐가고 있었다. 늘 피와 잠이 부족했다. 옛날 서양 소설 속 우울질 여성들처럼 생기 없이 나른하게 침대에 누워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걸핏하면 피가 쏟아지니 여행이나 운동도 번거로웠다. 일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자주, 호르몬의 포로가 되는 기분을 느꼈다. 저항할 수 없는 감정의 폭풍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하지만 외국이라 병원에 가기도 여의치 않았다. 그 전에 한국에 갔을 때 산부인과 의사로부터 자궁근종이 재발했다는 진단을 받았다. 다발성이었고, 가장 큰 것이 10cm 정도였다. 딱딱한 야구공 같은 것이 툭 튀어나온 아랫배를 볼 때마다 영화 <에일리언>에서 외계인을 임신한 리플리가 연상되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증상은 심하지 않았다. 의사는 “이제 나이가 있으니 폐경 때까지 기다려보자. 어차피 폐경 때가 되면 근종은 크기가 줄어드니까 굳이 수술은 안 해도 된다”고 했다. 나 역시 예전 수술 후 회복이 힘들었던 터라 재수술은 원하지 않았다. 원래도 조기 폐경이 소망이던 나는 더욱 간절히 그것을 빌었다. 하지만 그 꿈은 실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자궁근종에 폴립까지 더해져 증상만 심해졌다. 자궁이 내 몸과 정신을 지배하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수술을 결심했을 때, 나는 내심 의사가 자궁 적출을 권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면 못 이긴 척 이 말썽꾼을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안하네 친구, 나는 최선을 다했다네. 하지만 내가 결혼과 출산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의사들은 적출은커녕 개복조차 고려하지 않았다. 어느 병원에서는 자궁 근종이 아니라 육종일 가능성도 있다며 MRI를 찍게 했다. 단일공 복강경으로 수술하고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초조한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자궁이라는 장기가 내 인생에 미친 영향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피 묻은 흰 바지를 입고 명동 한복판을 걷는 것처럼 축축하고 비릿하고 수치스럽고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왜 하필 여자로 태어나서’라는 대상 없는 원망이 불쑥 치밀기도 했다.

내가 어릴 때는 초경을 시작한 딸에게 부모가 “드디어 너도 여자가 되었다”며 축하해주는 게 여자아이의 정서를 보호하는 방법처럼 구전되곤 했다. ‘너도 드디어 X 같은 인생의 수렁으로 떨어졌구나, 앞으로 40년 중에 2,400일은 거시기가 부르트도록 축축한 패드를 달고서 어기적어기적 걸으면서 내 엉덩이를 누가 쳐다보지는 않을까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겠지만 어쩌겠냐. 그런 날에 네가 기분이 X 같아서 살인, 폭행, 절도 같은 걸 저지른대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법은 그렇게 너그럽지 못하니까 조심하려무나’라고 당부하는 것보다야 낫다. 하지만 생리를 낭만화하려는 시도는 모성애 신화와 맞물려 여자들 자신조차 자궁을 어려워하는 결과를 낳았다. 10년 전 내가 처음 자궁근종 수술을 받을 때만 해도 정보도 적었고, 기술도 지금보단 떨어졌고, 무엇보다 자궁에 손을 대는 걸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당시 의사로부터 수술 후 재발 방지를 위해 삽입형 피임 기구 시술을 권유받았다. 친구들은 열이면 열 ‘결혼도 안 했는데’ 혹은 ‘심각한 질병도 아닌데 인공적인 방법으로 몸을 통제하려는 서양 의학에 대한 불신’, ‘자궁에 뭔가를 집어넣는다는 것의 불쾌함’을 이유로 만류했고, 나 역시 막연한 두려움이 들어서 시술을 거부하고 한의원으로 갔다. 요즘 20대들이 치료 목적이 아니라 ‘생리 중단을 위해’ 피임 기구를 시술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건 그로부터 몇 년 후였다. 나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아, 생리는 참고 견뎌야 하는 여자의 천형 같은 게 아니구나.’ 주변에 부작용 사례가 많아 나는 아직 용기를 못 내고 있지만 생리를 자의로 중단한다는 아이디어에는 큰 매력을 느낀다.

두 번째 수술을 하면서 정보를 찾기 위해 들락거린 자궁근종 카페에서 목격한 분위기는 더욱 흥미로웠다. 물론 자궁을 여성성과 연결 짓는 사고방식은 여전히 엿보인다. 결혼하기로 한 남자가 있었는데 자궁 적출 후 멀어졌다거나, 자궁이 건강하지 못하니 여자로서 자존감이 떨어진다거나, 임신할 생각도 없었지만 자궁 질환 때문에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쉽다거나 하는 내용이 간간이 올라온다. 하지만 회원 대부분은 자궁에 특별한 감정을 품기보다 기능적이고 담담한 시선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자궁이란 것도 결국 불편하면 고치고, 아프면 치료하고, 건강을 위협하면 제거할 수도 있는 장기인 것이다.

그즈음 만난 50대 선배는 자신의 자궁 적출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그가 선택을 망설일 때 의사가 그랬다고. “70대 여성의 자궁을 보면 쪼그라들어서 거의 흔적만 있다. 아이를 낳을 게 아니면 굳이 미련을 둘 이유가 없다.” 그는 수술 결과에 만족했고, 얼굴은 건강하게 빛이 났다. 자궁이 없으면 건강할 수 없고 노화도 빨리 진행될 거라고 막연히 상상하던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내게서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친구도 인식의 전환을 일으킨 것 같았다. 친구는 출산을 두 번 한 40대 중반 여성으로, 심각한 빈혈과 생리 증후군으로 몇 년째 고생하고 있었다. 그의 병명은 자궁내막증이었다. 그는 매달 철분 주사를 맞고, 기저귀형 생리대를 차고, 회사 갈 때 말고는 항상 소파에 누워 지내면서도 수술을 거부했다. 오히려 의사가 제발 수술하라고 부탁할 지경이었다. “달걀 크기여야 할 자궁이 신생아 머리통 정도로 커진 상태다. 이 정도 빈혈과 생리 빈도, 양, 통증이면 일상생활도 어려울 거다. 이제 쓰지도 않을 자궁을 지키느라 본인도 고생이고 가족도 고생이지 않느냐.” 그런데도 막연한 거부감 때문에 버티던 친구가 내 지인의 사례를 듣고 마음을 바꾸었다. 자궁 적출 후 오히려 건강해져서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하는 50대 여성이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친구는 최근 경부와 난소를 남기는 자궁 적출 수술을 받았다. 마취가 풀린 직후부터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도 빨랐다. “아쉽지는 않아?” 나는 병가 중인 친구에게 물었다. “후련하지 뭐, ‘수고했어, 내 자궁’ 그러고 있어.”

나도 언젠가 내 자궁과 이별하게 될 것이다. 이 녀석이 계속 말썽을 일으켜서 내가 떼어내든, 늙어서 저 스스로 쪼그라들든 할 것이다. 출산하지 않은 자궁이 소멸할 때도 ‘수고했어’라는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을지 나는 모르겠다. 다만 자궁 말고 ‘나’는 확실히 수고하고 있다. 어머니가 되기 위한 숭고한 희생 같은 게 아니다. 생리하는 몸으로 태어났고, 어떤 이유로든 그걸 중단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의학의 발전 때문이건 인식의 변화 때문이건 나와는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이 점점 늘 것이다. 임신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궁이 여자의 건강과 인생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미련한 짓으로 여겨지는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자궁을 거룩한 생명의 원천이라고 숭배하기보다 인체의 일부로서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더 연구하기를 바란다. 나도 좀 그만 수고하고 싶다는 말이다.

글쓴이
이숙명(칼럼니스트)
에디터
조소현
뷰티 에디터
이주현
포토그래퍼
이신구
자수
Sarah Leonard(@atypicalsti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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