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사계절의 이슈 스무 가지 #2

2023.02.20

by VOGUE

    사계절의 이슈 스무 가지 #2

    세상의 대격변, 일상을 지키며 맞은 한반도의 변화. 그 사계절의 이슈 스무 가지.

    바우하우스를 좋아하세요?

    건축이나 가구에 딱히 관심 없는 사람도 ‘바우하우스’라는 단어는 친숙하다. 바우하우스의 사전적인 의미는 ‘독일 예술종합학교이자 근대 디자인의 정점을 이룬 예술운동’. 2~3년 전부터 시작된 이 바람은 올해 정점을 찍었다. 팬데믹으로 온통 혼란스러운 날을 보내며 아늑한 내 집을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이 늘면서 바우하우스는 뜨겁게 소비됐다. 특히 트렌드에 민감한 MZ세대가 유행을 이끌었는데, 차갑고 딱딱하지만 세련되고 실용적인 바우하우스의 매력에 매료됐다. 입고 바르고 여행하는 데 몰려 있던 지출은 인테리어로 넘어갔다. 셀럽의 집에서나 가끔 보이던 USM은 ‘국민 서랍장’이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마르셀 브로이어가 디자인한 바실리 체어는 최신 카페가 갖출 필수품이 됐다. 가격을 가늠할 수도 없는 샬롯 페리앙의 사이드 보드, 까시나의 LC 시리즈도 정사각형 인스타그램 창에 빈번히 등장한다. 바우하우스가 가구, 건축, 조명, 그래픽은 물론 라이프스타일까지 아우르는 디자인 개념으로 자리 잡으며 패션계의 러브콜도 끊이지 않았다. 늘 패션 하우스의 리미티드 에디션 차지였던 팝업 스토어 자리가 바우하우스 특별전으로 꾸며졌다. 분더샵은 미뗌 바우하우스와 협업해 가구와 소품을 소개하더니 연이어 빈티지 가구점 웨이브렛과 빈티지 의자전을 기획했다. 10 꼬르소 꼬모에서는 프리츠 한센 신제품 의자를 소개하는 팝업 행사도 열었다. 바우하우스 열풍에 고공 매출이라는 날개를 달아 몇몇 브랜드가 플래그십 스토어도 열었다. 루이스 폴센은 성수동에 아시아 최초의 단독 스토어를 열었고 프리츠 한센 역시 한남동에 쇼룸을 마련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이 리빙 격전지가 되었다. —공인아

    n번방에서 감방으로

    2019년 말 수면 위로 올라온 텔레그램 n번방 관련 수사는 2020년 내내 계속되었다. 성범죄 처벌 강화에 민심이 모이자 지난 4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마지막에 잡히는 사람이 가장 가혹하게 처벌받을 것”이란 화려한 멘트로 이번엔 다를 거라는 기대감을 안겼다. 경찰과 검찰은 주요 텔레그램 성 착취방 운영자 4인의 신상을 공개하고, 성범죄보다 형량이 높은 범죄 단체 조직죄를 적용했다. 성범죄를 철없는 사내들의 짓궂은 장난쯤으로 여기던 기존 분위기와 달리 사회의 비난이 집중되자 경찰에 불려가기도 전에 겁먹고 자살한 가해자도 있었다. 이에 ‘자살 대신 자수하라’는 표어도 등장했다. 하지만 사건 해결 기간이 오래 걸리고, 인터넷에 주문처럼 퍼져 있는 ‘(동시 접속자) 26만 명’이란 추정치와 동떨어진 수사 범위가 발표될 때마다 국민의 불안은 더해갔다. 마침 7월에는 세계 최대 아동 음란물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 운영자 손정우가 1년 6개월이란 터무니없이 짧은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는 이벤트가 있었다. 세계 32개국 수사기관이 공조하고 해외에선 이용자들조차 중형을 선고받은 대형 범죄인데 정작 핵심 인물이 군 복무 대신 감옥에 다녀오는 수준의 호사를 누린 것이다. 과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 출소를 앞두고 국회와 지자체에서 추가 피해 예방 대책 논의가 벌어졌다. 이런 상황이 겹치면서 성범죄 관련 대한민국 사법부와 양형 체계에 대한 불신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자 사적 복수 시스템이 생겼다. n번방을 비롯 각종 성범죄, 아동 학대, 살인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한다는 목표로 6월에 개설된 ‘디지털교도소’는 잠시 인기를 끌다가 누명을 쓰고 신상이 공개된 피해자들의 자살, 고발로 3개월 만에 폐쇄되고 운영자가 구속되었다. 모든 혼란이 성범죄 청정 국가로 가는 과도기 현상이기를, 이것이 마지막이기를 바라는 국민은 중요한 기준으로 남을 n번방 수사 결과와 재판을 주시하고 있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이번 수사로 10월 말 기준 2,454명이 형사 입건되고 217명이 구속됐다. 가해자는 교사, 언론인, 경찰, 학생 등 온갖 직업과 연령대에 퍼져 있었다. 경찰이 확인한 피해자는 880명에 이른다. 검찰은 n번방 시초 문형욱과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의 1심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11월 현재 시민단체는 강력한 판결을 요구하며 시위와 성명을 이어가고 있다. 10월 말 다른 재판에서는 n번방 영상을 재판매한 10대들에게 실형이 선고되었다. 수사는 진행 중이고 관련 재판도 많이 남았기 때문에 2021년에도 n번방이란 단어는 계속 불릴 것이다. 우리는 때로 아름다운 것을 보고, 즐거운 일을 하고, 많이 웃으며 살아가겠지만 그것이 이 거대한 병폐에서 관심과 분노를 거두었다는 뜻은 아님을, 수사기관과 재판부는 기억해야 한다. —이숙명(칼럼니스트)

    배달의 기수

    배달 음식 문화가 하루 이틀 사이 형성된 건 아니지만 팬데믹 사태가 그 성장에 액셀러레이터가 된 건 분명하다. 개학이 연기되고 재택근무로 전환되면서 우리는 집밥을 선택하게 됐다. ‘집밥’이라는 단어를 듣고 집에서 만든 식사를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최근 식생활의 변화는 두 가지다. 가정 간편식과 배달 음식. 포장을 뜯어 데우면 되는 간편식은 호응이 좋을 수밖에. 미로식당의 떡볶이, 금산제면소의 탄탄멘, 소이연남의 쌀국수 등 줄 서야 맛볼 수 있던 맛집 메뉴를 내 식탁에서 가뿐히 즐길 수 있으니 누가 마다할까. MSG가 가득 들어간 레토르트식품이 아니다. 신선한 재료로 건강하게 요리한 포장 음식일 뿐이다. 배달 음식에 대한 지지도 역시 상승했다. ‘혹시 여기도?’ 하는 생각으로 검색하면 지금 먹고 싶은 맛집 메뉴가 웬만하면 다 있다. 팬데믹으로 방문 고객이 줄자 맛집이 포장 서비스를 시작한 덕분이다. 배달의민족, 요기요, 배달통, 쿠팡이츠, 위메프오가 이들의 민첩한 조력자다. 최근에는 편의점까지 딜리버리 서비스에 가세해 배달비 3,000원만 추가하면 패딩을 입고 편의점으로 뛰어가는 수고를 면할 수 있다. 이제 더는 ‘그 집 떡볶이가 생각나서’ 잠 못 이루는 일은 없다. —공인아

    떠나요, 내 나라로

    행정안전부 인허가 정보에 따르면 올해에만 여행사 918곳이 폐업했으며 (10월 기준) 국내 톱 5 안에 들던 NHN여행박사가 직원 10명을 남겨두고 250여 명의 직원을 구조 조정했다. 아웃바운드를 중심으로 하던 여행사는 폐업 혹은 대부분 개점휴업 상태로, 국가의 지원이 끊기는 11월 이후 대량 구조 조정이 이어질 전망이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에도 여행은 계속된다. 최근 2~3년간 비약적으로 성장한 해외여행의 수요는 국내로 흡수됐다. 하늘길이 막히면서 국내 여행의 문이 열렸다. 사람은 사람을 피해 자연으로 갔다. 주말마다 중년들의 마실 코스였던 동네 뒷산에는 남녀노소가 바글바글하다. 일부 마니아만 찾았던 국내 오지 트레킹 상품도 판매율이 증가했다. 신인류 ‘산린이(등산 초보)’가 출현했다. 레깅스를 입고 등산하는 20대 여성, 정상에서 SNS 인증샷을 올리는 젊은이들은 아재들이 점령하던 등산 문화를 바꿨다. 4~5년 전 무르익었다가 한풀 꺾인 캠핑도 부활했다. 젊은 층을 대상으로 차박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 코로나와 상관없이 꾸준히 인기였던 호캉스는 이태원 클럽발과 사랑의교회, 광화문 집회발로 확진자 수가 늘었던 시기를 제외하곤 여전히 성황이다. 특히 프라이빗하게 즐길 수 있는 럭셔리 호텔, 리조트, 풀 빌라는 방 잡는 게 하늘의 별 따기다. 숙박비가 100만원에 달하는 제주의 럭셔리 리조트나 호텔, 풍광이 좋은 자연에 자리 잡은 고급 고택 등은 해외로 허니문을 떠나지 못한 허니무너들이 몰려 내년 초까지 예약이 꽉 차 있다. 객실 수가 적은 회원제 리조트도 호황이다. 객실 수가 많은 시내의 대형 호텔보다 객실 수가 적은 비싼 호텔이 더 인기를 모으는 이유는 아무래도 안전과 방역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국내 여행 붐이 일어난 틈을 타 인구가 적은 소도시 지자체는 자신의 도시를 알리기 위한 여러 이벤트를 기획했다. 일명 ‘살아보기 여행’. 제천과 강진이 실시한 ‘일주일 살기 여행’은 높은 참여율과 긍정적 반응을 얻었다. 당일치기 혹은 1박 2일 동안, 유명 국립공원이나 관광지를 찾는 것에서 진일보해 그 지역에서 조금 오래 살며 흡수되는 여행. 국내 여행도 인증샷만 찍는 게 아닌 머무는 여행의 트렌드가 확산될 것이다. 국내 전문인 승우여행사는 24박 25일, 팔도 유람을 하는 간 큰 여행 상품도 선보였다. 서울을 떠나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내륙 지역과 울릉도, 제주도까지 두루 보고 오는 여행이다. 이를 통해 그동안 해외 패키지 여행에 가려져 과소평가되던 한국의 자연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가 깨닫는 계기가 되기를. 코로나 시대에도 여행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여하연(전 <더 트래블러> 편집장)

    남돈내산

    유튜버들의 ‘뒷광고’ 논란이 터졌다. 뒷광고는 특정 컨텐츠를 소개하는 대가로 돈이나 물품을 받고도 협찬·광고 등의 표시를 하지 않는 것이다. 유튜버가 ‘내돈내산(내 돈으로 내가 산)’이라며 소개한 가방이 ‘남돈내산’이었다. 스타일리스트, 연예인, 유튜버들이 대거 발각됐고, 연이어 사과 영상을 올리며 ‘쏘리 챌린지’라는 조롱도 나왔다. 화가 난 구독자는 청와대에 “인플루언서들의 뒷광고 관련 법 제정 및 그에 따른 강력 처벌을 바랍니다”라는 청원 글을 올렸다. 유튜버들이 교묘히 속인 것은 잘못이지만, 기존 방송·언론·블로그의 광고에 익숙해진 대중이 이번 사건에 더 화르르 타오르는 이유는 뭘까. 유튜브는 어느 매체보다 호스트의 개성이 중요하다. 그 개인을 보고 개인이 조회하고 구독하기에 둘의 심리적 거리는 어느 매체보다 가깝다. 구독자 댓글 하나에 유튜버가 반응하고 소통이 활발하다. 영상마다 유튜버가 “구독 좋아요 눌러주세요”라고 간청하듯 시청자의 댓글 하나조차 영향력이 세다. 유튜브는 어느 플랫폼보다 권력의 중심축이 시청자에게 기울어 있다. 손이 닿지 않는 스타가 아닌, 나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는 유튜버에게 구독자는 마음을 더 내줬다. ‘나의 친구’, ‘내가 키운 스타’, ‘내가 응원하는 동생’이 뒤로 받아 챙기고 자신을 속였다는 배신감이 클 수밖에. 또 인기 ‘유튜버=돈벼락’의 공식이 인지된 마당에 내 덕에 쉽게 돈을 버는 그들에게 참교육을 행하고 싶기도 하다. 구독자들의 구독 취소, 사과 요구, 이전의 영상을 다시 챙겨 보며 잘못 캐내기 등의 행동으로 유튜브에서 권력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지난가을 공정위는 관련 기준을 강화했는데 현재 계도 기간으로, 내년부터는 SNS에서 부당 광고가 발생하면 광고주뿐 아니라 해당 인플루언서도 제재를 받는다. 유튜브뿐 아니라 기존에 안일하게 넘어가던 다른 미디어도 숙고가 필요하다. —김나랑

    미술관 옆 온라인

    2020년은 미술계에서 역사적 한 해다. 미술계가 종교보다 숭배하던 명제 “예술 작품은 직접 봐야 한다”가 깨진 덕분이다. 사실 작품을 디지털로 볼 수 있는 환경 조성에 미술계는 무심하고 느릿느릿했다. 하지만 불가항력적 이유로 셔터를 내려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단시간에 집중력을 발휘해 온라인 전시 컨텐츠를 생산해 ‘의지가 없었을 뿐 실력이 없진 않았다’고 변명할 수 있게 됐다. VR 전시, 온라인 뷰잉 룸, 큐레이터 가이드 투어 등 형태가 다양했는데 10월에 열린 키아프 아트 서울(KIAF ART SEOUL)에서 온라인 뷰잉만으로 작품 판매가 호조를 보이자 미술계는 속으로 샴페인을 펑펑 터뜨렸다. 공급이 늘면 문화는 만들어지는 법. 초반 온라인 전시에 낯설던 관람객들도 쏟아지는 미술 영상 컨텐츠에 눈을 크게 떴다. 부지런히 컨텐츠를 업로드하는 MMCA 유튜브는 매달 몇천 명씩 구독자가 는다. 물론 디지털 컨텐츠는 오프라인 전시의 공감각적 경험을 대체할 수 없다. 하지만 전시를 보러 가고 싶게 만드는 강력한 유인책이자 작품을 보여주는 편리하고도 새로운 수단으로서 가능성을 보여줬다. 연기나 취소가 이어졌던 가운데도 박수를 받은 전시는 여럿이다. 물리적 이동이 불가능하다 보니 <팀랩: 라이프(teamLab: LIFE)>와 에이스트릭트의 개인전처럼 새로운 경험을 제시하거나 피크닉의 <명상>전처럼 지친 마음을 위로하는 전시가 호응을 얻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은 기획력이 돋보였다. ‘댕댕이와 반드시 가야 할 전시’로 입소문이 나서 삼청동 일대 작가들은 관람객에 댕댕이들까지 붐비는 미술관을 보며 헛헛해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고미술 소장품 특별전 <APMA, CHAPTER TWO>, 갤러리 현대 50주년 기념전도 방대한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바라캇 컨템포러리는 화려한 색깔과 무늬, 오브제 프레임으로 유명한 모로코계 영국인 아티스트 하산 하자즈 개인전으로 한국에 처음 그를 알렸다. 한편 사회적 거리 두기로 화이트 큐브가 하얗게 질리는 상황에서도 ‘줄 서는 전시’는 탄생했다. 일명 ‘RM 투어’, 즉 방탄소년단 RM이 다녀간 전시다. 가나아트센터 시오타 치하루 개인전, 국제갤러리 에이스트릭트 개인전, 금호미술관 김보희 초대전 등 RM이 든든한 뒷모습을 인스타그램에 인증한 전시는 ‘대박’이 났다. 한 갤러리 관계자는 출근하자마자 예약이 마감되는 상황이 매일같이 벌어졌다고 전했다. (K-팝 스타의 파급력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365일 대체로 평화로운 갤러리로서는 ‘별일’이다.) 만약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어떤 전시가 가장 흥행이 잘되었을까 묻는 질문에 한 갤러리 관계자는 사실 대부분의 전시가 잘되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미술 시장의 팽창 덕분이라고 했다. 해외 운송료가 오르고, 해외 작가 방한이 취소되는 등 여러 어려움이 닥쳤음에도 “최악은 아니었다”며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는 이유다. 단풍이 물들고 덕수궁에서 열리는 전시 <토끼 방향 오브젝트>가 북적인다. 멈춰 섰던 미술계가 다시 분주하다. —조소현

    줌에 줌을 당기다

    카카오톡,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와 줌(Zoom)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꾼 도구라는 점. 2011년 탄생한 화상회의 앱 줌은 비대면 시대 최적 소통 도구로 떠오르며 3분기에 가장 많이 다운로드된 앱 순위에 올랐다. 사회적 거리 두기 한복판에서 우리는 줌을 통해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했다. 집에서 화상회의를 했고 마스크를 벗고 처음으로 같은 반 친구들 얼굴을 보며 공부했다. 각자 배달 음식을 시켜놓고 술자리를 가졌고 때론 소개팅까지. 생일상을 차려놓고 선물 언박싱을 했고 추석 명절에 차례도 지냈다. 이탈리아에서 열린 신제품 론칭 행사에 참석했고 지속 가능성에 대한 세미나에서 토론도 벌였으며 전 세계 <보그> 편집장들 역시 매달 모니터에서 서로의 표정을 보며 활발히 토론했다. 요가와 꽃꽂이, 요리 강좌를 수강했고 진심으로 부서 회식도 했다. 줌으로 세상 일을 보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알게 된 건 “이렇게 해도 일이 되는구나”였고, 두 번째로 알게 된 건 “그래도 안 되는 일은 있구나”였다. 업무만 하면 되는 기존 사원들은 화상회의로 충분했지만 인간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신입 사원은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줌 술자리 초반 술과 음식은 맛있었지만 같은 음식점에서 함께 호흡하며 같이 바라보는 것들이 사라지자 술자리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결국 줌을 통해 불명확하던 것들이 명확해졌고 본질이 드러났다. 사내 정치, 위계질서, 출퇴근의 고단함 등에 흐려졌던 업무 그 자체가 보였다. 의사소통은 메시지가 전부가 아니었다. 표정, 몸짓, 분위기, 따뜻한 눈빛, 때로는 한편의 어깨도 ‘말’이었다. 이제 궁금한 건 줌의 운명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전히 해제되면 줌은 과거의 유물이 될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시공간을 초월해 효율적으로 촘촘히 연결되기’는 바이러스와 무관하게 우리가 바라던 이상향이니까. —조소현

    시네마 지옥

    영화계는 위기를 넘어 붕괴 직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 따르면 9월까지 전년 대비 총 매출 손실 추정치는 상영, 투자·배급, 제작 부문 등을 합쳐 1조원을 웃돈다. 촬영 일정 지연으로 인한 추가 인건비, 로케이션 촬영 취소로 인한 세트 제작, 개봉이 갑자기 연기되거나 취소되면서 홍보 마케팅 비용이 매몰되는 등 피해 유형도 다양하다. 극장 개봉작 편수는 예년과 비교해 크게 줄지 않았지만, 총 관객 수가 100만 명을 넘지 못한 달이 있을 정도로 사태는 심각했다. 영진위는 올해 최종 관객 수를 6,500만 명으로 예상하는데, <극한직업>, <기생충>, <겨울왕국 2> 등 천만 영화가 다섯 편이나 쏟아진 지난해의 호황을 떠올리면 눈을 의심할 만한 수치다. 극장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9월까지 전국 극장 수익을 집계한 결과 전년 대비 70% 급감했다. 당연히 문 닫은 극장도 있고, 인력을 줄이다 보니 서비스 품질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변동성이 큰 코로나 시국에 대작을 가진 배급사는 언제 영화를 풀어야 할지 눈치 보기 바쁘고, 텐트 폴 작품이 없으니 관객은 극장을 찾을 이유가 더더욱 사라진다. 악순환이다. CGV는 고심 끝에 얼마 전 관람료를 올렸다. 영화계 전반의 침체를 심각하게 바라보는 까닭은 신규 투자와 제작이 위축돼 새로운 작품을 만나기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리스크가 적은 아이템이나 유명 감독의 작품에만 투자가 몰릴 가능성이 커서 가까스로 가꿔온 생태계의 다양성이 파괴될 수 있다. 지난해 <기생충>과 <벌새>의 눈부신 성취로 희망을 느낀 한국 영화계는 지금 얼어붙었다. —김현민(영화 저널리스트)

    스포츠 소수자

    1·2차 세계대전을 제외하고 하계 올림픽이 취소된 적은 처음이다. 거의 모든 프로 리그도 멈추거나 무관중으로 진행했다. 아마추어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유명 러닝 동호회는 주 1회 남산과 한강 일대를 뛰는 모임을 무기한 연장했다. 강남에서 13년 성업한 요가원은 폐업했고, 사설 수영 학원에서는 영업 재개와 멈춤의 문자를 코로나 격상 단계가 달라질 때마다 보낸다. 대신 집에서 하는 ‘홈트’는 성장하고, 특히 등산, 캠핑, 골프 등의 인기는 높아지고 있다. 이들은 집단 활동이 아닌, 소규모 인원이나 비대면으로 즐길 수 있는 활동이다. 산행의 연령대는 점차 낮아지는 중이었으나 속도가 더 빨라졌다. 블랙야크의 산행 전문 커뮤니티 플랫폼 BAC 회원 수는 3개월 사이 3만 명이 증가해 19만 명이다. 캠핑은 자기 차에서 숙박하는 ‘차박’ 형태가 인기고, 기존의 북적대던 캠핑장이 아닌 오지를 찾는 이들이 늘었다. 유명 유튜버의 캠핑 컨셉은 ‘나 홀로 캠핑’이다. 인적 드문 산가에서 파타고니아 플리스를 입고 헬리녹스 의자에 앉아 하이브로우 테이블에서 차를 끓인다. 아이폰에선 음악이 나오고 옆에는 그날의 동반자인 강아지 한 마리가 함께한다. 그가 누군가와 접촉하는 장면은 없다. 골프는 ‘골린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킬 신입들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 골린이는 골프+어린이의 합성어인데, 어린이를 미숙한 상태로 묘사하는 용어기에 재고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사회적 거리 두기가 어느 정도 가능한 골프에 관심이 커졌다. 신입들은 20~30대가 압도적으로, 이들이 골프웨어와 용품을 소비하면서 백화점에 관련 전문 매장도 들어섰다. 코로나 블루를 이런 식으로나마 풀 수 있어 다행이다. —김나랑

    자업자득, 기후 재앙

    지구가 기후변화 롤러코스터를 타고 멀미를 앓았다. 한반도는 연이은 태풍(이름조차 괴상한 제9호 태풍 마이삭과 제10호 태풍 하이선!)과 역사상 가장 긴 장마로 논밭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다. 특히 중부지방과 제주도에는 무려 54일 동안 비가 내렸다. 강수량은 평년 두 배다. 모두 하늘만 바라보던 긴긴 장마와 태풍이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 채소값이 폭등했다. 상추, 호박, 배추 할 것 없이 지난해 대비 가격이 두 배 넘게 뛰었다. 논밭이 물에 잠기고 비닐하우스가 맥없이 무너지면서 600원에 불과하던 애호박이 7,000원까지 치솟았다. 애호박을 듬뿍 넣은 된장찌개 사진 밑에는 ‘찐부자!’라는 댓글이 달렸다. 다들 동시에 빼앗긴 뜨거운 여름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기상청은 48년 만에 처음 7월 평균기온이 6월보다 낮은 이상 기온을 보였다고 발표했는데, 여름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기후 전문가들은 흐리고 비 오는 날이 계속된 이유에 대해 블로킹 현상(고위도 지역에서 온난 고기압이 정체하거나 매우 느리게 이동하는 현상)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북극에 발생한 이상 고온 현상으로 한기가 중위도까지 남하했고 고위도의 찬 공기가 중위도에 계속 공급되면서 북태평양 고기압이 막혀 정체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정체전선은 동아시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큰비를 뿌렸고 한·중·일이 직격탄을 맞았다. 지구온난화가 집중호우와 산불, 가뭄 발생을 더 증가시킬 것이다. 올해의 재앙은 시작일지 모른다. —공인아

      에디터
      조소현, 김나랑, 공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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