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블랙, 순수하고 명료하며 깨끗하고 강렬한 컬러

2021.05.13

by VOGUE

    블랙, 순수하고 명료하며 깨끗하고 강렬한 컬러

    “블랙은 순수하고 명료하며 깨끗하고 강렬합니다. 그래서 형태와 유형을 결정하는 요인이며, 경박하지 않죠.” ─ CARLA SOZZANI

    “자기야, 기분이 별로야?” 고메즈 아담스(Gomez Addams)가 물었다. “어, 그래. 완전 별로야.” 이렇게 대답하던 모티시아(Morticia)가 남편을 바라보며 뱀파이어 스타일 깃이 달린 윤기 나는 블랙 코르셋 가운을 매만지고 있었다. 빨간 반바지를 보면 미키 마우스가 떠오르듯 ‘블랙’ 하면 <아담스 패밀리>가 떠오른다. 한마디로 그들의 블랙 의상은 정체성을 나타내는 옷이자 세상에 대한 관점이며 세상을 점령해가는 방법이다.

    진지한 블랙, 고딕풍 블랙, 매력적인 블랙, 절제된 블랙, 조각적인 블랙. 이처럼 종류도 다양한 블랙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 2019년이 끝나갈 무렵 디자이너들이 2020 F/W 컬렉션을 준비할 당시 우아한 제안으로 시크한 무채색이 등장했다. 이것은 과잉 소비에 따른 환경 손실을 따지고 급속히 변화하는 트렌드에 싫증을 느끼면서 높아지던 절제와 심플리시티에 대한 우리의 취향과 딱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세계적 팬데믹이 불어닥칠지 누가 알았겠나. 그리고 그간 도사리던 경기 침체와 사회적 격변이 덮칠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이로 인해 1년 만에 너무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래서 요즘은 블랙 의상을 입는 것이 실용적이면서도 우아한 선택으로 여겨진다. 이 격동하는 과도기적 시대에 블랙이 가슴 아픈 새로운 우위를 얻어가는 것이다.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다양한 만큼 블랙도 굉장히 다양하다. “경제적 쇠퇴 혹은 정치·사회적 불안의 시기라서 블랙의 인기가 치솟았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금욕과 저항의 표시이기도 하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코스튬 인스티튜트를 맡고 있는 웬디 유(Wendy Yu)와 앤드류 볼튼(Andrew Bolton)이 말했다. “예술·문화적 트렌드에 이어 패션계에도 블랙 유행이 이어지고 있죠. 블랙은 모더니즘, 미니멀리즘 혹은 추상적인 것을 표현합니다. 또 비트족(Beatnik), 펑크(Punk), 그런지(Grunge), 스트리트웨어(Streetwear) 같은 하위문화 스타일이 블랙의 인기 상승을 더 주도하죠.” 계속 연기되던 전시회를 드디어 개막했다. 이 전시에서는 1870년(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개관하던 해)부터 지금까지 블랙과 화이트 의상을 전시하며, 특히 수십 년에 걸쳐 나타난 유사성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그 시작점은 각 시대의 상복이다. “19세기에 유행하던 상복은 종종 매혹적이고 몹시 돋보인다는 평을 받았죠. 실제로 그 의상이 패션계가 블랙의 활용도를 높이도록 길을 닦았다고 보면 됩니다.” 볼튼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브 생 로랑의 르 스모킹, 샤넬의 블랙 트위드, 꼼데가르송 의상, 그리고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의 회화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발렌시아가의 인판타 드레스(Infanta Dress)를 전시작으로 선정했다. “블랙은 강한 기운과 실루엣의 드라마틱한 효과를 증폭시키는 잠재성 덕분에 현대 디자이너에게 꾸준히 어필할 수 있었어요.”

    이번 시즌 블랙 실루엣은 드라마틱하고 부드럽다. 발렌티노의 피엘파올로 피촐리의 작품을 보시라. 하이 네크라인 스팽클 터틀넥 셔츠와 러그 부츠에 매치한 윤기 나는 블랙 캐시미어 미디 코트를 비롯해 유광 블랙 램스킨 판초와 튜닉 가운 드레스를 선보였다. “이 컬렉션은 나이, 성별, 인종, 성격을 불문하고 개개인의 인간성에 집중하고, 그들의 느낌과 감정을 설명하고 존중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되었어요.” 피촐리가 말했다. 그는 마를렌 뒤마(Marlene Dumas)의 소울풀한 블랙 잉크 인물 초상화, 고전주의 스타일, 맞춤 유니폼의 블랙, 블루, 그레이를 참조했다. 셀린이 제인 버킨과 카트린 드뇌브에게 헌정한 축 늘어진 거대한 펠트 모자, 간소한 터틀넥 셔츠와 A라인 스커트 등의 작품도 비교해볼 만하다.

    블랙은 경건하고 단호할 수도 있다. JW 앤더슨은 한껏 부푼 소매와 사제복 스타일 넥의 트라페즈 라인 실크 새틴 드레스를 선보였다. 그리고 파코 라반은 순수한 화이트 레이스 깃과 소매를 가미한 통 좁은 바지 정장을 입은 중세 왕자 모습의 모델을 무대에 올렸다. 파코 라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줄리앙 도세나는 이렇게 말했다. “블랙에 금욕적이고 신비로운 존재감을 부여하면서 작품 형태에 집중해 실루엣을 만들고 싶었어요. 혹은 연기처럼 가볍게 만들어서 신체 주변의 어두운 느낌을 표현하고도 싶었죠.” 아울러 거리에서 블랙으로 입은 사람들을 보면 그림같이 느껴지거나 그 공간에 놓인 추상적인 형상 같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래서 그 사람의 움직임과 자세에 더 집중할 수 있죠. 속도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이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일부 디자이너에게 블랙은 필수다. 코코 샤넬은 그녀의 커리어 전반에 걸쳐 리틀 블랙 드레스와 블랙 재킷의 완성도를 높이려고 노력했다. 무채색 그리고 그녀의 새로운 우아한 궁핍주의(Nouveau Pauvre Chic)가 바탕이 된 미니멀리스트 형상이 모조 장식품과 함께 어디에서 입어도 무방할 활기 넘치는 의상을 탄생시켰다. “여성들은 색이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색을 생각하죠. 저는 블랙에 그 모든 게 담겨 있다고 말해왔어요. 화이트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색은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녔죠.” 그녀가 주장했다. 잉키 블랙(Inky Black)과 폴라 화이트(Polar White)는 샤넬의 패키징, 매장 인테리어의 특징적 색상이다. 심지어 그 브랜드가 수집한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과 에릭 린드만(Erik Lindman) 같은 아티스트의 작품에도 특징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번 시즌 샤넬의 버지니 비아르는 소프트 포퍼 사이드(Popper Side) 트랙 팬츠, 브라 톱, 블루종을 통해 블랙에 여유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는 버블 가운 드레스, 트라페즈 드레스, 다양한 레이스 칵테일 드레스의 건축적 실루엣을 통해 블랙의 극적인 면을 증폭시켰다. 이 브랜드의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는 아담스 패밀리가 좋아했을 법한 으스스한 스타일의 플리츠 백, 케이프, 뾰족뾰족하고 페티시적인 러버 스웨트 톱, 가죽 팬츠를 통해 블랙의 힘을 포착해냈다.

    일본 출신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와 레이 가와쿠보는 ‘스케어크로우(Scarecrow)’ 스타일로 알려진 작품으로 1980년대 파리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들의 풍성한 블랙 가운 드레스와 로 에지(Raw-Edge) 스타일 의상은 리틀 블랙 타이외르(Tailleur) 정장의 부르주아적 매력을 거부하고 파리에 기반을 둔 특유의 시크함에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결국 그것에 동화되고 말았다.

    실제로 1980년대에 블랙은 한 가지 삶의 방식이 되었다. MTV를 장식한 지나치게 알록달록한 색상과 화려함 가운데 흥청거리던 시대에 블랙은 신중함과 교양을 나타내는 사회적 신분의 상징이 된 것이다. 패션계를 비롯해 창의성을 추구하는 업계에서 너도나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블랙 요지 재킷과 맨해튼 명품 백화점 바니스에서 블랙 의상을 추종하던 판매 직원들부터 구매한 터틀넥 셔츠는 뮤지션과 영화감독에게 유니폼 같은 옷이 되었고, 로버트 파머(Robert Palmer)의 ‘Addicted to Love’ 비디오에 등장해 영원불멸의 존재가 된 블랙 알라이아 드레스는 섹시함의 최고봉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반들반들한 흑요석 대리석(Obsidian Marble), 헤어스프레이, 제트 블랙(Jet Black) 실크 새틴 의상은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필수품이 되었다. 블랙은 하나의 철학을 상징하기도 했다. 1991년 카를라 소짜니는 밀라노에 10 꼬르소 꼬모 매장을 오픈했다. 이곳은 애가풍 단색 의상, 헬무트 뉴튼과 리처드 아베돈을 비롯한 흑백사진 거장의 작품, 포르나세티의 그래픽 도자기류 등을 전시하거나 판매하는 편집매장이었다. 늘 블랙 의상을 입던 금발의 소짜니는 이탈리아 햇살을 받은 다크 천사처럼 보였다.

    “여기도 블랙, 저기도 블랙이에요. 사람들이 블랙을 통해 만들어낸 많은 관념과 철학이 있죠.” 소짜니가 말했다. “1970년대에 저는 소니아 리키엘의 ‘블랙이 아름답다’는 철학을 추종했죠. 1980년대에는 레이 가와쿠보가 보여준 여성에 대한 비전을 제가 느끼는 대로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지금 저는 아제딘 알라이아의 블랙에 대한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는 ‘블랙이 기쁨을 주는 색이라 좋아요’라고 말했죠. 모든 사람이 나름의 생각을 갖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가장 이상적으로 영원히 간직하는 것은 바로 검은색 옷입니다. 꼼데가르송, 알라이아, 마르탱 마르지엘라 옷을 한 벌씩 갖고 있죠.” 그녀가 말했다. “블랙은 순수하고 명료하며 깨끗하고 강렬합니다. 형태와 모양을 결정하는 요인인 데다 경박하지 않아요. 생각이 공간과 시간을 열어갈 기회도 줍니다. 그리고 블랙에는 모든 색이 혼합되어 있기에 우리가 블랙과 함께 접촉하는 다른 색을 뒷받침하고 부각시켜요.”

    1990년대 중반 헬무트 랭은 블랙에 극단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12가지 톤의 블랙 데님 진을 신성한 제의처럼 매장에 디스플레이했다. “블랙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기에 오랫동안 유행이 지속되죠.” 볼튼이 설명했다. “19세기 중반 이전, 화학적 블랙 염료가 도입되기 전에 블랙 염료가 굉장히 비쌌어요. 그래서 진하고 그윽한 검은 천, 특히 실크 의상은 고급스러움과 세련미의 상징이었습니다. 서양에서 블랙은 애도의 의미와 관련이 있습니다. 겸손하면서도 냉정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알라이아가 좋아하던 행복한 잉크 피치 블랙과 싸구려 옷의 ‘슬픈’ 블랙 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만큼 블랙 염료의 품질이 늘 중요하다. “저는 정말 딥 블랙이 좋아요. 그래서 그 색을 더 잘 흡수할 수 있는 적합한 표면을 찾아야 하죠. 아주 정밀하게 그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줄리앙 도세나가 말했다. 잉크 블랙과 제트 블랙을 가장 높이 쳐준다. 글을 쓸 때 사용하는 잉크 블랙은 원래 양초와 램프를 태우고 남은 잔여물인 램프블랙(Lamp-Black)으로 만들었다. 최상품 제트 블랙은 휘트비(Whitby) 광산에서 나왔다. 미네랄로이드로 만든 보석 장신구를 사랑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상복 스타일의 유행을 선도한 주인공이다.

    알렉산더 맥퀸의 사라 버튼은 다양한 블랙으로 기교를 부린다. 가장 눈에 띄는 드레스는 가슴 부분에 빨간 하트 모양 자수가 가미되고, 치맛단부터 속이 비치는 블랙에서 점차 짙은 블랙으로 이어지는 그러데이션 실크 작품이었다. 대조적으로 안토니 바카렐로는 이브 생 로랑이 르 스모킹, 얇은 블라우스와 더불어 1960년대 후반 처음 탄생시킨 유광 라텍스, 스팽글, 가죽을 곁들여 주술적인 블랙의 매력을 한껏 만끽하고 있다. 도쿄 꼼데가르송의 케이 니노미야는 블랙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2012년 그가 론칭한 레이블의 구심점으로 삼는다. 그래서 그의 브랜드 느와(Noir)에서는 새로운 양식의 탄생이라 할 수 있는 특별한 작품과 더불어 늘 멋진 블랙 가죽 재킷과 러플 티셔츠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최신 컬렉션도 블랙과 관련되어 있다. “저는 블랙이 어떻게 단계를 지어가는지 생각해요. 그리고 레드 스케일의 맨 끝에 이르면 어떻게 될지 생각했죠. 일종의 색에 대한 연구죠.” 니노미야가 말했다.

    새로운 블랙은 계속 나오고 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고, 어두운 합성 물질이 2014년 세상에 등장했다. 이 밴타블랙(Vantablack)은 원래 항공 산업용으로 만들었다. 이 물질의 제조사 서레이 나노시스템즈(Surrey NanoSystems)는 “그것은 우리가 보게 될 블랙홀에 가장 가까운 색이라 종종 묘사됩니다”라고 전했다. 어쩌면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Kassia St Clair)가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것을 보며 말로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것은 달의 어두운 표면에서 하늘의 한 부분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다른 검은 물체가 비교적 흐릿하게 빛날 정도로 검다.”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가 이 극도로 짙은 물질의 제조사와 독점 계약에 서명했을 때 예술계에서 엄청난 폭풍이 일어났다. 블랙보다 더 블랙인 색소가 시장에 출현했다. 하지만 밴타블랙이 여전히 최고로 남아 있다.

    블랙은 사람들의 혼을 계속 빼놓고 있다. 패션 PR 전문가 데이지 호펜(Daisy Hoppen)은 “제게 블랙 의상은 시크함과 세련미의 전형입니다”라고 말했다. “제가 노먼 파킨슨(Norman Parkinson),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 어빙 펜, 리처드 아베돈의 상징적인 패션 이미지를 떠올리면, 요즘에도 제게 울림을 주는 멋진 블랙 의상을 입은 모습으로 연상되는 경우가 많죠.” 그녀는 종종 영화 의상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옷을 고르기도 한다. “<사브리나>,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등장한 오드리 헵번, <크래프트>와 <아담스 패밀리> 등의 고딕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는 거죠. 저는 중간 길이의 검은 레이스 드레스와 부츠, 두꺼운 양말을 즐겨 착용해요.” 더 뱀파이어스 와이프(The Vampire’s Wife)와 시몬 로샤 스타일을 즐겨 입는 호펜이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블랙을 추종하는 새로운 인물이 나오고 그런 인물은 꾸준히 증가할 것이다. 알바니아 태생의 넨시 도자카(Nensi Dojaka)야말로 대표적 신예다. 그녀는 패션 이스트(Fashion East)에서 스키니 그래픽 슬립 드레스와 의상으로 구성한 컬렉션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패션 공부를 시작하기 몇 년 전 런던 테이트에 마크 로스코(Mark Rothko) 전시를 보러 갔죠. 각기 다른 색조의 블랙을 사용한 아주 특별한 작품이 있었는데, 모든 뉘앙스가 한데 어우러지며 여러 형상을 만들었어요. 굉장히 강렬한 힘이 느껴졌어요. 빨려들 정도였죠. 블랙은 제가 사랑하는 힘과 취약성을 모두 지녔어요. 제게 블랙은 디자인과 패브릭, 그 옷을 입은 여성의 힘을 부각시키는 수단입니다.” 도자카가 말했다. 그녀가 디자인한 메시 보디수트와 트라우저는 벨라 하디드가 지난해 9월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입어 주목을 끌었다.

    그것이 바로 블랙의 마법이다. 그것은 절제를 의미할 뿐 아니라 매력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구름처럼 불분명하면서도 건축적 표현이 될 수도 있다. 또 조용할 수 있으며 아담스 패밀리가 잘 알고 있듯 즐거운 블랙 유머일 수도 있다. 역설적 부분을 굉장히 많이 지닌 것이다. “블랙은 말에 따라 분위기가 정해지는 색이에요. 그래서 블랙은 시적이죠. 지금 우리 삶에는 시가 필요하답니다.” 소짜니가 말했다

      글쓴이
      Harriet Qu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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