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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이니까

2021.01.27

by 공인아

    이병헌이니까

    극장에서 <공동경비구역 JSA>, <달콤한 인생>, <광해, 왕이 된 남자>, <내부자들>, <남산의 부장들>을 보고 나온 관객들의 반응은 다양했지만, 결국 한마디로 귀결되었습니다.

    “아, 이병헌! 그의 연기는 정말이지 할 말을 잃게 한다!”

    얼마 전 출시된 책 <배우 이병헌>은 백은하배우연구소 백은하 소장이 무려 31편의 영화를 통해 8,471만9,131명의 관객을 동원한 대한민국 대표 배우 이병헌을 다면적, 다층적으로 분석한 책이랍니다.

    백은하 소장은 기자 생활을 통해 30년간 목격한 한 배우의 진화를 면밀히 기록했는데요. 본인 및 다양한 동료의 인터뷰를 포함해 1년간 수집하고 분석한 다양하고 객관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285페이지에 달하는 배우 연구서를 집필했습니다.

    그녀가 앞으로 집필할 배우학을 표방한 ‘액톨로지(Actorology) 시리즈’의 첫 편으로 이병헌을 선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나긴 여정을 시작하며, 인트로에서 그녀는 이렇게 집필 소감을 전합니다.

    이병헌을 떠올린 것은 당연했다. 배우를 연구하는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하기에 이병헌은 동시대 배우 중 최적의 배우였다. 누구보다 입체적인 활동,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며 구체적인 성과로 스스로를 증명해온 배우이기 때문이다.

    공영방송 공채 탤런트로 시작해 충무로 르네상스, 한류 열풍, 할리우드 진출을 거쳐 레거시 미디어와 뉴 미디어를 유연하게 오가는 배우 이병헌. <배우 이병헌>은 이병헌의 연기와 인생에 대해 집중적으로 돌아보는 내용을 담았으며 그가 1991년 KBS 공채 연기자로 발탁되던 시절부터 2021년 현재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100여 장의 사진 자료까지 다양하게 포함해 흥미를 더합니다.

    가수 이효리는 이 책을 덮으며 “배우 이병헌을 실제로 만나 길게 이야기를 나눈 기분이다. 만약 내가 연기를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 책을 참고서처럼 들고 다닐 것 같다”고 평했는데요.

    에디터 역시 이 책을 매우 흥미롭게 읽은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파트는 그와 백은하 연구소장이 나눈 깊은 대화입니다. ‘이병헌의 재발견’이라는 부제로 그 일부를 소개할게요.

    이병헌은 원래 끼가 많다?

    “어릴 때는 요만큼이라도 높은 단상에 올라가면 아예 아무 말도 못하는 애였어요. 배우가 되기 전까지 나란 사람이 배우가 될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오히려 제 동생 은희가 아기 모델부터 어린이 드라마까지 쭉 카메라 앞에서 자랐죠. TV에 나오는 사람들은 말도 잘해야 되고 잘 까불어야 되고, 창피한 것도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기본적으로 나는 그러지를 못하니까 아예 꿈도 못 꿨어요.”

    이병헌은 연기 천재로 타고났다?

    “KBS 공채에 합격하고 방송국 들어가서 첫날 들었던 이야기가 ‘네가 꼴찌로 붙었어’였어요. 연수 3개월이 끝나고 마지막 날 최종 테스트를 했는데 한 PD님이 다가와서 ‘야, 넌 어떻게 꼴찌로 들어와서 1등으로 끝내는 거야?’ 이러더라고요. 사실 저는 연극영화과를 졸업했거나, 연극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 제가 1등으로 연수를 마칠 수 있던 건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그냥 기존의 어떤 습관도 없는 백지 같은 상태여서였어요.”

    빚이 많은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남겨진 아버지 빚 때문에 나이트클럽 무대까지 출연해 돈 갚아가면서 정말 힘들게 버틴 몇 년이 있었어요. 2000년대 초반은 <공동경비구역 JSA>, <달콤한 인생>,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올인>까지 메가스타로 자리 잡은 시기였지만 안으로 보면 되게 힘들게 보낸 시기였죠. ‘현실의 나’와 ‘배우로서의 나’의 간극이 컸던 시기였어요.”

    이병헌은 대사를 잘 외운다?

    “배우가 아닌 일반 관객분들이 제일 많이 하는 질문이 ‘저렇게 긴 대사를 어떻게 다 외우지?’ 하는 거예요. 하지만 영화 촬영은 몇 개월에 걸쳐서 찍는 거라 상상하시는 것만큼 대사를 외우는 것 자체가 힘든 작업은 아니에요. 물론 글자나 단어 하나하나를 외우려고 들면 진짜 되게 오래 걸리겠죠. 대신 그 신의 전체 흐름과 감정 상태를 일단 잘 파악해두면, 대사는 자연스럽게 저절로 외워지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대사 외 그 이상의 것들이 완전히 내 속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했을 때 카메라 앞에 서요. ‘자, 레디!’ 할 때는 앞으로 해야 할 대사를 생각하지 않아요. 대신 이 대사가 나오기 직전의 내 감정을 기억하려고 하죠.”

    이병헌에게 NG란 없다?

    “어떨 때는 촬영장에서 내가 연기해놓고도 ‘잠깐… 이 대사 어느 영화에서 많이 들어봤던 것 같은데…’ 할 때가 있어요. 기억 저편에 있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어떤 사람의 말을 흉내 내고 있다는 자각이 확 들 때가 있죠. 그렇게 ‘이건 내 것이 아니야’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한 번만 더 찍자고 부탁드려요. 그리고 모든 기억을 다 떨쳐버리고 온전히 이 사람의 말, 내 기분으로 다시 연기해보죠. 나 스스로가 이건 내 언어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 때는 용납할 수가 없어요.”

     

    이병헌은 애드리브에 항상 열려 있다?

    “어떨 때는 촬영 들어가기 전에 재밌는 아이디어가 생각나서 감독님에게 미리 상의하고 하는 경우도 있고 어떨 때에는 ‘이건 편한 대로 제가 다시 한번 해볼게요’ 하고 추가할 때도 있죠. <내부자들>의 ‘모히토’와 ‘몰디브’가 바뀐 것도 애드리브였어요. 애드리브가 효과적으로 잘 사용되는 경우엔 작가의 의도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그 신의 정서를 배가시킬 수 있지만 애드리브가 너무 세서 정작 신의 의도가 안 보이고 확 묻힌다면 그건 좋은 애드리브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도 그런 경우를 항상 경계하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이병헌은 액션 배우로 타고났다?

    “액션처럼 테크닉이 필요한 연기의 비결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노력이 반 이상이에요. 아니, 거의 다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액션 신을 할 때 노력과 반복적인 연습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실수하면 사고로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냥 막 싸우는 게 아니라 안무처럼 정해진 모두의 약속이거든요. 아무리 짧은 액션이라고 해도 슛 들어가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반복, 또 반복 연습이에요. <지.아이.조> 시리즈의 스톰 쉐도우 같은 경우는 촬영 한 달 정도 먼저 가 있으면서 액션도 하루에 1시간 이상은 했어요.”

    이병헌은 이미지 관리에 목숨 건다?

    “사실 배우로서는 코미디가 가미된 영화를 찍을 때 가장 즉각적인 행복감을 느껴죠. 코미디는 관객들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오니까 배우 입장에서는 약간 보상받는 느낌이 있죠. 웃기기 위해 배우가 망가지느냐, 아니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작품 안에서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전혀 없어요. 기존의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잘 하지 않아요. 그런 모습을 연기한다고 배우로서의 내가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까요. 뭐가 되었든 그 장면에서 관객들을 설득하는 게 먼저죠.”

    이병헌은 익숙한 걸 싫어한다?

    “저는 남들보다 스스로가 먼저 자기에게 식상해지는 스타일이에요. 만약 누군가 ‘이병헌은 액션과 코미디가 좋아’라고 했을 때, 다음에도 이런 장르를 해서 사람들이 웃어주고, 액션을 보고 감탄해줄 때 물론 기쁘지만 동시에 제자리걸음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뭐랄까, ‘석연치 않은 기쁨’이랄까.”

    이병헌은 영어가 더 쉽다?

    “학창 시절 가장 잘한 과목이 영어이긴 하지만(고등학교 1학년 때 아이큐 테스트 결과가 155. 전교 최고였다고) ‘영어로 말하는’ 것과 ‘영어로 연기하는’ 것은 차원이 달라요. 한국어라고 해도 대사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터져나오게 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데 하물며 외국어는 어떻겠어요. 감독이 요구하는 것, 상대 배우가 충고하는 걸 들으면서, 자기 뜻을 다양하게 펼칠 수 있게 되기까지, 보이스 코치의 발음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로 말하는 내 진짜 목소리가 생기고, 대사를 가지고 놀기까지는 정말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어요.”

    원래 영화배우가 꿈이었다?

    “네 살 때 처음 극장에서 <빠삐용>이라는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나요. 복합적으로 뒤섞인 극장 특유의 냄새가 안에서 쏟아져 나오면 매표소부터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내가 지금까지 세계와 단절된 또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공간. 그곳에서의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신났죠. 영화가 상영되는 순간만큼은 내가 정말 다른 세상에 다녀온 기분이 들었으니까요. 제가 연기를 시작한 건, 어쩌면 배우라는 직업보다는 영화라는 공간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는지도 몰라요.”

    지금 이병헌에게 연기란?

    “벌써 인생의 반 이상을 배우로 살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배우로서의 내가 나인 건지, 그 밖의 시간에서의 내가 나인 건지 모를 때가 있어요. 제가 평소에 공상과 상상을 자주 하는데요. 결국 배우인 내가 시나리오에 있는 인물을 정말 진실되게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밖의 시간의 내가 공상하고 상상했던 세계 속에서 하나씩 무의식적으로 꺼내올 수밖에 없어요. 결국 나에게 연기란 그게 아닐까요?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의 세계.”

      에디터
      공인아
      포토그래퍼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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