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이름을 되찾은 <싱어게인>의 주인공들

2023.02.26

by VOGUE

    이름을 되찾은 <싱어게인>의 주인공들

    <싱어게인> 6인이 다시 시작하는 노래 그리고 이선희가 멈추지 않고 부르는 노래.

    이선희가 입은 퍼프 블라우스는 지수(Jisu), 와이드 팬츠는 에몽(Aimons), 화이트 부츠는 레이첼 콕스(Rachel Cox), 정홍일이 입은 양가죽 재킷은 아웃오브트렁크(Out Of Trunk), 팬츠는 H&M, 이소정이 입은 가죽 재킷과 팬츠는 H&M, 뮬은 앤아더스토리즈(& Other Stories), 이승윤의 럭비 티셔츠와 벨벳 재킷, 데님 팬츠, 로퍼는 구찌(Gucci), 요아리가 입은 가죽 원피스는 에몽, 레이어드한 니트 톱은 GmbH, 이정권이 입은 재킷은 H&M, 이너로 입은 블라우스는 카루소(Caruso), 바지와 신발은 프라다(Prada), 이무진이 입은 티셔츠는 낫노잉(Notknowing), 바지는 GmbH, 신발은 데상트(Descente).

    <싱어게인> 우승자가 발표된 지 30여 시간이 지난 시각, 톱 6와 이선희의 도착을 기다리는 <보그> 스튜디오는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무대 같았다. 뜨거움 후 찾아오는 차가운 정적, 바닥을 굴러다니는 샴페인병 같은 공허감이 맴돌았다.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지만 전날이 이어지는 듯한 감각이 부유한 건, 6개월 전까지 무명 가수였던 6인이 <싱어게인>을 통해 온 국민이 알아보는 가수로 뒤바뀐 덕분이다.

    ‘무명 가수전’를 내세우며 시작한 <싱어게인>은 남다른 면이 있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었지만 경쟁이 없었다. 엄밀히 말해 경쟁을 유발했지만 갈등이 없었다. 언뜻 비치는 출연자 대기실은 ‘최애’를 응원하는 팬클럽 같은 분위기였다. 참가자 71명은 앨범을 낸 적 있으나 잊혔다는 공감이 있었고 처음부터 서로 ‘동료’였다. 심사위원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심사평에서 유희열은 “어느 순간부터 심사보다 감상을 하게 된다”고 말했는데 과오를 지적하기보다 더 나은 다음을 위한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한마음 한뜻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은 그들의 성장과 변화를 펼쳐놓았다. 하지만 휴먼 드라마에도 스타는 탄생하는 법. 톱 6에 안착한 이승윤, 정홍일, 이무진, 이소정, 이정권, 요아리는 비로소 이름을 되찾았다. 이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음악을 내놓을 때 ‘싱어게인’이라는 드라마는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화이트 셔츠와 타이, 나일론 재킷과 팬츠는 프라다(Prada).

    하나둘씩 스튜디오로 도착한 톱 6는 최종회에서 얼떨떨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새벽까지 생방송을 마친 다음 날 뭐 했냐는 질문에 이승윤은 “좀비처럼 누워 있었다”고 답했다. 불과 30시간 전 이승윤의 머리 위로는 황금빛 리본이 쏟아져 내렸다. “<싱어게인> 초대 우승자는! 이! 승 !윤!” 이름을 불린 그에게 그야말로 ‘금의환향’하지 않았느냐고 말을 건네자 “저 혼자만 차분하고 주변은 모두 들떠 있어요”라고 했다.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부모님 성격이 무뚝뚝한 편이라고 운을 뗀 이소정은 부모님 바이브가 달라졌다고 전했다. “감정 표현을 하시는 분들이 아닌데 방송 보고 우셨대요. 전화로 ‘우리 공주님, 너무 잘했어. 엄마가 우리 딸이 노래 잘하는지 몰랐어’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10년을 노래했는데…(웃음)” 확실히 TV 출연은 어르신들에게 성공의 좌표다. 유튜브 조회 수도 ‘자고 나니 스타’를 증명하고 있었다. 첫 회에서 ‘여보세요’ 한 소절만으로 자신의 음악색을 드러낸 이무진의 ‘누구 없소’는 유튜브 조회 수 1,600만 회를 넘어섰다. “천만 넘겼을 때 순간 겁도 먹었어요. 과분한 반응이 갑자기 쏟아진 게 처음이었거든요. 이 숫자는 앞으로 인증된 사람이라는 자신감으로 작용하겠지만, 한편으로 제가 넘어야 할 큰 산이 될 것 같아요.” 이무진에게는 팬 카페 ‘무궁무진’도 생겼다. <싱어게인>이라는 여정을 마치고 난 이무진은 얼떨떨한 가슴을 부여잡고 팬 카페에 가입해 글을 남겼다. 개설한 지 하루 지났지만 회원 수는 2,000명이 넘는다.

    화이트 터틀넥과 나일론 원피스는 프라다(Prada).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은 요아리의 목은 많이 쉬어 있었다. “아쉽지만 한편으론 홀가분했어요. 계속 정신과 다니면서 약 먹고 노래를 했기 때문에 끝까지 마친 것만으로도 대견스러웠어요.” <싱어게인>은 참가자의 사연이 부각된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1라운드에서 무대 공포증을 고백한 그녀는 라운드를 거듭하며 극복해냈다. “앨범이 잘 안되면서 4~5년 전부터 시작됐어요. 너무나 친한 사람들 앞에서도 노래를 못하는 절 보면서 병이 온 걸 알았죠. 계속 숨기다 지난해 4월에 SNS 스토리를 통해 밝혔어요. 그러던 중 <싱어게인> 섭외가 들어왔고요.” 운명 같은 타이밍에 온 기회는 ‘아직 할 수 있다’는 어떤 암시처럼 느껴졌다. “감독님, 작가님이 좋아지고 있다고 늘 힘을 주셨어요. 그리고 방송하면서 받은 DM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었어요. ‘공부를 포기하려고 했는데 언니 무대를 보니 안 되는 건 없는 것 같아요.’ ‘힘들어서 나쁜 생각 많이 했는데 언니 무대를 보고 저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떨고 제대로 하지 못한 무대인데도 많은 사람이 내 마음을 읽어줬다는 감사함이 공포증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드라마 <시크릿 가든> OST ‘나타나’의 보컬로 소개됐지만 요아리는 스프링쿨러라는 밴드로 데뷔했다. 크랜베리스, 비요크를 비롯, 북유럽 뮤지션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아일리시 창법을 좋아했던 요아리의 음색은 밴드 색깔과 썩 잘 어울렸다. 가장 요아리다운 곡을 골라달라는 요청에 요아리는 진느(JINNH)라는 이름으로 낸 자작곡 ‘Stayed’를 꼽았다. “그동안 해온 음악과 달라 다른 이름으로 냈는데 이제 제 노래라고 알리고 싶어요. 저를 좀 많이 담아낸 것 같거든요.”

    아이슬란드에서 피어나는 목소리를 떠올리며 매일 노래하는 요아리는 스스로의 음악 세계를 ‘아리슬란드’라고 표현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오로라가 펼쳐지는 것 같다. “신비롭고 몽환적인, 하지만 가사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음악을 계속해나가고 싶어요. 제 음악이 비주류로 들릴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새로운 가수가 되고 싶은 마음이에요. 예전에 불렀던 음악으로 채워진 무대가 아니라 지금부터 만든 음악으로 채운 콘서트를 할 수 있길 기다리고 있어요.”

    갈색 니트 톱과 주얼 장식 치마는 미우미우(Miu Miu).

    이소정은 경연하는 내내 너무 많이 운 것 같다며 멋쩍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눈물의 진심이 전해졌기에 가장 큰 응원을 받은 참가자 중 하나였다. 알려졌다시피 이소정은 걸 그룹 레이디스 코드로 데뷔했지만 완전체 활동이 힘들어지면서 설 무대가 줄었다. <보이스 코리아>에도 출연했지만 8년간 매일같이 연습한 음악을 선보일 곳이 없다는 아쉬움, 솔로 가수 이소정으로 설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싱어게인> 무대를 더 간절하게 했다. 그리고 우리가 확인한 건 혼자서도 무대를 채울 수 있는 이소정의 저력이었다. “첫 라운드 때 부른 ‘비상’ 가사를 읽는 순간 일기장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나에게 하는 다짐처럼 느껴져서 제게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매 라운드마다 저에 대한 확신이 조금씩 생겼어요. 혼자 이렇게 자주 무대에 오른 건 처음이에요. ‘솔로로 활동해도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는구나’ 하고 자신감도 얻었어요.”

    음색에서 느껴지듯 이소정은 처음엔 R&B, 소울, 블랙뮤직을 하는 뮤지션이 되고 싶어서 음악을 시작했다. 자신의 노래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에이미 와인하우스를 동경했던 소녀는 이제 어떤 음악이든 다 잘하는 가수가 되고 싶다. “레이디스 코드 활동을 거치면서 해야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괴리도 느꼈지만 결국 그냥 다 잘하는 가수가 되어야겠다고 여겼어요. 한 번의 기회가 절실한데 갑자기 언제 어디서 올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다양한 무기를 준비해놓고 있으려고 해요.” 다음 주 이소정은 <싱어게인> 참가자 중 처음으로 신곡을 발표한다. “제 이름을 TV에서 본 게 10년 만이더라고요. 이소정 세 글자를 보는데 가슴이 정말 벅찼어요. 신곡은 겨울과 잘 어울리는 곡, 많은 분이 좋아해주실 것 같은 대중성 있는 곡입니다.” 이소정은 사람들이 원하는 음악을 하겠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음악이 너무 많지만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냥 연습실에 머물러 있었어요. 이제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음악을 할래요. 그리고 어떤 노래를 하든 제가 하는 말처럼 들렸으면 좋겠어요. 행복한 노래는 행복하게, 위로하고 싶을 때는 또 그렇게요. 제 노래를 듣고 사람들이 공감이 많이 간다고 해주는 가수가 되는 게 꿈이에요.”

    화이트 셔츠와 팬츠, 구두는 프라다(Prada).

    첫 곡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의 강렬함으로 경연 내내 ‘연어형’으로 불린 이정권은 솜씨 좋게 빗어 올린 촉촉한 스타일로 등장했다. <싱어게인> 출연 전 <전국노래자랑> 영상으로 유명했던 그는 당시에도 동일한 곡을 불렀으니 ‘연어형’ 맞다. “강릉에서 대학을 나왔는데 <전국노래자랑>을 한다길래 옳다구나 하고 나갔어요. 대학생 때 교내 가요제에도 많이 나갔거든요. 1등을 하겠다기보다 수업에 빠질 수 있어서 신나서 나갔던 것 같아요(웃음).” 유튜브에서 찾을 수 있는 이정권의 또 다른 흔적은 버스킹 영상이다. 대학생, 사회 초년생 시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 어디서든 친구들과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그의 얼굴은 정말이지 행복해 보인다.

    ‘찐무명’으로 스스로를 소개한 그는 전문 음악인의 길을 걷지 않았다. <싱어게인>에 출연하기 전 회사원이었다. “음악은 선택된 사람들의 영역으로 여겼어요.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그 분야로 취업했거든요. 저는 사실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 듣는 걸 더 좋아했죠. 그래서 공연을 정말 많이 보러 다녔어요. 주위 신경 안 쓰고 자기만의 범주에서 자기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너무 멋있었어요. 그러다가 작은 공연장에서 한 팀을 보기 위해 열 명 남짓 모인 모습을 봤는데 ‘그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음악으로서 존재하는구나’ 싶어 저 역시 그런 바람을 품게 됐어요.” 우연인 듯 필연인 듯 기회는 계속 찾아왔다. <전국노래자랑> 영상 덕분에 팬 카페가 생겼고 이정권은 응원에 보답하고 싶어 일기처럼 쓴 곡 ‘난 (I’m)’, ‘사랑하는, 사랑했던’을 발표했다. “퀄리티를 생각했다면 내지 못했을 거예요. 무엇으로라도 보답하고 싶었고 기록도 하고 싶었어요. 그 시절의 최선이었어요.” 이후 <팬텀싱어> 출연은 음악을 향한 마음을 간절하게 했다. “한 번만 더 노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싱어게인>에 나갔어요. 그리고 확인했죠. 제 삶에 음악이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지, 앞으로 어느 정도 차지할 것인지.” <싱어게인>은 이정권에게 첫 행보다. “많이 배웠고 과분하게 얻기만 했어요. 파이널에서 부른 ‘바람’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바람이 되어 구름이 되어 곁에 있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화창하게 몇 날 며칠을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단비처럼 찾아가기도 하고요. 곁에서 보폭을 맞추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슬리브리스 톱과 가죽 코트는 피터 도(Peter Do).

    또 다른 ‘찐무명’ 이무진에게 가장 청해 듣고 싶었던 얘기는 ‘누구 없소’ 편곡의 비화였다. 어느새 말쑥하게 가죽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의자에 앉은 이무진은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냈다. “처음에 실용음악과 입시를 위해 누구나 알 만한 노래를 나만의 스타일로 바꿔보면 어떨까 하며 추린 곡 중 하나예요. 이 노래가 가사와 멜로디만 있는 상태로 나한테 왔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봤어요. 머릿속에서 원곡을 아예 지워버리고 새로운 라인을 짜고 새로운 리듬을 넣는 식으로 편곡을 진행했어요.” 이무진이 음악을 시작한 계기는 전설의 탄생 같다. “초등학교 때 동네 문화센터에 가서 기타를 배우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왜 기타를 안 가져왔니?’ 하더라고요. ‘학원 가면 문제집 주는데 기타는 안 주나요?’ 하며 그대로 집에 돌아갔어요. 엄마한테 얘기했더니 예전에 아빠가 치던 기타를 주셨어요. 그런데 통기타에서 막 영혼이 느껴지는 거예요. 안 되겠다 싶어 공부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기타를 쳤어요. 방에서 혼자 검색해 멋져 보이는 곡을 치며 연습해왔고 지금의 이무진이 되었네요.”

    싱어송라이터 이무진의 곡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우리가 만날 그의 음악 세계는 새로움의 연속일 것이다. 그동안 작업한 곡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알려달라는 요구에 간략한 소개로 대신했다. “부끄럽지 않게 내놓을 수 있는 곡은 대여섯 곡 있습니다. 방송에서 노란 신호등 같은 가수라고 했는데, 어떤 사물을 보면 감정이입을 하고 스토리를 그려내는 버릇이 있어요. 그 버릇으로 인해 신호등을 바라보면서 느낀 수많은 감정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자기소개였고 또 다른 하나가 그 곡 안에 담겨 있습니다.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는 비밀로 할게요. 노래 진짜 좋아요.”

    무성할 무, 보배 진. 무성한 보배라는 엄청난 이름을 가진 스물한 살 청년은 ‘이야기하는 싱어송라이터’를 꿈꾼다. “노래 안에는 정말이지 수만 가지 요소가 있어요. 그중 스토리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가사가 아니라 가사 밖의 이야기. 예를 들어 마지막 경연에서 부른 ‘골목길’은 어릴 때 유대감을 선물해준 친구가 살던 곳을 12년 후에 다시 찾아갔을 때 그 친구가 없는 상황에서 느낀 쓸쓸함과 박탈감을 표현했어요. 하지만 듣는 이들은 다른 스토리로 느꼈을 수 있잖아요. 제 노래를 듣는 사람이 자신이 살아온 삶에서 이 음악과 관련된 기억을 꺼내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어떤 곡을 만나도 ‘이무진화’시켜버리는 이 활기찬 뮤지션에게 내일부터 어떤 일이 펼쳐질까. “아직 실감이 안 나는데 이제 제가 공인이고 연예인이래요. 내일부터 서막이 오르지 않을까요?” 이무진은 ‘대중적인 음악’을 할 것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도 중요하지만 듣는 이가 적으면 제 행복은 줄거든요. 물론 모두 그런 건 아니에요. 승윤이 형을 보세요. 방구석에서 10년을 버텼어요. 저는 그렇게 못해요(웃음). 사람들이 들어줘야만 아드레날린이 막 분출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늘 만들려고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검정 재킷은 한철리(Hanchul Lee), 데님은 구찌(Gucci).

    “여기 앉으면 되나요?” 찰랑이는 장발의 소유자 정홍일의 나지막한 음성은 대화의 시작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거친 콧수염, 웨이브가 물결치는 장발, 엄청난 성량 등 정통 헤비메탈 가수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순수하고 선량함을 연상시키는 그에게 대중은 ‘선비 메탈’이라는 신조어를 선사했다. 정홍일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 시대 선비 문화보다는 부하를 거느린 장군이 더 록에 가깝지 않을까요. 앞으론 ‘장군 메탈’로 불러줬으면 좋겠군요(웃음).”

    ‘정통 헤비메탈 가수’로 자기소개를 했던 그는 ‘바크하우스’ 멤버로 활동하다 얼마 전 보컬리스트로 독립했다. 1998년 결성된 바크하우스는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헤비메탈 밴드다. “록 음악을 접한 스토리를 들려드리자면 너무 길어요(웃음). 처음에 록 발라드를 들었는데 훅 당겨서 무슨 에너지일까 의문이 들었어요. 그보다 점점 센 음악에 당기는 제 모습을 보며 무대에서 풀어내야 할 에너지가 있구나 싶었죠. 무대에 서고 나면 훈훈함도 남지만 외로움도 많이 느꼈어요. 쓸쓸함, 고통이 다 수반돼 나를 잡고 가는 것 같아요.” 오랜 시간 밴드로 활동하다 독립한 이유는 스스로에게 집중해 정홍일의 음악을 해보고 싶어서다. 그 결과물은 지난해 발표한 솔로 앨범 <숨 쉴 수만 있다면>이다. 앨범은 정홍일의 자작곡으로 채워져 있다. “오롯이 노래로 감정을 전하고 싶었어요. 오래전부터 통기타 하나로 내는 멜로디를 좋아했죠. 타이틀곡 ‘숨 쉴 수만 있다면’에 그런 호흡이 많이 담겨 있어요. ‘나의 것’은 1980~1990년대 록 향수를 같이 느끼기 위한 록 발라드예요. 마지막 트랙 ‘별다를 것 없던 내가’는 제가 가장 편안했던 곡이고요.”

    한때 대중이 사랑하는 음악이었지만 마니아의 음악이 된 메탈을 위해 20년 경력의 로커 정홍일은 생각이 많았다. “‘우리는 정통 메탈을 하지만 멜로디가 좋다. 록을 모르는 사람이 클럽에서 우리 음악을 들었을 때 즐기는 모습을 봤다. 음악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그냥 무대를 보여줘야 한다’고 멤버들에게 말한 적 있어요. 허름한 장비였지만 지역에서 조그맣게 공연을 많이 했어요. 그때 음악을 모르는 아이들까지 방방 뛰는 모습을 보며 나름 희망을 봤어요.” 록 발라드에서 대해서는 기준이 있다. “록 보컬리스트가 발라드를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제 귀에는 그냥 발라드로만 들려요. 저는 좀 거칠더라도 록의 요소가 있어야 해요. 그러다 보면 대중음악이 되지 않을까요.”

    정홍일은 <싱어게인> 콘서트에서 일단 자연스럽고 에너지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자신을 정비할 생각이다. 그렇게 콘서트가 끝나면 조금 더 다양한 뮤지션과 협업할 수 있길 바란다. “록 보컬리스트로 계속 활동할 테지만 장르에 한계를 두고 싶진 않아요. 그러고 보면 트로트와 창 빼고는 다 해본 것 같아요. 국악 전문가들과도 노래해봤거든요. 감정이 느껴지는 음악을 계속하겠지만 저 자신도 놀랄 만한 에너지를 프로듀싱해줄 분도 만나고 싶어요. 그런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싱어게인>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이자 이무진이 인정한 진정한 ‘방구석 음악인’ 이승윤과 마침내 마주 앉았다. 더 이상 그 타이틀은 어울리지 않지만 방구석은 방송에 비친 그 방만 의미하진 않는다. “모든 창작물에는 방구석이라는 요소가 있어요. 자기만의 방에 있던 마음의 문을 열고 바깥에 내보일 때 창작물이 생명을 가진다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제 음악은 방구석적 요소가 있어요.” 또 다른 소개 ‘무명성 지구인’에도 설명이 필요했다. “무명이라는 말에 반발감이 있었어요. 이름이 없는 게 아니라 명성이 없을 뿐이잖아요.” 사실 이승윤은 2020년 12월 31일까지만 음악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생각보다 음악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했고 취미로는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작업 결과는 늘 아쉬웠고 계속 변명해야 하는 상황에 지쳤다. 한 번쯤 최선을 다해 살아봐야겠다는 다짐에 할 수 있는 건 다 투신해보자 했고 <싱어게인>은 그중 하나였다.

    경연 내내 ‘장르가 30호’라는 호평을 얻었지만 이승윤의 음악을 말로 설명하긴 쉽지 않다.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은 록적 요소와 포크적 요소와 팝적 요소와 힙합적 요소를 다 어설프게 가져온 음악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유명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이 아니라 8,000원 내면 여러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동네 한식 뷔페 같은 음악이죠. 최고는 아니지만 이것저것 있습니다.” 2012년부터 활동해왔지만 특정한 곡이 자신을 대표할 순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전부 저다운 곡이었거든요. 모든 곡에 제 파편이 들어 있어요. 가사의 경우 빈정거리는 쪽이라 최근에 낸 ‘영웅 수집가’가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맞닿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할 음악이 아니라고 했던 이승윤이 이 경연의 우승자가 됐다. 변화한 건 그일까, 우리일까. “정말 운이 좋았어요. 저는 한 번도 제 음악이 새롭다고 말한 적 없거든요. 아주 새로운 사람은 아닌데 세계적인 역병이 있었고 공연장에 접근성이 떨어졌고 기성 음악에 반발 작용으로 트로트가 대중화됐어요. 그리고 이제 트로트에 반발 작용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갑자기 신선하게 보이셨을 겁니다(웃음).” 이승윤 역시 기타에 반해 음악을 시작한 록 밴드 키즈다. “고등학교 때 오아시스, 콜드플레이 같은 영국 록 밴드가 정말 멋있었어요. 그분들 노래를 따라 하다 보니 곡이 만들어지더라고요. 그때부터 깨작깨작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기타의 매력으로 이승윤은 두께가 다른 줄이 주는 떨림을 꼽았다. “다른 악기로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나무와 통과 줄이 주는 울림. 따뜻한 그 울림을 좋아해요.”

    피아노를 연주할 때면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내미는 <노다메 칸타빌레>의 노다메처럼 이승윤 역시 무대에만 오르면 특유의 몸짓이 튀어나온다. 정작 본인은 노래를 시작하면 그냥 스위치가 꺼져 무대가 기억이 안 난다며 천재성을 드러내지만 자신의 음악에 대해 이승윤은 냉정한 면이 있다. “정확히 이승윤의 음악으로 주목을 받은 건 아니에요. 제가 고른 곡은 다 명곡이었기에 ‘명곡 버프’를 받았고요. 어쨌든 앞으로도 제 음악을 할 겁니다. ‘거창해지지 말자’가 모토기 때문에 <싱어게인>의 성취를 좇아가다 제 음악 세계를 잃어버리진 않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배운 것들, 저도 몰랐던 것들을 덧붙일 수 있도록 균형을 잘 잡을 겁니다.” 시간, 자금 등 그 어떤 물리적 제약 없이 음악을 만들고 싶다면 어떤 음악을 해보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흥미를 느낀 듯 대답했다. “1990년대 말도 안 되는 웅장한 사운드. 100인조 오케스트라와 60명 중창 합창단이요.(웃음) 지금은 컴퓨터로 쉽게 음악을 만들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자본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음악이었거든요.”

    어느 정도 촬영이 진행되자 스튜디오 곳곳에서는 사인회가 벌어졌다. 참가자들은 사인을 받을 종이를 준비해와 서로의 사인을 받았다. 정홍일은 작정한 듯 아예 두툼한 사인 북을 준비했다. 조카, 친구, 엄마 등 사인을 요구한 주체는 각기 달랐지만 모두 누군가의 팬이었다. (<싱어게인> 톱 6 촬영 소식을 듣고 옆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던 어느 배우도 이곳을 방문했다. “팬이에요”라는 말과 함께!) 경우의 수라도 계산하듯 인증 샷 촬영도 이어졌다. 흥미로워하는 나에게 이승윤은 상황을 설명했다. “일정 기간 투신해보고 그럼에도 좋은 성과를 얻지 못했던 분들이 다시 한번 노래를 부르기 위해 나온 거라 직접적으로 친해지지 않더라도 애초에 존경심이 있었어요. 그리고 서로의 무대를 보며 모두가 모두에게 이입했고요. 실수할 때는 ‘안 돼!’ 좋을 때는 ‘너무 좋아!’ 그러면서 무척 친해졌어요.” 대기 시간이 길어지자 참가자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는데 각자 스마트폰을 하는 듯 보였으나 사실 함께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정홍일에게 곧 이선희 심사위원이 도착할 것이라 말을 건네자 환하고 반가운 얼굴이 됐다. 이선희는 탈락 위기였던 정홍일을 구제한 바 있다. “심사위원분들의 한마디가 다음 라운드를 하게 해주는 힘이 됐어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이선희 선생님한테 제일 감사드려요. 은인이죠, 은인.” 이소정에게도 이선희는 각별하다. 실수하고 눈물을 쏟았던 마지막 생방송. 이소정은 대기실로 이선희 심사위원이 찾아와준 사연을 전했다. “녹화할 때를 제외하고 심사위원님들과 소통할 기회는 전혀 없었어요. 마지막 경연에서 실수하고 많이 울었는데 대기실에 오셔서 ‘트라우마가 안 됐으면 좋겠다. 누구나 그런 실수를 하고 나도 했다. 나중에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담아두지 말고 이겨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매번 속상하고 아픈 제 마음을 같이 느껴주셨죠.” “왜 이제 나온 거예요”라는 심사평 한마디로 이무진에게도 이선희는 또 다른 전설이 됐다.“ 이미 준비된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신 거잖아요. 앞으로 음악을 하면서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그 말씀을 떠올리지 않을까요?” 이승윤도 덧붙였다. “방송하는 내내 ‘저런 분이 선배구나’라는 걸 처음 깨달았어요. 거장은 위에서 판단만 해도 사실 저희는 아무 말 못하는 입장이잖아요. 그런데 조언하실 때 본인의 음악적 고민과 ‘나도 이게 어려워’를 얹어서 말씀하셨죠. 진짜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싱어게인>의 최종 우승자는 이선희 선생님 아닌가요. 6개월 저희의 무대가 무색하게 마지막에 등장하시면 어떡하나요(웃음).” 순위를 집계하는 동안 참가자들과 이선희가 함께 올랐던 공동 무대 얘기다.

    <싱어게인> 톱 6 중 이승윤이 스튜디오에 막 도착했을 때의 모습. 본인의 옷을 입고 가장 내추럴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싱어게인> 톱 6 중 이소정이 스튜디오에 막 도착했을 때의 모습. 본인의 옷을 입고 가장 내추럴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싱어게인> 톱 6 중 이정권이 스튜디오에 막 도착했을 때의 모습. 본인의 옷을 입고 가장 내추럴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싱어게인> 톱 6 중 요아리가 스튜디오에 막 도착했을 때의 모습. 본인의 옷을 입고 가장 내추럴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싱어게인> 톱 6 중 이무진이 스튜디오에 막 도착했을 때의 모습. 본인의 옷을 입고 가장 내추럴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싱어게인> 톱 6 중 정홍일이 스튜디오에 막 도착했을 때의 모습. 본인의 옷을 입고 가장 내추럴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이선희를 알든 모르든 노래만으로 울림을 전하는 최고의 보컬리스트, 37년째 멈춘 적 없는 현직 뮤지션. 어떤 경지에 올랐음에도 세상의 속도에 맞춰 대중을 위해 노래하는 이선희 앞에는 자꾸만 큰 수식을 붙이게 된다. 그저 후배들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사뿐사뿐 걸어 <보그> 카메라 앞에 선 이선희는 금세 참가자들과 어우러졌다. 오늘도 피날레는 이선희일 수밖에 없다.

    화이트 터틀넥과 플리츠 스커트, 레이스업 구두는 프라다(Prada), 검정 슬리브리스 톱은 에몽(Aimons).

    이승기를 발굴했고 <위대한 탄생>에 멘토로 출연하는 등 늘 후배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아오셨습니다. <싱어게인>에는 어떤 마음으로 참여하셨나요. 또 오디션인가 싶기도 했는데 “기회가 없었던 친구들한테 문을 여는 겁니다”라는 말이 확 와닿았어요. 삶도 그런 것 같아요.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 누구나 ‘1인자는 되지 않더라도 자신의 능력은 인정받고 살아야지’ 하며 첫 문을 두드리잖아요. 그런데 기회는 물론 노력할 기회조차 균등하지 않아요. 특히 ‘다시 한번’은 주어지지 않기에 힘이 되면 좋을 것 같았어요.

    카메라 밖에서 ‘많이 배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들었어요. 같이하는 과정에서 공부가 많이 됐어요. 배웠다는 의미가 출연자들과는 다를 거예요. 제 안에 잠자던 부분을 스스로 깨웠어요. 보컬리스트로서 지금까지 내 몸을 어떻게 써서 소리를 내느냐가 중심이었어요. 소리가 나와서 어디에 부딪히냐에 따라 굉장히 달라졌어요. 40대가 되어 조금 더 위로 올려 소리를 내봤는데 맑음이 유지되면서 감성이 달라져 좋았어요. 계속 한 곳만 쓰다 보니까 노후됐구나 싶더군요. 이런 식으로 창법에 변화 없이 소리에 집중했는데 다양한 친구들이 다채롭게 발성하는 모습을 보며 저렇게도 한번 써봐야겠구나 싶었어요. 목엔 좋지 않지만 앞으로 제가 노래를 하면 얼마나 하겠어요(웃음). 그리고 무대에 서는 자세에 대해서도 배웠죠. 무대 퍼포먼스를 더 해봐도 되겠구나 싶었고요.

    춤추는 이선희를 볼 수 있는 건가요! 그런 느낌은 아니에요(웃음). 메탈로 음악을 시작했어요. 그땐 머리도 막 흔들고 무대에서 정말 가만있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당시 TV는 너무 어렵고 큰 존재였어요. TV에서 경직된 채 부르던 그 스타일이 어느 순간부터 굳어져버렸어요. ‘내가 이러지 않았는데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리고 사실 말도 많아졌어요. 원래 인터뷰할 때 별말을 안 했어요. 그러다 보니 머릿속에 있는 언어와 입 밖으로 나오는 언어의 간극이 커졌어요. 어휘를 별로 쓰지 않고 말해도 주변에서 알아서 해주니 점점 말이 단순해졌어요. 20~30년 굳어지니까 머릿속엔 무수한 단어가 있는데 바깥으로 표현되질 않아요. ‘말을 많이 해서 자연스럽게 해야겠구나’ 싶었고요. 그리고 후배 뮤지션들이 나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느끼는데 ‘그럴 필요 없다, 내가 나도 두렵단다’라는 걸 보여줘야겠다 싶기도 했고요. 여러모로 저에게 좋은 시간이었어요.

    오디션이었지만 다른 프로그램과 심사평은 많이 달랐습니다. 무대에 있는 참가자가 앞으로 계속 음악을 해나가리란 믿음을 전제로 꼭 필요한 말씀만 해주시는 인상을 받았어요. 꼰대가 되기 싫어서예요(웃음). 40년 가까이 노래해왔고, 참가자들이 내가 걸어온 길을 걷는데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어요. 이것도 저것도 이야기하고 싶지만 다 접고 딱 하나만 이야기하자 했어요. 어떻게 함축적으로 짧게 이야기할까 고민했죠.

    후배들에 의해 이선희의 음악은 꾸준히 재탄생합니다. <싱어게인> 무대에서도 ‘여우비’, ‘한바탕 웃음으로’, ‘아름다운 강산’ 등이 불렸죠. 무대를 보며 ‘훨씬 잘하네. 역시 젊다는 건 좋은 거구나’ 했어요(웃음). 사실 제 곡뿐 아니라 그 시대에 사랑받은 노래를 리메이크해서 부르기도 했어요. 사실 저는 원곡을 많이 바꾸는 리메이크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나이가 조금 더 들어서인지 지금은 들으면서 정말 좋다고 해요. 원곡이 어떤 향수와 100%로 이해되는 느낌을 준다면, 저 친구들의 노래에서는 그들의 생각이 확실히 보여요. 내가 치우친 감정의 길과 지금 친구들이 자기 감정을 넣어서 부르는 길이 달라요. 길이 다른 게 확실히 느껴져서 좋았어요.

    <싱어게인>은 록, 아카펠라 등 다양한 음악의 존재감을 보여줬습니다. 어떤 장르의 부흥이 간절하신가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음악을 듣고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언제부턴가 한 뮤지션 음악만 쫙 듣는데 내가 좋아하는 ‘원픽’이 있지만 이런 음악 저런 음악으로 리스트가 폭넓어져야 하지 않나 싶어요. 단순하게 음악을 얘기하고 있지만 사회가 이렇게 획일적인 건 문화를 즐기는 우리의 마음이 편협하기 때문이에요. 다 연관되어 있거든요. 음악을 다양하게 듣다 보면 사회를 보는 마음도 확장되지 않을까요. 트로트 못지않게 <싱어게인>의 여러 음악도 사랑받았으면 했어요. 그러다 보니 이 사람 최고야, 저 사람 최고야 하게 되더라고요(웃음).

    평소 화보나 인터뷰를 즐기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오늘 어떤 마음으로 오셨나요. 지난해부터 다양한 경험을 하며 내 삶을 즐기면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바꿨어요. 물론 내 노래를 위해서예요. 그동안 너무 한 감정으로만 외길을 걸었어요. 예전에는 이런 화보 제안이 오면 내가 하고 있는 어떤 것이 깨지는 것 자체가 두렵고 무서웠어요. 사실 깨져도 되는 거였는데 너무 성처럼 쌓아왔다는 후회가 들었어요. 이젠 즐거운 노래, 재미있는 노래도 소화해보고 싶은데 기술적이 아니라 마음이 풍부해져야만 음악이 전달되겠구나 생각이 들어 삶의 태도를 바꿨어요. 여러 경험을 해보고 싶어 제안이 오면 거절하지 않고 합니다. 뭐든(웃음). 낯선 경험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인생의 관점이 달라진 후 첫 시도는 무엇인가요. ‘낯설지만 여행부터 시작해볼까?’ 싶어서 혼자 여행도 가봤어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무작정 가다가 좋으면 멈춰서 하룻밤 새우고 그랬어요. 어떨 때는 돈 내고 호텔에 가서 편하게 자면 될걸, 하며 후회도 했는데 분명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고 두 번 세 번 반복하면서부터 즐거움이 커지더라고요. 캠핑도 해보려고 지난해 8월부터 캠핑카를 알아봤는데 초보자가 겨울에 출발하면 너무 고생스럽대요. 그래서 날이 따뜻해지면 해봐야지, 싶은데 여전히 코로나 상황이군요.

    감정, 감각이 살아나는 걸 느끼세요? 네, 많이 되살아나고 있어요. 못 느껴본 것들을 느끼니까요. 하지만 확실히 몸은 고달파요.

    숲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어요. 숲 마니아였어요. 혼자 있는 것도 좋아했죠. 그런 시간은 충분히 누렸어요.

    지난해 발표한 16집 <안부>는 자작곡으로 채워져 있어요. ‘파격 변신’은 하지 않았어도 이선희라는 큰 틀 안에서 조금씩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변화는 늘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과 맞았죠. 동시대적이면서 클래식하기에 ‘현역 이선희’일 수 있다 싶었습니다. <안부> 앨범을 들으며 지금 이선희가 하고 싶은 이야기구나 생각했어요. 비로소 옛날을 편안하게 바라본다는 인상도 받았고요. 사실 작곡가들로부터 받은 곡은 그분들이 생각하는 이선희에 맞춰져 있어요. 저 역시 그런 점을 잃어버릴 수 없으니 적정선에서 타협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지만 내 안에는 다른 걸 하고 싶은 에너지가 무궁무진했어요. 파격적이고 때로는 힙한 음악을 해보고 싶기도 했는데 의문도 함께 따라왔죠. 똑같이 트렌디한 음악을 한다면 청자 입장에서 10~20대가 하는 음악을 듣지 왜 내 음악을 들어야 할까. 내 나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음악을 하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내 나이에 맞는 음악은 무엇인지 모르겠고 더 어렵기만 해요. 그래도 앞으로 가야 할 길, 내가 생각하는 사랑과 이별은 무엇일까 의문을 갖고 들여다보고 있어요. 제게는 근본적으로 사랑과 별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고요. 아직도 포장일 수 있겠지만 힘듦이나 외로움도 어쩌면 아름다움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가사를 썼어요.

    50대가 되면 이렇게 세상이 보이겠구나 싶었어요. 앨범 <안부>에 반은 따뜻함과 추억을 담았고 반은 슬픔을 담았어요. 이 나이가 되어도 어쩔 수 없는 근본적인 슬픔, 마음을 쏟고 싶은 상대에 대한 그리움,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어요. 사실 어릴 때는 빨리 나이 들고 싶었어요. 일정 나이가 되면 삶에 대해 무뎌지고 내 마음을 잘 다스리며 살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이와 상관없더라고요. 지금 나이에도 복잡 미묘한 감정에서 헤어나오질 못해요. 아직도 철이 없고 보호받고 싶은 마음이 강해요. 더 이상 나이가 들면 통달하겠지 하는 기대는 없어요.

    재킷은 제인송(Jain Song).

    40대를 두고 ‘여러 가지가 담기는 나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거쳐보니 가장 아름다운 나이가 40대예요. 20~30대는 찬란하지만 40대는 봄이에요. <사춘기(四春期)>라는 앨범에 ‘봄 춘’을 쓴 이유예요. 제가 일찍 데뷔했잖아요. 20대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시상식에서 상을 받았을 때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땐 진심이었지만 감사의 의미를 볼 줄은 몰랐어요. 40대가 되니 이 자리에 내가 있기까지 어떠한 사람들이 수고했는지 감사의 대상이 두루두루 보이고 그 무게가 느껴져요. 그런 걸 다 볼 줄 아는 눈이 40대구나라는 생각에 정말 좋은 나이다 싶어요. 그리고 40대까지는 감정이 소요되면 즐거웠는데 50대가 되니까 싫어요. 에너지를 쓰고 나면 그만큼 힘이 빠지거든요. 그래서 감정이 요동치지 않고 고요했으면 하는데 막상 고요하니 감정이 단순해졌어요. 노래할 때는 정말 다양한 감정이 필요해요. 머리로는 알겠는데 소리는 내가 만족할 만큼 나오질 않더라고요. 신이 다 주시진 않구나,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이유가 있구나 싶더라고요. 아직 난 노래를 하고 싶으니 나를 좀 흔들자 싶었어요.

    목소리를 위한 엄격한 자기 관리는 가수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내려옵니다. 식단 관리는 물론 목을 아끼기 위해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셨어요. 노래를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그런 게 강했어요. 어쨌든 지금은 내려놨어요.

    내려놓고 나니 무슨 일이 벌어지던가요. 노래할 때 확실히 목이 금방 잠겨요. 목을 보호한 건 보컬리스트로서는 확실히 맞았다는 생각이 들죠. 결국 선택의 문제예요. 그동안 목소리를 선택했다면 이제는 감정의 다양함을 담기 위한 선택을 하고자 해요. 50대, 60대가 주는 감정은 무엇인지 삶에 대해 조금 더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저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그런 노래를 부르려면 감정이 중요하고요.

    요즘 어떤 곡을 쓰고 계신가요. 어떤 나이가 되면이라고 미룰 게 아니라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받아들이자. 욕심이 있어도 된다고, 이런 게으름도 괜찮다고, 호기심도 괜찮다고 스스로 다 봐주자 그런 느낌의 노래를 쓰고 있어요. 내 마음과 가사가 그렇다 보니 템포도 조금 빨라지네요.

    각자 작업 방식이 다른데 가사가 먼저인가요, 멜로디가 먼저인가요. 동시에 해요. 어떤 글이 떠오르면 리듬이 따라오는 식이에요.

    음악을 만들고 누군가에게 닿기까지 음악의 수많은 과정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아이러니인데 노래를 녹음하러 녹음실 들어갔을 때가 가장 좋아요. 내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내놓는 느낌이에요. 무대에 설 때는 여러 가지 시스템 속에 있고 카메라가 있고 무엇보다 관객이 앞에 있잖아요. 두려움이 있죠. 녹음할 때는 내 이야기만 할 수 있지만 무대에서 노래할 때는 어떻게 들릴까 하는 걱정과 여러 가지 생각이 스멀스멀 나니까 가장 좋은 순간은 역시 녹음실이에요.

    화이트 터틀넥과 플리츠 스커트는 프라다(Prada), 검정 슬리브리스 톱은 에몽(Aimons).

    코로나 이전에는 공연을 많이 찾아다니고 음악 방송도 챙겨 보신다고 들었습니다. 요즘에는 공연이 없어서 음악을 많이 못 들었어요. 저는 못하는 사람이 하는 공연이면 못하는 걸 봐서 도움이 되고, 잘하는 사람이 하는 공연은 잘했기 때문에 욕심이 생겨요. 무엇이 됐든 장르를 가리지 않아요. 최근 4~5년 사이에 만화를 안 봐서 몰아서 봐야지 생각하고 있어요.

    명랑 만화 캐릭터이시긴 합니다(웃음). 만화광이었어요. 무협지도 좋아했고요. 한 번에 다 읽어야 하는 성미라 연재 중인 만화는 보지 않아요. 어릴 때 제일 좋아한 작가는 황미나였어요. 결국 손에 잡는 건 순정 만화더라고요.

    동그란 안경, 데님 팬츠, 때로는 오버사이즈 수트는 이선희의 시그니처 룩으로 유명했어요. 흥미롭게도 요즘 10~20대가 가장 선호하는 룩입니다. 당시 메이크업을 하고 스커트를 입으라는 요구를 거부한 일화도 유명해요. ‘나는 난데 왜 그렇게 똑같이 해야 하지?’였어요. 여자니까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해야 한다고 하니 따르고 싶지 않았어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내 걸 지키고 싶었어요. 그래서 사실 힘들고 고달팠죠. 지금은 별일 아닌데 당시엔 문제가 많이 됐어요. 여자가 안경을 낀다는 것도, 큰 시상식에서 드레스 대신 바지를 입는 것도 문제였죠.

    2018년 임현주 아나운서가 뉴스에서 처음으로 안경을 낀 일화가 떠오릅니다. 그 전까지 여자 아나운서는 안경을 끼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더군요. 요즘은 어떤 스타일을 즐겨 입으시나요. 아이러니하게도 요즘엔 치마가 입고 싶어요(웃음). 그때는 바지가 좋았고 특히 청바지가 너무 좋았어요. 이젠 외출할 때 가끔 치마를 입는데 치마가 주는 살랑살랑함이 좋구나 해요. 뭔가 여성스럽게 해주는 기분도 있어서 그걸 취하고 싶을 때 치마를 입고 살랑살랑하면서 다녀요.

    요즘 하루 일과를 말씀해주세요. 얼마 전에 이사했어요. 하루 일과가 페인트칠이에요. 천장 칠하다가 거북목 되는 줄 알았어요(웃음). 늘 다른 사람에게 맡기다가 천천히 공을 들여 무엇을 해보면 애정이 깊어지지 않을까 해서 시작했는데 이렇게 힘든 거였구나 해요. 제부가 그러더라고요. “처형, 2년간 열심히 집 고치고 나면 이사하는 거예요. 애정이 이만해졌을 때 떠나는 거예요. 법이 그래요(웃음).”

    공연의 빈자리를 페인트칠이 채우고 있군요!(웃음) 그러고 있네요. 날씨 풀리면 화훼 단지에 가려고요.

    재킷과 팬츠는 제인송(Jain Song), 화이트 부츠는 레이첼 콕스(Rachel Cox).

      피처 에디터
      조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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