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새로운 기준
세상을 달리 보기 시작한 후 연애에 새로운 기준이 생겼다. 안전하고 자유로운 오늘의 연애를 위하여.
오랜만에 펼친 남성 잡지에서 읽은 기사 제목은 이렇다. ‘비대면 시대 비대면 연애’, ‘마스크 끼고 섹스하기’. 인스타그램 ‘무물’ 기능으로 상대의 관심 정도를 추측하는 방법부터 거친 들숨 날숨에도 얼굴에 들러붙지 않는 마스크 추천까지 가히 엄청난 열정이 돋보였다. 같은 날 인터넷 뉴스에서는 평범한 데이트가 그립다는 한 여자 작가의 토로를 읽었다. 코로나로 남자 소개 받기가 힘들어져서 소개팅 앱을 이용했는데 죄다 섹스하자는 상대뿐이었다는 사연이었다.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우편배달부가 없으면 비둘기를 띄우며 지구촌 모두가 최선을 다해 연애를 갈구한다. 코로나는 연애하는 방식에 깊이 침투해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방식에 변화가 일어난 건 그보다 조금 더 이전이다.
사고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가치관의 변화는 입체적으로 그리고 서서히 찾아온다. 그런데 2010년대 중반 여성 혐오 살인 사건, 데이트 폭력 사건, 미투 운동 등으로 촉발된 페미니즘은 머릿속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지금도 신기하다. 어떻게 어제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누군가의 말이,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사건이 오늘부터 다르게 보일 수 있었던 건지. 가려진 진실이 보이는 첨단 안경을 쓴 것 같았고, 머릿속에 새로운 칩을 심은 것만 같았다.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줄 알았던 고통이 사실은 사회 구조로 인해 발생한 것이고 이는 나만의 고통이 아니었다는 진실이 가지는 힘은 그토록 강렬했다. 세상을 보는 방식의 변화는 구석구석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사람과 관계, 그중에서도 연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그동안의 연애를 돌아봤다. 다른 남자가 쳐다보면 안 된다며 들었던 옷차림 간섭, 걱정을 앞세운 귀가 시간 통제, 연락이 되지 않을 때 걸려온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 상대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응했던 스킨십과 섹스. 사랑이라 여기며 참았던 일들은 일종의 데이트 폭력이자 독점 연애였으며 여자를 소유물로 여기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오빠가…’로 시작되는 대화는 상대를 동등하게 여기지 않아서 나오는 말이었다. 사귀는 상대가 뭐든 가르치려 할 때 느낀 불편함은 예민함이 아니었다. 평소 소비하는 콘텐츠, 동성 사이에 있을 때 대화 등은 성 인지 감수성을 드러내는 척도였다. 관계 속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인지할 수 있게 된 건 놀라운 성과였다. 한동안 머릿속은 이렇게 이론으로 생생했지만, 막상 실제 상대를 만나면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 시기 주변 친구들은 하나같이 연애에 실패하고 있었다. 소개팅 앱으로 만남을 시도하던 후배는 번번이 초면에 싸우고 돌아오곤 했다. 여성 비하로 논란이 된 웹툰, 신입 사원 남녀 채용 비율 등에 대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해서였다. 모든 문장이 ‘남자는’, ‘여자는’으로 시작했던 남자와 만남을 최악으로 꼽으면서. 당시 <썅년의 미학> 작가 민서영은 페미니즘에 눈뜬 시기와 섹스 소강기가 일치한다는 얘길 들려줬다. 불법 촬영과 ‘스텔싱’에 대한 걱정이 몰입을 방해했지만 결국 스스로 즐거운 섹스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는 통찰도 함께였다.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 연애’에 대한 반발이 커지며 다양한 연애 형태가 알려졌고, 남성을 대상화하는 왜곡된 연애가 환상처럼 퍼지기도 했다. 비연애에서 답을 찾는 경우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반면 연애를 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친밀한 관계가 주는 온기에 대한 욕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몸과 마음을 포개서 서로에게 선사하는 평온함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타인에게 받는 자극과 다름으로 인한 성장의 짜릿함 역시 못내 아쉬웠다. 첫사랑이 갑자기 페미니스트가 되어 나타났다는 설정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소설 <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 저자 민지형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로 꼽은 건 역설적이게도 ‘연애하고 싶은 답답함’이었다. 애정 나누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만날 남자가 없었다는 작가의 인터뷰는 페미니즘이 연애와 대척점에 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었다. 사실 연애는 죄가 없었다. 불평등한 관계가 한쪽을 갉아먹고 있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연애가 주는 충만함에 대해, 무조건적 지지에 대해, 낯설게 만나 유사성을 발견하는 환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 그저 연애를 하고 싶다는 ‘욕구’와 상대에게 어필하는 ‘기술’만 지닌 채 상대를 찾고 헤맸다. 오렐리아 블랑은 저서 <나의 아들은 페미니스트로 자랄 것이다>에서 남자아이는 사랑은 여자아이들이나 하는 거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받는다고 지적한다. 감성적인 면을 드러내지 않도록 교육받고 영화, 문학, TV 쇼는 타고난 유혹자, 바람둥이로 남자를 비춘다.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 채 커버린 그들은 마음을 나누는 일에 서툴다. 그들에게 가해진 것 역시 성별에 갇힌 압박이었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자유롭고 행복한 연애를 위해 우리 모두가 사전에 던졌어야 할 질문에 가깝다. 그 질문을 통해 우리는 엉켜버린 연애를 해체해서 다시 한 올씩 뜨는 과정에 있다.
지금까지 ‘과거형’으로 썼지만 ‘그리하여 페미니즘으로 연애는 멸종을 맞이했습니다’ 같은 결말에 이르지 않았다. 개안한 눈으로 우리는 오늘의 연애를 한다. ‘소개팅 파이터’였던 후배는 연애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진 않았다고 말한다. “여전히 서로가 1순위인 따뜻한 관계를 갈망하고 있어요. 다만 상대를 만날 때 저만의 기준이 생겼어요. 어떤 사람과 계속 만날지, 그만둘지에 대한 기준이요. 페미니즘을 만나서 미래의 불행을 미리 차단했다고 생각해요. 가치관이 맞지 않으면 계속 갈등을 빚을 테니까요.” 민서영은 오히려 치열한 연애 후일담을 담은 산문집 <망하고 망해도 또 연애>를 새로 펴냈다. “연애를 ‘안’ 한 지 좀 됐다”는 작가는 자신을 상처 입히는 사람을 곁에 두는 걸 그만뒀다고 했다. “예전에는 불만이 있거나 내키지 않아도 확실히 ‘노’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냥 속으로 삭이곤 했어요. 계속 사랑받고 싶었으니까요.” 외로움을 직면하기 싫어서 끊임없이 외부로 시선을 돌렸던 마음의 실체에 대해서도 전했다. “사랑받는 자체보다 사랑받는 느낌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아요. 이 사회에서 여자로 산다는 건 실체가 없는 거대한 허무와 싸우는 일이거든요. 자신의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긍정해주는 누군가를 필요로 해요. 그러다 보니 아무 기준 없이 누군가를 찾고 끊임없이 ‘망한 연애’를 반복하는 게 아닐까요. 사실은 다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고 싶을 뿐이에요. 제 안의 결핍을 인정하고 나니 조금 여유로워졌어요.”
연애란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체험이라는 관점을 좋아한다. 그 사람 속까지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로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건 결국 사랑뿐인 것 같아서다. 하지만 건강한 관계는 결국 나 스스로 똑바로 서 있을 때 완성된다. 한국 사회에서 사랑과 연애를 둘러싼 맥락과 모순을 짚은 책 <이토록 두려운 사랑>에서 ‘남자와 과연 연애가 가능할까요?’라는 질문에 김신현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성에 대해 배우고 더 알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더 나은 상대를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서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독립적이면서 성찰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 연애에서도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겠지요. 여성 혹은 남성으로서 이 사회에서 어떤 여성성과 남성성을 습득해왔고 때로 저항해왔으며 그 결과 친밀한 관계에서 무엇을 원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알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2010년대 중반 번개처럼 찾아왔던 변화는 ‘내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라는 계시였다. 이제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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