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이자 직업인인 우리의 삶
엄마이자 직업인인 우리 삶에도 트로피를 건넬 날이 온다!
2021 오스카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의 소감은 분절마다 좋지 않은 구석이 없었지만 일하는 엄마로서 정체성을 드러낸 부분이 특히 좋았다. 그녀는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를 일하게 만든,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들들아. 이 상은 너희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다.” 나는 ‘엄마가 만날 나가서 뭐 하는지 궁금했지? 옜다, 오.스.카. 트로피’ 하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 트로피를 건네는 그녀를 상상하며 <미나리>로 아름답게 물든 밤 내내 키득거렸다.
미국 <보그>는 다음 날 웹사이트에 ‘엄마들은 어떻게 2021 오스카에서 이겼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물론 윤여정의 수상을 가장 감동적인 순간으로 꼽았다. 그리고 둘째를 임신 중인 에메랄드 페넬이 무대에 올라 “여성들은 임신 7개월일 때 영화를 제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을 많이 합니다. 그런 경험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습니다’”라고 한 소감에 경의를 표했다. <보그>는 “윤여정이나 에메랄드 페넬 같은 여성이 어머니로서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고 연예계에서 획기적인 기록을 세우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고 짚으며 “워킹맘을 차별하고 체계적으로 저평가하는 산업에서 좀처럼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매우 즐거운 밤이었다”고 기사를 마무리했다.
윤여정과 에메랄드 페넬의 성취는 우리 각자가 처한 입장에서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워킹맘인 내 눈에는 “엄마로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고 커리어에서 성취를 이뤄냈다”는 대목이 가슴 벅차게 다가온다. 이 문장에 ‘엄마이면서 동시에 직업인으로 성취를 이루긴 어렵다’는 전제가 선명하게 보여서다. ‘워킹맘’이라는 숨차는 합성어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직업인과 엄마는 공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 여겨져왔다(그러고 보면 ‘워킹 데드(Walking Dead)’는 존재할지언정 ‘워킹 대드(Working Dad)’란 말은 없다. ‘산송장’ 같은 의미가 안 어울리진 않는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지상 최대의 과제를 시작하기도 전에 맞닥뜨리는 정체성의 문제다.
엄마가 된다는 건 a에서 b가 아니라 A로의 변화에 가깝다는 책 <자아, 예술가, 엄마 Selfhood, Artisthood, Motherhood> 속 비유에 동의한다. 아이를 낳아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온몸이 홍해처럼 갈라지는 고통을 거쳐 한 인간을 세상에 내보낸 뒤에도 나라는 존재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자본주의자가 공산주의자가 된다거나 MBTI가 E로 시작하던 사람이 I로 바뀌는 성격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이 작은 인간을 어떻게 자기 몫을 해내도록 키워야 하나 하는 책임감 정도가 싹트기 시작한다. 에디터로 일하는 가운데 출산을 맞이했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나는 10여 년 경력을 쌓은 에디터였다. 하지만 아기를 낳은 후 세상은 A를 두고 b라고 불렀다.
엄마가 된 후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은 단연 “애는 누가 봐?”다. 정해진 퇴근 시간을 넘기고 업무에 집중하고 있을 때도, 집을 떠나 출장을 가도, 저녁 술자리에 가도 사람들은 “애는 누가 봐?” 하며 엄마의 역할을 다그친다. 반대 상황도 동시에 일어난다. 칼퇴근을 하거나, 저녁 약속을 거부하면 사람들은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역시 엄마라 가정이 더 중요하네”라며 직업인으로서 열정을 다그친다. ‘가정에 충실해서 회사에 민폐를 끼치는 직원’ 혹은 ‘회사에 충실해서 가정을 희생시키는 엄마’ 두 박스 중 하나에 분류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아이가 있는데 어떻게 기자 일을 하냐’며 대단하다고 했다. 주변의 이런 반응은 늘 ‘무리하고 있다’,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엄마’와 ‘직업인’은 아무리 붙이려고 해도 반대 방향으로 나가떨어지는 자석을 떠올리게 한다. N과 S가 한 몸에 있는 현재를 부정당하는 정말 희한한 감각이다.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엄마를 ‘자신을 희생해서 자식을 돌보는 신성적 존재’로 여기니 직업인은 그 반대편 어딘가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외부 시선이 아니더라도 엄마와 직업인의 정체성은 내면에서 끊임없이 충돌한다. 그 혼돈의 카오스 가운데 확실히 느끼는 건 둘은 나뉠 수도 없고 ‘부캐’처럼 필요에 따라 꺼내 쓸 수도 없다는 점이다. 사회뿐 아니라 당사자인 우리에게도 과정과 상태에 대한 이해가 없다. 문화예술 기획자 김다은은 왜 예술계에 ‘엄마됨’이 보이지 않는가? 허기진 질문을 안고 11명의 이야기를 들어 책 <자아, 예술가, 엄마 Selfhood, Artisthood, Motherhood>를 펴냈다. 그녀는 어머니인 상태를 ‘Motherhood’로 바라본다. ‘엄마 예술가’로 일반화하지도 않는다. 엄마인 상태에 있는 예술가로 보며 삶 속에서 여성과 예술 그리고 각자의 ‘엄마됨’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로 본다. 인터뷰이 중 헤셀홀트 & 마일방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성 예술가는 커리어와 아이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는 단언을 항상 들으며 살았다고. 이런 이유로 많은 예술가들이 엄마를 작품 주제로 다루지 않고 엄마임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헤셀홀트 & 마일방은 일부러 사람들이 남성으로 여길 법한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다른 결론은 ‘엄마됨’을 배제하고는 정체성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인터뷰이 헬렌 뉘복 베이는 그대로의 자신을 향한 열망,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는 엄마의 책무 앞에서 솔직해야 한다고 말한다. 외롭지만 한편 새로운 빛을 보며 이들은 모두 ‘길 위에서’ 있었다.
요즘 나는 ‘일이란 무엇인가?’ 계속 질문을 던진다. ‘엄마의 정체성이 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반대로 ‘직업인으로서 정체성이 엄마 역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함께 돌아본다. 나는 늘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일은 사회에서 독립적인 주체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활동이었다. 그리고 일은 어느 방향으로든 계속 나아지고자 하는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직업인으로서 나는 엄마라는 정체성이 생기기 전, 내가 선택한 나였다. 엄마가 되었다고 해서 지워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가 되는 순간 예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직업인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는 내면의 불화가 됐지만 나를 좀 더 솔직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했다. 사실 생의 주기에서 언젠가 맞닥뜨려야 할 순간이기도 했다. 엄마가 되어 넓어진 세상과 다면화된 감정의 크기를 이제는 흔쾌히 바라보고자 한다.
네덜란드에서 활동 중인 아티스트 실라 클레냔스키(Csilla Klenyánszki)의 작품 ‘집 속의 기둥들(Pillars of Home)’은 “엄마이자 예술가로서 삶의 균형을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98개의 답이다. 실라는 아이가 자는 30분 동안 거실, 주방, 침실 등 집 안을 작업실 삼아 ‘기둥’을 하나씩 총 98개 만들었다. 물건으로 이루어진 기둥은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면서도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실라는 작가 노트에 적었다. 이 기둥은 언제고 무너질 수 있다고. “작업이 무너지면 시각적으로만 위험한 것이 아니라 오브제가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로 인해 아기가 깨어나며 나의 작업 시간도 그렇게 끝이 나는 것이다.” ‘끝없는 곡예’는 실라가 겪는 과정이자 우리의 현재다. 하지만 집 안을 지탱하는 기둥에서 찰나처럼 보이는 건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찾아온 아름다움이다. 종국에는 삶을 빛낼 아름다움. 일단 그렇게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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