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의 재테크 반성문
금융 위기, 사회 초년생, 코로나 불황까지, 시대를 통과하고서야 보인 돈이 가는 방향. 놓친 황금빛 기회와 두루뭉술 넘긴 위기를 돌아보며 회한과 탄식에 젖어 적어 내려간 세 사람의 재테크 반성문. 소비에 인색했던 지난날, 돈을 몰랐던 지난날, 빚을 두려워했던 지난날, 모두 지난 일.
우아한 가난 같은 건 없다
“그런 물건 그만 봐라. 삶은 잡지가 아니야.” 15년 전쯤 아는 형이 말했다. 한국에 출시되지 않은 고가 휴대전화를 보고 있을 때 들었던 말 같다. 그때부터 잡지 에디터를 하고 싶었으니 그런 물건을 보는 것도 공부라고 생각했다.
나는 물건에 관심이 있었고 돈에는 관심이 없었다. 잡지 에디터를 지망한 이유 중 하나였다. 갖고 싶은 물건보다 궁금한 물건이 훨씬 많았다. 갖고 싶은 것들은 별로 비싸지 않아 큰돈 없이도 살 수 있었다. 거기 더해 자본주의 사회를 뒤덮은 무한 상승의 정서도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큰 소리로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나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적게 벌고 적게 써야지. 그래서 거리낌 없이 잡지사 에디터라는 걸 할 수 있었다. 잡지 에디터의 일이 무엇이고 이 직업의 미래가 어떤지는 몰랐지만 이 일이 큰돈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알았다. 상관없었다. 돈에 욕심이 없었으니까. 나는 애초부터 돈으로 할 수 있는 활동에 관심이 있었다.
1,600만원. 돈은 없지만 호기롭던 내가 처음 들어간 잡지사 연봉이었다. 연봉 1,600만원에 개의치 않은 건 잡지에 열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상 물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4대 보험료를 떼면 한 달 실수령액은 109만원인가 103만원쯤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첫 월급의 실수령액이 얼마인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현실감각이 없었다. 부모님 댁에 얹혀살았으니 가능했던 사치스러운 선택이었다.
세상의 모든 저렴한 가격에는 이유가 있고 그건 인건비도 마찬가지다. 첫 직장에서는 차마 여기 다 적지 못할 여러 일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임금 체불이었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당시 대표님을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 임금 체불은 곤란한 일이었다. 비유하자면, 얼마 안 되는 옷가지 전부를 코인 세탁기에 넣었는데 세탁기가 열리지 않고 고장 나버린 것과 비슷했다.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신세를 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첫 직장을 옮겨서도 에디터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직 정신은 차리지 못했다. 서른 살이 될 때쯤 처음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딱 월급만큼의 월 한도를 정해두고, 월급 이상으로 한도를 늘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할부를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나를 별로 믿지 않고, 특히 재정 면에서 나에 대한 신뢰는 전혀 없었다. 딱 번 만큼만 쓰는 동안 천만다행으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어른들은 알다시피 살다 보면 급전이 필요한 경우가 오고, 그렇게 보면 그때의 나는 굉장히 위태로웠다. 다만 위태한 줄 모르고 나태하던 그때는 좋은 일도 없었다. 마감의 자극을 빼면 매사 지루했고, 동시에 불안했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뭔가 샀다. 잡지 일을 하면 사고 싶은 물건은 늘 있다. 마감이 끝나고 나면 전 세계에서 택배가 와 있었다. 그때 누군가 어떻게 살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나는 “계속 도망 다니고 싶다”고 답했다.
몇 년 후 더 이상 도망갈 수 없구나 싶은 순간이 왔다. 몇 군데 전전하던 잡지사를 모두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가지려 했다가 그 일도 그만두었을 때였다. 처음으로 특정 회사에 소속되지 않고 건강보험 지역 가입자가 되었다. 아침마다 동네 도서관으로 출근하며 무기명 프리랜서 원고를 작성하고 어디의 뉘신지도 모르는 클라이언트의 모호한 지시 사항을 받았다. “문장이 뚝뚝 끊어져서 고쳐달래요” 같은 수정 사항을 보고 ‘그럼 문장이 끊어져야지 안 끊어질 수는 없는데 어떻게 고치나’ 같은 고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도망만 다니다가 구덩이에 빠진 것 같았다.
돈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잠깐 한 이유는, 그때 나를 지탱한 게 의외로 저축이었기 때문이었다. 잡지 일을 그만두고 다른 회사에 다닐 때 내 이름이 나온 뭔가가 없다는 사실이 허무했다. 내 모든 경력을 버리고 다른 곳에 왔으니 돈이라도 모으자 싶어 당시 월급의 80%를 저축했다. 그렇게 넉 달을 하고 그만두니 1,000만원이 모여 있었다. 살면서 처음 만들어본 목돈이었다. 그 돈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너는 당장 망하지 않는다’는 금융 당국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그 선언을 계속 듣고 싶었다. 프리랜서로 일할 때도 어떻게든 돈을 끌어모아 적금을 들었다. 그렇게 적게 벌고 적게 쓰며 물건 구경이나 하자고 생각하던 내가 생활인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담배를 끊고 저축을 하고 일을 아주 열심히 했다. 언젠가부터는 늘 일이 목구멍 끝까지 차 있는 것 같았다. 회사 일, 외부 원고, 기억나거나 기억나지 않는 많은 일을, 돈이 되든 안 되든 거의 무조건 했다. 돈이 조금씩 모이자 신기한 일이 생겼다.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아직도 왜인지 잘 모르겠다. 약간의 저축 덕에 마음이 편안해진 걸까, 아니면 내가 조금 성숙해졌거나 호르몬 분비량이 달라져 조금 덜 불안해진 걸까? 여기서 저축이 내 정신 상태에 미친 영향을 확실히 알아보려면 저축한 돈을 다 써버리면 될 텐데, 이제 나는 그럴 용기가 없다. 나는 여전히 온갖 쓸데없는 소비를 하지만, 여전히 일종의 정신 보호 목적으로 약간의 돈을 저축하고 있다.
한창 도망 다니고 싶던 마음으로 살던 때에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을 읽었다. 그 책은 나의 한때에 큰 영향을 미친 책 중 하나였다. 나의 저소득, 저소비 생활의 사상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우아하게 가난하게 살면 되니까.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에는 분명히 교훈적인 부분이 있다. 그것은 품위 있는 태도의 중요성이다. ‘품위 있는 태도를 가진다면 세속의 가난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받아들인 이 책의 주제다. 품위 있는 태도란 다름 아닌 당당함이다. 책에 나온 말을 빌리면 “불쾌한 일을 겪고도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걷는 자존심” 말이다. 그러니 ‘우아한 가난’ 같은 말은 함부로 주워섬길 게 아니다. 일단 불쾌함 앞에서 품위를 갖기부터 쉽지 않다. 지금 현대 한국이 조금이라도 불쾌한 일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는 인터넷의 각종 ‘저격 글’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울러 우아한 가난은 저축 없이 수준에 안 맞는 사치품을 사대는 것 따위가 아니다.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는 책 안에서 분명히 이야기한다. “사치품이라고 선전되는 대부분의 물건들이 상당히 저속하고 짐스러울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아울러 ‘가난’이란 단어 자체를 조심해서 쓸 필요가 있다. 점차 양극화가 심해지며 정말 장난이 아닌 가난을 접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기 때문이다.
잡지를 비롯한 이쪽 업계엔 돈 같은 거 상관없다는 자세로 사는 쿨한 사람이 몇 있다. 나이가 조금씩 들다 보니 그분들의 쿨한 뒷배를 조금씩 알게 됐다. 세상엔 품위 유지비라는 게 있고 쿨에도 쿨 유지비라고 할 만한 ‘쿨값’이 있다. 버는 돈 없이 쿨한 사람 곁에는 돈이 있는 보호자가 있거나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내는 방책이 있었다. 보호자도 없고 돈을 만들어내는 묘안도 없는 1인 가구의 가장인 나는 내가 착실히 벌어 나를 보호해야 했다. 지금의 나는 도망만 다니고 싶던 때를 지나 한 바퀴 돌아 다시 어른의 문 앞으로 온 듯하다. 그런 나는 어릴 때의 나라면 생각하지 못했을 착실한 삶을 산다. 수입의 일정 부분은 반드시 저축한다.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정도의 주식투자에도 관심을 가져볼까 한다. 주식에는 도박적인 면이 있지만 삶의 모든 선택에는 도박적인 면이 있으며 주식은 그래도 역사가 오래된 도박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해외 무역을 다니던 17세기에 근대의 주식거래라는 개념이 생겼다. 역사가 로데베이크 페트람의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그때 암스테르담의 평범한 가정부도 자산 증식을 위해 주식을 샀다. 이 책을 읽은 후 21세기 서울의 평범한 생활인인 내가 주식을 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말을 요약하면 ‘적당히 현실적일 필요가 있겠다’ 정도가 되겠다. 나는 한국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에디터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밥 안 사기로 유명한 선배’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다. 그러려면 내가 생산할 수 있는 상품과 그 상품의 가격과 그로 인해 생길 가치를 내가 잘 관리할 수밖에. 그래서 초면의 에디터께서 이 원고를 청탁하셨을 때 나는 용기 내어 공손히 고료를 여쭈었다. 10여 년 전 그 형이 해준 말처럼, 삶은 잡지가 아니니까. —박찬용(칼럼니스트)
견제와 균형
나는 늘 돈 관리를 잘해왔다. 여덟 살 때 엄마 손에 이끌려 간 은행에서 생애 첫 계좌를 개설했다. 그리고 스물일곱 살, 생애 첫 신용카드(당연히, 포인트 쌓이는 것)를 만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신용카드를 절제하며 사용하고 있고, 매달 연체 없이 카드 대금을 잘 납부하고 있다.
자랑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다. 돈 관리를 잘하고 있어도 오히려 돈에 대해 거의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돈과 우리의 정서적 관계가 얼마나 비논리적이며 모순적인지 말하기 위해서이다. 상당히 최근까지, 돈 혹은 돈 걱정은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쳤다. 인간관계 혹은 직업적인 관계를 비롯한 그 어떤 관계보다 돈이 내 20대를 본질적으로 특징지었다. 故 로저 에버트(Roger Ebert)의 표현을 빌리자면, 돈은 내 인생의 중요한 실상이었다.
내가 돈에 노이로제를 갖게 된 것은 어린 시절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각박한 사회에서 생활하고 세계에서 가장 물가 비싼 도시 중 하나인 런던에서 임대료를 내며 생겨난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나는 사회인이 되었다. 당시 무보수 인턴 자리를 제외하고 대학 졸업생이 구할 수 있는 직장이 거의 없었다. 신문이 이 절망적인 ‘잃어버린 세대’에 대한 운명을 헤드라인으로 끊임없이 대서특필하던 기억이 난다. 졸업생 실업률이 급증했고, 나 또한 직장에서 발판을 마련해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때로부터 12년이 흐르고 1년간 팬데믹까지 겪은 2020년 졸업생들도 그때와 비슷한 헤드라인을 직면하고 있다. 졸업 후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학자금 대출이 많이 남아 있다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할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 나는 30대에 접어들면서, 앞서 겪은 10년간의 재정적 ‘업 앤 다운’을 통해 배운 것 그리고 절대 하지 말아야 했거나 다르게 해야 했던 것이 무엇인지 깊이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너무나 놀랍게도 내가 저축을 지나치게 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저축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흔치 않은 ‘위업’인 ‘런던에서 아파트 매입하기’를 최근 달성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아주 작은 기쁨조차 나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은 채 20대의 대부분을 보냈다는 것이 살짝 후회된다. 심지어 왕복 기차 요금 30파운드가 너무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바람에 친구의 스물여덟 번째 생일 파티에 가지 않았다. 그 일은 아직도 떠올리기 싫다. (특히 더 후회스러운 것은 “아파서 못 간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가끔 그런 금욕적 생활은 거의 자학하는 수준이었고, 굉장히 불필요할 정도로 나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기도 했다. 지나고 나서 보니, 연휴에 멕시코 툴룸 같은 곳으로 여행을 가거나 비욘세 콘서트 같은 문화생활을 즐기며 살았어야 했다. 매달 저축액이 줄어들어도 말이다. 인생살이는 힘겹고 길다. 그런 인생을 이겨내려면 가끔씩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
동시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모든 것은 가짜다!’ 그곳에 올라온 몸매도 가짜이며, 백옥 같은 피부도 그렇다. 그리고 부러울 정도로 멋진 옷과 맞춤형 부엌도 그렇다. 그 자체로 가짜는 아니겠지만 ‘내돈내산’ 이 아니라 ‘#협찬’일 것이다. 자신의 소비 혹은 열망이 인스타그램의 영향을 받게 내버려두는 것은 정말 바보스러운 짓이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지난겨울 소셜 미디어에서 체크무늬 인조 모피 코트를 봤다. 몇 달 후 유혹에 넘어가 결국 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배송된 옷을 보는 순간 내 옷과 전혀 어울리지 않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을 모방하려고 애쓰다 보면 지갑만 가벼워질 뿐이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을 시각적 무드보드 정도로 삼아야 한다. 굉장히 정교한 광고 정도로만 여겨야지, 실제와 혼돈하면 절대 안 된다.
그렇지만 때로 비교하는 문화가 아픈 곳을 조금 더 찌를 수 있다. 20대가 되면 몇몇 친구가 당신보다 돈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기 마련이다. 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언하고 싶다. 당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잘 투영시켜주는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친구들을 사귀길! 경제적 차이를 극복하고 우정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실제로 그런 친구들이 있고, 굉장히 잘 지내고 있다), 터무니없는 임대료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욕하고 싶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런던에서 집을 임대한다는 것은 내 20대 시절 가장 힘든 부분 중 하나였다. 예상치 못한 임대료 인상에 따른 충격, 집주인이 늑장 부리며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던 일 등 집 없는 서러움 때문에 나는 뜨거운 좌절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내가 빌린 집을 조금 더 아늑하게 꾸미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빌어먹을 보증금만 아니었더라도 가능했을 텐데. 내게는 항상 그런 마음이 있었다. 빌린 집은 그저 임시 거처에 불과했고, 그런 집을 단장하는 데 시간이나 돈을 투자하는 것을 쓸모없는 일로 여겼다. 하지만 사실 그러한 변화는 나 자신의 행복에 투자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 당신에게 영향을 주지는 못하지만 명망 높거나 보수가 높은 일을 할 것인가’ 혹은 ‘굉장히 흥미롭지만 보수가 다소 적은 일을 할 것인가’ 하는 직업의 딜레마에서 다양한 변수를 맞닥트릴 수도 있다. 나는 언제나처럼 후자를 택하라고 조언한다. 나는 ‘대학 졸업 후 뛰어든 보수 높은 안정적인 커리어를 지속할까’ 아니면 ‘늘 꿈꿔왔지만 쥐꼬리만 한 벌이로 유명한 커리어 (나에게는 저널리즘이었다)에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들까’를 고민하며 20대의 절반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적으로 도약한 후 얻은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과감히 커리어를 바꾸면서 나는 ‘자신이 원하던 곳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다면, 지금 있는 곳에서 빨리 빠져나올수록 좋다’는 것을 배웠다. 원하지도 않는 경쟁의 사다리에 오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몇 주 전 나는 아파트 가스 누출로 기술자를 불렀다. 수리비 600파운드를 청구했다. 헉! 그 비용을 지불하면서, 그 돈으로 살 수 있었던 것들이 생각났다. 마르니 로퍼와 만날 날을 속절없이 미루게 된 것이다. 그런데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문자로 전하다 보니, 그 돈을 쓰면서 20대 시절처럼 공포에 휩싸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절실히 느껴졌다. 지난 1년간 재정적으로 힘들어진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고 나 역시 그랬지만, 예상에 없던 적지 않은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현실이 너무나 감사했던 것이다. 나는 그 문자를 쓰면서 더 어린 시절 공포와 스트레스에 질렸고 인색하던 심적 상태와는 거리가 멀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와 돈의 관계는 앞으로 수년에 걸쳐 진화해갈 것이다. 힘든 시기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저 더 나은 방향이길 희망한다. 당연히 앞으로 맞이할 10년 동안 지나온 10년만큼 많은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10년 뒤에도 이를 전하기 위해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될지도 모르겠다. —Utegha Uwagba(작가)
낭만과 이별할 때
돈이라… 나는 구두점에 까다로운 사람이다. 가장 싫은 건 말줄임표다. 하지만 돈에 대한 얘기라면 이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나는 1990년대 후반 시골에서 상경했다. 그때 나는 “‘압구정동이 배밭이던 시절’ 그 땅을 샀어야 한다”고 회한에 잠기는 서울 노인들을 이해 못했다. 30년 후 내가 그러고 있을 줄도 몰랐다. 25년쯤 경제활동을 하고 깨달은 것은, 인생이란 내가 놓친 부동산과 실현하지 못한 사업 아이디어와 사지 않은 주식과 가상 화폐 따위가 애환으로 쌓이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2년 전 어느 날, 나는 아는 동생을 붙잡고 집을 사라고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네가 다니는 회사 정도면 대출이 잘될 것이고, 때려치울 때 때려치우더라도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한다. 네 전세금과 대출을 합치면 서울 외곽의 조그만 아파트는 살 수 있을 것이다. 한참 듣던 그가 역정을 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파트에 미쳐 있는 게 답답해 죽겠는데 언니까지 그래야 해요?” 나는 뜨끔했다. 조언이든 잔소리든, 곱게 늙으려면 상대가 청하지 않은 참견은 삼가야 한다. 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미안해. 내가 한창 일하고 돈 벌 때 재테크를 잘 몰라서 놓친 게 많거든. 그게 지나고 보니 너무 후회되고, 왜 내 주변엔 이런 얘기 해주는 사람이 없었을까 아쉬웠어. 그래서 요새 후배들만 붙들고 앉으면 이래.” 그건 내 진심이기도 했다.
자, 그러니 나의 폭삭 망한 재테크 역사를 주절대거나 잔소리를 늘어놓아 또 누군가를 괴롭히는 대신, 25년 경제활동을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누군가는 여기서 교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나는 재테크에 무관심한 쪽은 아니었다. 지인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부동산 요정’이다. 친구 A는 내 말을 듣고 청약을 넣었다가 목동 아파트에 당첨됐고, 친구 B는 “그런 가족 구성과 예산, 라이프스타일이면 00동을 알아봐”라는 조언을 듣고 서울 외곽의 타운하우스를 구입해서 만족하며 살고 있다. 40대 중반이 되도록 “2년마다 새집으로 이사 가는 게 좋아”라며 월세를 전전하던 친구에게는 인터넷 부동산을 이용해 실거주용 빌라를 구매하도록 입김을 불어넣는가 하면, 돈까지 꿔주면서 집 장만을 도왔다. 내가 사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 제주도 호텔이니 해운대 아파트니 서촌 한옥이니가 몇 년 안에 값이 치솟는 걸 지켜본 친구들은 “좋은 물건 있으면 소개해줘”라고 묻는 지경에 이르렀다. 며칠 전에는 오랜만에 연락한 후배가 물었다. “작년에 광명 아파트 보러 가더니, 샀어요? 거기 그 후에 급등했던데요.” 여기에 문제가 있다. 안 샀다. 광명 아파트도, 제주도 호텔도, 해운대 아파트도, 서촌 한옥도, 정작 부동산 요정 본인은 사지 않았다. 거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나는 빚을 너무 두려워했다. 내 눈에 띈 물건은 항상 내 자산보다 비쌌다. 500에 30짜리 반지하 월세에 살 때는 전세 2,000짜리 원룸이, 전세 1억에 살 때는 매매가 2억4,000짜리 서울 빌라와 지방 호텔이, 전세 2억에 살 때는 매매가 5억짜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부동산 매물 구경이 취미인 나는 그것들이 제값보다 싸다는 걸 알고 아까워서 주변 사람들에게라도 사라고 권했지만 나 자신이 빚을 지고 구매할 엄두는 못 냈다. 그리고 이제는 내 자산 가치의 상대적 하락으로 부동산 매물을 구경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부동산 중개업자인 아버지의 명언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 “부동산에 끝은 없다.” 그렇다. 기회는 다시 올 것이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지방 어딘가에 혹은 해외에 혹은 대한민국의 인구 구조와 금융 환경이 확연히 변화된 미래에 반드시 기회는 또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좀 더 대범한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두 번째 문제는 ‘낭만’이었다. 나는 내가 지극히 현실주의자인 줄 알았다. 어릴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학비를 벌었고, 스스로 집을 구하고 살림을 꾸리면서 물가에 민감했다. 작은 물건 하나를 살 때도 가장 실용적인 선택을 고민했다. 패션 잡지를 만들면서도 백화점에서 옷을 사거나 명품 백을 욕심낸 적 없었다. 문화 상품 수집욕도 없었다. 때로는 식비도 아꼈다. 그에 대해서는 지금도 미련 없다. 절약과 저축은 여전히 재테크의 기본이다. 특히 <보그> 독자들에게, 나는 패션계 사람들이 좀 더 솔직하기를 바란다. 알고 보면 이 업계에도 평범한 월급쟁이들이 많다. 그들은 오히려 다른 분야의 회사원들보다 명품 선망이 작은 편이다. 대신 고가의 제품을 늘 접하면서 쌓은 안목으로 개성 있는 물건을 찾아내는 데 주력한다. 돈은 부족하지만 스타일은 포기하기 싫은 젊은 여성이라면 당장 치장에 돈을 쓰기보다 차라리 한 1년 소비를 끊고 공부 삼아 명품관에 다니면서 아이쇼핑이나 실컷 해서 안목을 키우는 게 장래를 위해서는 낫다. 나의 문제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처절한 절약과 저축으로 일찌감치 시드를 장만했지만 다음 단계를 고민하지 않았다. 100세 시대니까 노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말은 막연한 공포 마케팅처럼 들렸다. 아직 일할 날이 많이 남은 20~30대에는 그 말이 지금처럼 절실하게 와닿지 않았다. 나는 윤리적 소비에 관심이 많았고, 아파트는 실거주가 아니라 오직 자산 가치 상승을 위한 선택지라 여겨서 배척했으며, 주식으로 퇴직금 잃고 가족 고생시킨 사람들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 나는 자유를 사랑했고 회사에 헌신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도록 대출은 절대로 하지 않고, 카드 결제일 따위 기억할 필요도 없을 만큼 통장을 채워두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내가 ‘역시 부모님과 사는 서울 애들은 경제관념이 흐리군’ 하고 평가했던 친구들은 부모들이 알아서 여기저기 투자해준 것으로 자산을 불렸고, 그도 아닌 한량들은 결혼을 하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아파트를 사고는 근래 부동산 붐을 맞아 일확천금했다. 그 사이 나는 인플레이션이라는 날강도에게 거하게 뒤통수를 맞았다. 나야말로 너무 안일했던 것이다.
세 번째 문제는 그런 나를 자극할 동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내 주변에는 나만큼 낭만적인 인간들만 한가득이었다. 몇 해 전 어느 무더운 날, 나는 언니의 지령을 받고 신도림역 근처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찾았다. 사회생활 초창기에 무작정 만들어놓은 청약 통장이 있긴 하지만 어떻게 쓰는지도, 과연 내가 서울 아파트 분양이 가능한 상태인지도 몰랐다. 언니는 “거기 가면 커피나 휴지 같은 것도 주고 집 구경도 할 수 있다”고 나를 꼬드겼다. 언니는 아침 일찍 움직이라고 했지만 나는 지인과 실랑이를 벌이느라 한참 늦었다. 지인은 “어차피 네 조건으로 역세권 아파트 분양은 꿈도 못 꾸니까 헛짓 말고 나랑 놀자”며 어린애처럼 보챘다. 그를 간신히 떼어놓고 모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현장을 둘러싸고 네다섯 겹 줄이 늘어서 있었다. 나는 태어나서 그토록 생기 넘치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본 적이 없었다. 세계의 각종 축제를 취재했지만 그것들과 달랐다. ‘돈’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향한 수천 명의 열망이 거대한 에너지로 뭉쳐 대기를 떠다녔다. 주변 중년 여성들은 어째서인지 서로를 알고 있었다. “어머, 또 보네요. 부산에서 매번 올라오기 힘드시죠?” “여기저기 질러놓은 게 많아서 이제는 이런 작은 물건밖에 들어갈 곳이 없네요.” 그들은 단박에 내게서 투자 문외한 냄새를 맡은 듯했다. 어쩐지 나 들으라는 듯 이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내 친구는 내가 청약 현장에 끌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요즘은 걔가 더 열성이야. 오늘도 왔을걸? 처음엔 그렇게 빼더니 역시 직접 다녀봐야 현실을 안다니까.” “세입자들한테 전세가 가장 돈 아까운 거다, 전세 살 돈으로 집을 사라 그래도 아무도 안 사. 그러다가 후회하지.” 만약 내가 그 자리에서 “선생님, 돈을… 돈을 벌고 싶습니다!”라고 호소했다면 그들은 당장 부자가 될 방법을 속성 지도해주었을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언니에게 청약은 떨어질 것 같지만 자극은 받았다고 말했다. 언니는 “사실 그러라고 보낸 것”이라고 했다. 나는 내가 부동산을 사네 마네 할 때마다 만류하던 사람들, 모델하우스를 보러 가는 대신 자신과 놀아달라고 떼를 쓰던 지인 등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지만 나 자신은 다른 타입의 친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요 몇 년의 부동산, 주식, 가상 화폐 광풍으로 한국인의 마인드는 철저하게 변했다. 노동 소득만으로는 인플레이션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 저축과 현상 유지는 상대적 퇴보를 뜻한다는 것, 시드의 대소와 무관하게 반드시 자산 시장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모두가 안다. 내 주변에서 가장 낭만적인 부류들조차 지난해에 삼성전자 주식을 샀다. 가진 건 노동할 몸밖에 없는 사람들 혹은 그마저 여의치 않은 사람들에게는 잔혹한 얘기다. 하지만 평균수명 120세를 바라보는 시대, 우리는 살아 있는 한 언젠가는 나 대신 돈이 돈을 벌게 만들어야만 한다. 요즘은 재테크를 가르쳐준다는 선생들도 많다. 유튜브만 틀어도 한가득이다. 거기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나는 10여 년 전 잡지 기사를 쓰기 위해 금융 컨설팅을 받은 적이 있는데, 컨설턴트는 부동산에 회의적이었다. 대신 그 회사에서 판매하는 연금 저축에 가입하라고 강하게 권했다. 그건 얼핏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내 주변에는 이미 인플레이션을 못 따라잡는 연금 저축 지급액 때문에 분노하는 은퇴자들이 있었다. 그 전문가는 몇 년 후 프리랜서가 되더니 미디어에서 연금 저축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주목을 받아 자기 커리어를 업그레이드했다. 또 다른 날, 나는 출근길 아침에 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나를 모델하우스로 보낸 그 언니다. “강남 아줌마들은 북한이 미사일을 쏠 때마다 인덱스 펀드를 산댄다. 코스피 1,800이 깨지면 사고 2,200이 넘으면 판대. 오늘 1,700이다.” 그래서 나는 마침 눈에 띄는 은행에 가서 인덱스 펀드 계좌를 개설하고 저축을 몽땅 옮겨 담았다. 은행원은 무모한 짓이라고, 자신들이 판매 중인 다른 펀드에 분산 투자하라고 권했다. 나는 정중히 거절했고, 한 달 후 펀드를 환매하러 갔을 때 은행원은 “투자 잘하셨네요”라고 나를 칭찬했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나는 ‘돈 받고 돈 얘기 하는 사람들’을 불신하게 되었다. 경제 이론가들, 사업가들, 부잣집 자식들은 나에게 IMF 이후 매년 ‘경기가 최악이다. 내년엔 IMF보다 더한 위기가 온다더라’, ‘일본 같은 부동산 버블 붕괴가 곧 한국에서도 벌어질 거다’, ‘현금을 보유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한 위기는 20여 년째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지나치게 낙관적이거나 지나치게 비관적인 사람들도 믿지 않는다.
그럼 우리는 대체 어디서 돈을 배우고, 누구를 믿어야 할까? 스스로 공부하라고 말하기는 쉽다. 수많은 유튜브 주식 전문가들이 말한다. “자기 이론이 있어야 해요, 공부해야 해요, 스스로 가치를 분석할 줄 알아야 해요. 상승장에서 돈 벌기는 쉽죠, 다가올 조정장과 폭락장에서 수익이 나야 자기 실력이에요…” 아니, 그렇게 아무것도 책임지기 싫으면 전문가라고 떠벌리질 말든가, 싶지만 그거야말로 그들이 쏟아내는 수많은 콘텐츠 중 유일한 진실일 것이다. 때로는 시간이 답이다. 지난 1년 사이 내가 돈에 대해 새로 배운 교훈은 ‘시장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30대에 3년 정도 주식으로 월세를 벌었다. 그러다 한 번 크게 휘청했다. 난생 처음 테마주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올 시기를 놓쳤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아파서 계좌를 보기가 싫어졌고, 그대로 시장을 떠났다. 그래서 지난해 코로나로 폭락장이 닥쳤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코스피 저점에서 가까스로 ‘아! 주식’ 하고 떠올리긴 했으나 그 사이 공부가 없었으니 뭘 사야 할지 몰랐다. ETF가 유행이라는 것도 모르고 무식하게 인덱스 펀드에 들어갔다. 그걸로 약간 수익을 보고 개별주로 옮겨가긴 했으나 200~300% 수익도 우스웠다는 작년 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초라한 성적이었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기회는 끝이 없으니, 나는 이제 느긋한 마음으로 다음 기회를 기다리려 한다. 다만 단돈 1,000원이라도 투자는 계속할 것이다. 그래야 관심이 생기고, 관심이 생기면 공부를 하게 되고, 그래야 다음 기회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시간과 경험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이숙명(칼럼니스트)
- 피처 에디터
- 조소현
- 일러스트
- Michele Marco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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