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하우스의 유산, 어떻게 활용할까?
패션 하우스의 헤리티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컨템퍼러리 디자이너들이 수백 년 구현해온 정신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브랜드를 현대화하는부담스러운 임무에 직면했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부담이 되곤 한다. 그들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참조, 재해석, 전통과 관습에 대한 도전까지 수많은 방법을 시도할 수도 있다.
패션 하우스의 헤리티지는 상징적이거나 보이는 그대로다. 무형이거나 실재적이다. 또 하우스의 지속성과 종종 그 브랜드의 성공을 보장하는 자산일 뿐 아니라 정체성의 본질적 부분을 형성하는 유전자 암호인 데다 심지어 도덕률이기도 하다. 이 헤리티지는 높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경계 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는 비장의 카드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브랜드의 변화와 진화를 앞둔 상황에서는 장애물이 되기도 하는 것도 사실이다.
헤리티지 개념은 컨템퍼러리 패션에서 중요하다. 그것 자체로 든든하니 말이다. 그리고 패션 산업을 장악한 하우스가 수익을 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며 운영되면서도, 수십 년 혹은 수백 년간 생명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하우스의 귀중한 아카이브에 담긴 이 본질적 특징이 오래 지속된다는 것, 바로 그 점이 전 세계 팬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이런 역사를 가지는 것은 귀족이 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하우스의 역사가 오래될수록 그들은 더 명문 브랜드가 되어간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것이 실재가 아니라 한낱 쇼에 불과하다면? 유서 깊은 브랜드는 패션 산업에서도 엘리트층에 속한다. 하지만 창업자의 비전과 스타일이 자연스럽게 진화하는 경우에만 해당된다. 유산은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패션이 시대에 맞춰 빠르게 적응하지 않으면, 진화가 위태로워지고 빛을 잃게 된다. 그들의 유산이 얼마나 중요하고 뿌리 깊은지와 상관없이 말이다. 이런 상황은 기억이 점점 짧아지는 비정상적으로 과민한 시대에 살고 있기에 더 악화된다. 전문가들과 광적인 애호가들 외에 아무도 세부 역사나 정확도까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헤리티지는 뭘 의미할까? 그것은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서 자유자재로 활용될 수 있는 모티브, 솔루션, 그리고 디자인을 풍부하게 끌어낼 수 있는 유구한 아이디어의 샘일까? 아니면 고수되어야 하는 핵심 가치관으로 그저 회귀하는 것일까?
헤리티지 개념을 탐색하는 것은 단지 뭔가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해결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일조할 뿐이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전통적 기본 원리를 고수하는 근본주의적 방식과 상대적으로 판단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당연히 이 흑백논리 사이에 경계를 두지 않는 중간적 방식도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타당해 보인다. 게다가 완벽한 답을 추구하는 것은 실용적인 면이 부족해 무의미할 수 있다.
헤리티지는 유동적이고 유기적이며 진화한다. 그리고 창립자가 실권을 잡고 있는 경우라면, 그것을 정의하기란 더 어렵다.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그것은 그 창립자들의 개인적 비전의 일부이며 유산은 그것을 반영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변화는 완전히 논리적이며 지속적인 느낌을 준다. 심지어 지극히 터무니없어 보이는 변화가 일어날 때조차. 예를 들어 조르지오 아르마니보다 더 자신의 헤리티지에 충실한 사람은 없었다. 소프트 테일러링에 대한 그의 비전은 자신의 브랜드를 처음 론칭한 1970년대 중반 탄생한 아방가르드 의상에서부터 현재까지도 여전히 유행하는 새로운 형태의 클래식으로 신속히 진화했으며, 시즌이 바뀌어도 거의 변화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이 특징은 아르마니 브랜드의 가치관 중 하나이자 처음에 얻었던 직관에 충실함으로써 구현되며 현재까지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미우치아 프라다가 구축해온 유산은 완전히 색다르면서도 매끄러운 변화를 지속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수준으로 보여준다. 그녀의 헤리티지는 대립각이 설 만큼 가변적이고 정의하기 불가능하다. 그러면서도 매력적이다. 아방가르드와 세련된 거만함이 뒤섞인 그 헤리티지는 이 브랜드가 지닌 DNA의 일부가 되었다.
패션 하우스가 창립자보다 더 오래 지속될 때 또는 창립자가 은퇴할 때, 헤리티지 개념이 더 복잡해진다. 이런 경우의 헤리티지는 정체성의 유산이 되며, 이것은 고정 방식으로 자리 잡을 위험이 있다. 그러나 추구해야 할 규율과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방법을 해석할 자유 사이에는 여지가 있다.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패션 하우스 대부분은 현재 이런 여지의 공간에서 길을 잘 찾아가고, 꽤 괜찮은 결과를 얻었다. 2020년 말 발렌티노는 #Valentino Resignify라는 타이틀로 상하이에서 실험적인 전시를 여는 등 여러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기호학에서 호기롭게 차용된 ‘Resignifying(새로운 의미 부여하기)’은 발렌티노의 설립자 발렌티노 가라바니의 레퍼토리와 수석 디자이너인 피엘파올로 피촐리의 작품으로부터 상징적인 비유를 취해 예기치 못한 맥락에 그것을 삽입함으로써 타깃(이상적으로는 더 젊은 층)을 매료시키는 것을 말한다. 즉 ‘Resignifying’은 유산을 해체하고,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재조립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발렌티노 가라바니가 디자인한 볼 드레스의 치맛자락은 다양한 가방과 바구니에 영감을 주어 연회장 이미지를 일상에서 쓰이는 도회적인 물건으로 변신시켜놓았다. 마찬가지로 피촐리가 10년 전 발렌티노의 새로운 포인트로 창조해낸 스터드를 액세서리에 사용하기 위해 더 크게 만들었다. 이것은 펑크 스타일의 개 목걸이보다는 로마제국의 궁전을 더 많이 떠오르게 했다. 이런 결정은 헤리티지의 구실이 최근이든 예전이든 제자리걸음이 아님을 입증한다. 사람들의 취향은 눈 깜짝할 사이 바뀐다. 그래서 하우스도 꾸준히 변화해야 한다. 결국 오늘날도 소비자가 늘 옳은 법이다.
당연히 헤리티지는 모더스 오퍼란디(Modus Operandi), 즉 특유의 작업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특정 미학적 규칙의 응용이라기보다 행동 수칙인 것이다. 이것은 특히 다른 카테고리로 확장하기 전에 가방과 액세서리 디자인부터 시작한 패션 하우스에 해당되는 얘기다.
에르메스의 헤리티지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심플하다. 유행을 타지 않는 스타일에 탁월함이 결부되어 있다. 반면에 펜디의 헤리티지는 ‘불가능은 없다’는 모토로 전체적으로 압축되어 있다. 페라가모는 사고방식의 수준에 이른 패치워크 테크닉으로 구현되고, 루이 비통에서 헤리티지란 삶의 한 방식으로서 여행할 자유다. 이를 통해 디자이너들은 움직이고 관례에서 벗어날 공간을 마련한다.
누군가는 헤리티지를 정체성 문제로 여기기도 한다. 그 개념은 시류에 휩쓸리면 어느 때보다 규정하기 어렵다. 대표적인 예가 구찌다. 피렌체 출신 4대 디자이너(구찌, 페라가모, 푸치, 카발리) 중 가장 유구한 구찌가 최근 진정한 혁명을 이룩하고 있다. 톰 포드가 수립했던 성적으로 격앙된 현대적 유산을 이어가던 프리다 지아니니의 매력을 포기하고,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믹스 스타일에서 나오는 과장된 기이함, 양성성, 계산된 도발을 추구한다. 그렇지만 이 모든 생소함 속에서도, 우발적 쇄신을 이어가는 시점에 브랜드 헤리티지에 대한 전달 매개체가 되는 홀스빗과 뱀부 핸들 같은 구찌만의 상징적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들은 기존 고객층을 안심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고객을 매료시키는 확실한 진정성을 제공한다.
다른 곳에서는 한 브랜드 혹은 하우스의 정체성이 이전과 모순적 수준으로 새롭게 형성됨에 따라 유산이 브랜드의 이름에 국한되기도 한다. 뎀나 바잘리아가 보여준 화려함을 향한 열망은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좋아하던 거만한 금욕주의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비할 데 없는 수준까지 브랜드를 이끌던 현재의 창작물에 비추어 그런 비교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패션 역사에 대한 상세한 지식과 결합된 깊이 있는 생각이 필요하다. 지방시 창립자가 고취한 미묘하고 섬세한 우아함은 매튜 윌리엄스가 거칠고 메탈릭한 모습을 가미하자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했다. 발망 역시마찬가지다. 특정 클래식 모티브가 재등장하기도 했지만, 그것과 상반되는 것도 찾아볼 수 있었다. 버버리는 브랜드의 전통 방식을 끊어버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렇지만 체크와 트렌치는 정체성을 유지하며 헤리티지를 잘 담고 있다.
컨템퍼러리 패션은 모든 면에서 역동적인 개성으로 넘쳐난다. 적절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며, 가장 유구한 역사를 지닌 브랜드의 경우 그들만의 아카이브 형태로 자신의 헤리티지를 개방해 이를 달성한다. 디올은 늘 설립자의 작품을 숭배하는 수준으로 확고하게 존경심을 보여왔다. 대표적인 예가 벨트가 부착된 바 재킷이다. 이것은 재능을 입증하고 싶어 하는 모든 수석 디자이너들이 의무적으로 선보여야 하는 의상이었다. 하지만 차별화된 크리스챤 디올의 특징을 남성복에 처음 접목한 킴 존스는 그런 작업의 틀을 깨려고 노력하면서도 그 방식을 고수한다. 한편 생 로랑의 안토니 바카렐로는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면서도 늘 과거를 되짚으며 브랜드 창립자와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의무를 다한다.
비교적 최근의 헤리티지는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대상이다. 흥미로운 예가 메종 마르지엘라다. 조직적 해체주의를 바탕으로 1988년 설립된 이 하우스는 극단적 아방가르드 감각을 통해 꾸뛰르의 예술을 찬양하면서 분열적일 만큼 정형화된 색다른 듯 모방적인 패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설립자 마르탱 마르지엘라가 떠난 지 몇 년 후 존 갈리아노가 하우스의 지휘봉을 잡았다. 그는 잔혹성을 화려함으로 대체하면서 스타일을 벗겨냈고, 그 자리에 과장된 터치를 확실히 가미하며 해체주의를 고수했다. 그 규칙을 존중한 것이다.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그랬다. 실제 이미지는 과거 한때와 사뭇 다르고 훨씬 더 밝아졌다.
컨템퍼러리 패션에서 이런 종류의 편차는 헤리티지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다. 때로 헤리티지를 더 많이 찾을수록 헤리티지가 덜 보인다.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헤리티지를 너무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둘수록 효과는 더 큰 듯하다. 반면에 과도하게 신경 쓰면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다.
- 글
- Angelo Flaccavento
- 사진
- GettyImage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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