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와 오브제를 창조하는 젊은 디자이너 6인
지속 가능한 디자인, 친환경, SNS. 최근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한국 디자이너의 특징이다. 버스의 고무 손잡이, 마스크, 신문지, 신발 박스 등 일상의 재료로 감각적인 가구와 오브제를 창조하는 젊은 디자이너 6인.
#1 판타스틱 패딩 소파 | 연진영
현실과 판타지 사이를 오가는 연진영의 작업은 지난해 캘리포니아의 디자인 스튜디오 소프트-지오메트리(Soft-Geometry)가 기획한 전 세계 디자이너 11팀의 가상 전시 <Imagined, for Uncertain Times> 화제작 중 하나였다. 황량하고 아름다운 어느 행성의 호숫가에 놓인 반짝이는 알루미늄 의자는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가느다란 뼈대로만 형태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강한 존재감을 띤다. 최근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셔터(Shirter)와 협업으로 탄생한 패딩 소파 ‘Padded Arm-Chair’는 라인 위주의 전작과는 달리 양감이 두드러진다. 유난히 따뜻하던 지난겨울, 재고로 남은 패딩 점퍼가 푹신한 소파로 변신케 한 것이다. 7월 25일까지 대림미술관 <기묘한 통의 만물상>전에서 만날 수 있는 이 다양한 타입의 패딩 소파엔 패딩 특유의 봉제선뿐 아니라 주머니나 단추 같은 과거의 흔적까지 디자인 요소로 남아 있다.
패션 브랜드 셔터와는 어떻게 협업하게 된 것인가? DDP에서 열린 <영 크리에이티브 코리아>(2019) 전시를 보고 먼저 연락이 왔다. 처음엔 티셔츠를 함께 만들었는데 단순히 작품을 프린트하는 게 아니라 작품 설명을 더해 ‘전시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일상에서 캐주얼하게 우리가 큐레이션한 작품을 만난다’는 게 컨셉이었다. 지난해 성수동 쇼룸 인테리어를 내가 맡기도 했고 올 초엔 반지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자주 오가며 얘기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오게 됐다.
업사이클링 패션은 이제 흔한 용어가 됐지만 패딩을 소재로 가구를 만든 건 못 봤다. 작업을 해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 셔츠나 청바지는 잘라서 이어 붙이면 되는데 패딩은 털과 그걸 감싸는 보강재가 다층으로 되어 있어 재가공이 엄청나게 어렵다. 새로운 시도를 즐기는 내 경우엔 그래서 더 끌렸다.
완성된 패딩 소파는 형태도 색상도 다양하다. 선택 기준이 있나? 긁히거나 지퍼가 고장 나서 판매할 수 없는 제품 혹은 남은 재고 중에 골라야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밝은 컬러를 선호하지 않는다. 때가 타는 문제도 있고 혼자만 다른 걸 싫어하는 성향이 있는데 그러다 보니 튀는 컬러는 잘 안 팔린다. 덕분에 소파의 컬러는 밝고 다채로워졌다.
원래 패션에 관심이 많은 걸로 안다. 취향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데 패션만 한 것이 없지 않나. 전혀 패션과는 무관해 보이는 실리콘밸리의 IT 전문가들이 매일 똑같은 검은색 티셔츠만 입는 것도 일종의 자기 브랜딩이라고 생각한다. 난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고 내 작업만큼 나도 멋있게 보이고 싶다. 아티스트 본인의 영향력도 작업만큼 중요하다.
SNS에서 팔로우하는 이들 중 요즘 영감을 주는 인물은? 소설가, 영화감독, 미술가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며 그 모든 분야에서 인정받는 미란다 줄라이, NBA 선수이자 켄달 제너의 남자 친구이기도 한 데빈 부커 그리고 올라퍼 엘리아슨. 그 외에도 많다.
취향이 궁금하다. 아름답든 아름답지 않든 뭔가 낯설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 말이 안 되는 말 같지만 그런 것 같다. 아노다이즈 기법으로 색을 입힌 알루미늄 체어 ‘Abused Beauty’나 앵글로 만든 ‘Angle Armchair’ 역시 색감이 강렬하고 패턴이 많은 편이다. 모든 면에서 한 번 더 눈이 가는 것. 미니멀과는 거리가 있다. 소재나 형태도 한 가지만 고집하는 건 재미없다.
패딩으로 만든 소파는 전보다 덩치는 커지고 부드러워졌지만 특유의 비정형 실루엣과 라인(봉제선)은 연진영의 시그니처처럼 남아 있다. 디자인 재료나 스타일은 달라져도 메시지는 그대로다. 뭔가 약해 보이거나 어딘가 결함이 있는 것을 소재로 활용해 내 나름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보여줌으로써 그것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만들고 싶다. 예술대학 재학 당시 만들었던 ‘Uduludul’은 학교에서 구한 파쇄지로 작업한 오브제였다. 패딩 역시 효용 가치를 잃고 창고에 박혀 있던 것이다.
또 어떤 프로젝트를 계획 중인가? 6월 25일부터 프랑스 13 Desserts 갤러리에서 그룹 전시를 한다. 9월에는 외국 기업과 협업으로 밀라노 디자인 전시를 준비 중이다. 코펜하겐의 ‘3 Day of Design Fair’에도 참여한다. 국내에선 7월에 공개되는 마곡 신도시 공공 예술 프로젝트의 마무리 작업 중이다. 야외 벤치이지만 형태적으로는 패브릭 소파의 부드러운 느낌이 나도록 열심히 디자인하고 있다. 내가 정한 제목은 ‘뉴타운 바캉스’다.
왜 ‘뉴타운 바캉스’인가? 마곡역 바로 앞이 프로젝트 장소인데 획일적인 회색 건물이 많아 삭막하다. 오브제 디자인을 하는 작가가 공공 예술을 한다면 동상이나 조각과 다른 뭔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파 벤치 외에도 선베드, 여기에서 어울리는 파라솔을 제작했다.
#2 나이키 키드의 생애 | 이규한
힙합 뮤지션 프랭크 오션의 노래 ‘Nikes’는 돈을 의미한다. 나이키의 상징적인 스우시(Swoosh) 로고는 체크 표시와 비슷하고 ‘Check’는 수표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나이키 박스로 만든 이규한의 가구는 그야말로 ‘머니 박스’인 셈이다. 그의 나이키 의자 한 점은 박스도 안 뜯은 신상 나이키 신발보다 10배 이상 비싸다. 이유는 간단하다. 스니커즈 컬처를 온몸에 이식한 이 스타일리시한 조각품엔 ‘현대’와 ‘일상’, ‘스타일’이 새겨져 있다. 2년 전부터 ‘Nike Stool’ 시리즈 작업을 지속해온 이규한이 나이키 박스를 발견한 건 자신이 나이키 마니아였기 때문이다. 가구를 디자인하는 과정 중 하나로 미니어처 샘플을 제작하다 부족한 골판지를 대신해 우연히 집에 있던 신발 박스를 자르고 다각도로 조립한 게 이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2019년 분더샵 팝업 전시를 시작으로 지난해 이탈리아 <보그>에 소개되기도 한 그는 지금도 힙합을 듣고 나이키를 신는다.
나이키의 반응이 궁금하다. 오히려 일을 많이 준다(웃음). 학교 다닐 때 만든 의자가 우연히 SNS 채널을 통해 미국의 스트리트 패션 웹 매거진 <Hypebeast>에 소개됐는데 그게 분더샵 전시로 이어지고 그걸 본 나이키 관계자들이 박스를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지금은 본사가 아니라 몇몇 아웃렛 매장에서 버려지는 박스를 공급받고 있는데 행사가 있을 때면 잊지 않고 찾아준다.
지드래곤의 레이블 ‘피스마이너스원’과 나이키가 협업한 ‘에어포스 1 파라노이즈 2.0’ 출시를 기념해 워크숍을 열기도 했다. 처음엔 그 신발 박스로 의자를 제작해보자는 얘기도 있었다. 결국은 나이키 박스로 화병을 만들고 피스마이너스원의 상징인 데이지를 꽂는 식의 간단한 워크숍으로 마무리됐다.
왜 하필 나이키였나? 초등학교 6학년 때 내가 처음 산 브랜드 신발이 나이키였다. 중학생이 나이키 옷을 사려고 홍대의 큰 매장 앞에 줄을 서기도 했다. 나이키 신발이 스타일링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잘 소화했을 땐 오히려 더 멋있게 느껴지는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집에 박스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나이키 포장 박스의 컬러와 재질이 이토록 다양한지 처음 알았다. 보통 남성용 신발 박스로 작업하는데 아이템별로 컬러는 물론 텍스처와 소재, 크기도 다르다. 러닝은 주황색, SB는 민트색, 에어맥스는 흰색, 이런 식으로 다양하다. 반짝이는 흰색 의자는 에어맥스 시리즈 중에서도 베이퍼맥스라 유광이 다르다. 신발을 좋아해서 시작했지만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는 브랜드는 아마 나이키밖에 없을 거다.
‘Never Sleep On Tour’ 문구가 새겨진 이 검은색 의자의 원재료는 그럼 뭔가? 2014년 출시된 나이키 스켑타(Skepta) 시리즈다. 영국 래퍼인데 노래 인트로 중에 그런 문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니커즈 컬처에서 힙합을 빼놓을 수 없다. 어떤 음악을 즐겨 듣나? 작업할 땐 주로 힙합을 듣는다. 특히 프랭크 오션이라는 뮤지션을 좋아한다. 그의 곡 중에 ‘나이키즈(Nikes)’가 있다. 마침 분더샵 전시를 준비하던 중이라 이름을 정해야 했는데 그때 듣던 노래가 바로 작업의 타이틀이 되었다.
다른 브랜드에서도 협업 제안이 많았을 것 같다. 나이키는 내 작업의 컨셉이다. 모든 브랜드가 다 박스를 만들다 보니 꽤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조심스럽다. 나는 박스 아티스트가 아니니까. 하고 싶은 다른 많은 작업이 있다. 나이키 박스가 그랬던 것처럼 주변 일상의 물건을 가지고 만들어보지 않을까 싶다.
책상 위의 이 테니스공처럼? 그렇다. 컨셉추얼한 행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이 테니스공의 한 부분을 십자로 작게 찢어 자전거 핸들 양쪽에 꽂고 벽에 부착해봤다. 지금은 USB 홀더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저런 시도를 하며 재미있는 걸 찾는 중이다.
전시 관람객 중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지난해 챕터원에디트 ‘갤러리 도큐먼트’ 전시에서 어느 연로 작가분께서 벽에 걸린 내 나이키 선반을 보고 “도널드 저드의 팝 버전”이라고 하셨는데 내가 의도한 바를 정확히 읽어주셨다. 형태적으로도 도널드 저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 신은 운동화도 나이키다. 대체 몇 켤레나 있나? 세어보진 않았는데 스니커즈는 나이키 아니면 컨버스다. 그렇게 많진 않다. 스무 켤레쯤?
#3 코로나 시대의 디자인 | 김하늘
하루에 버려지는 마스크 양은 얼마나 될까? 지난해 7월 영국 BBC 보도에 따르면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된 뒤 매달 전 세계에서 1,290억 개의 마스크가 버려진다. 플라스틱 용기 재료와 같은 폴리프로필렌(PP)으로 만들어 분리배출 시 재활용이 가능하나 위생상 이유 등으로 마스크 대부분은 쓰레기가 된다. 땅에 묻힌 이 마스크가 썩어 없어지기까진 약 500년의 시간이 걸린다. 우연히 뉴스를 보다 마스크를 녹여 재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는 김하늘은 요즘 뉴스에 자주 나온다. SBS 뉴스를 비롯, <뉴욕 타임스>에서 그의 작업을 소개했고, 영국 로이터 통신의 브레이킹 뉴스에서 메인으로 다루기도 했다. 이제 겨우 스물셋, 세상에 내놓은 첫 작품치고는 반응이 뜨겁다.
‘Stack and Stack’ 스툴 시리즈에 대해 설명해달라. ‘쌓이고 쌓인다’는 의미로 팬데믹 시대에 쌓여만 가는 마스크를 녹이고 굳혀 만든 디자인 프로젝트다. 단순히 버려진 마스크로 새로운 오브제를 만들었다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사람에게 재활용의 가능성과 영감을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길 바랐다.
마스크가 어떻게 의자가 되는지 그 과정이 궁금하다. 열풍기로 얇은 천 조각을 녹여 뜨겁게 액화하고 그걸 식히고 굳혀 금형에 넣어 만드는 식이다. 처음엔 끓는 물에 삶아도 보고 불로 지져도 보고 별별 방법을 다 써봤다. 의자 샘플 하나를 완성하는 데 3개월 정도 걸렸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 시간 등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힘들었다. 거의 매일 밤을 새웠다.
누군가 사용하던 마스크가 아니라 공장에서 쓰고 남은 재료를 이용한다. 샘플 작업을 할 땐 실제 쓰던 마스크를 이용했다. 필터 부분만 분리하기 위해 일일이 끈을 따고 철사를 빼는 수작업 과정이 만만찮았다. 위생 문제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들른 마스크 공장에서 자투리 원단을 발견했다. 유선형 마스크를 커팅하고 남은 부분이었다. 공장 사장님께 여쭤 보니 그런 자투리와 불량품이 전체의 10% 정도 된다고 했다. 현재 화성시와 의왕시 근처 마스크 공장에서 재료를 공급받고 있다. 공장 측은 폐기물 처리 비용이 다섯 배나 절감되었다고 한다.
알록달록한 컬러 스툴도 있다. 화이트, 블랙, 핑크, 블루 네 가지다. 색소를 추가하지 않고 기존 마스크 색상을 그대로 쓰거나 믹스한다. 재활용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매끈하게 샌딩 처리하지 않은 이유도 그래서다. 팬데믹으로 일어나는 상황을 보여주는 작업이라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느낌을 연출하고 싶었다.
P4G 서울 정상회의를 기념해 외교부와 대림미술관이 기획한 특별 전시에도 참여하고 있다. 참여 아티스트로 영부인 앞에서 직접 작품을 소개하게 되었는데 감사하게도 청와대에서 ‘Stack and Stack’ 시리즈를 소장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열심히 작업 중이다.
가구를 디자인하게 된 계기는? 어머니가 경기도 여주에서 목공방을 하고 계신다. 어릴 때부터 나무 다루는 걸 옆에서 보고 배웠는데 그 영향이 클 것이다. 스무 살 무렵에 목가구 제작과 리모델링 사업을 해보기도 했다. 나무는 가장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재료라 웬만한 고수가 아니면 트렌디하게 구현하기 힘든 종목이다. 그래서 마스크처럼 전혀 새로운 소재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올해의 목표는? 친구들과 함께 브랜드를 만들고 있다. 동시에 플라스틱을 재활용할 때 필요한 사출성형 방식을 설비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의자뿐 아니라 조명, 테이블, 타일 같은 건축 재료를 더 개발해 첫 시리즈로서 완성도를 갖추려 한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쩌다 보니 첫 작업으로 캐릭터가 생겨버린 것 같다. 설치미술 등 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당분간은 지금의 캐릭터에 충실하려고 한다.
브랜드 이름은 정해졌나? ‘Suburban People’이다. 직역하면 ‘도시 외곽 사람들’인데 ‘평범하다’는 뜻도 된다. 환경에 대한 이슈가 커지는 요즘 내가 느끼는 건 세상을 바꾸는 건 결국 ‘평범한 우리’란 사실이다. 특별한 누군가가 환경문제를 해결하진 못한다. 우리는 중요한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되고자 한다.
#4 플라스틱 추잉 껌 | 1S1T 강영민
알록달록한 추잉 껌을 길게 늘였다 접어 쌓은 것 같기도 하고 꾹 눌러 짠 물감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하는 매혹적인 고무 바위. 때로는 의자, 테이블의 다리가 되거나 공사 현장의 러버콘 같은 형태로 변신하기도 한다. 버스 손잡이, 계단의 핸드레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소재는 단단한 파이프의 겉면에 2~3mm 두께의 말랑말랑한 질감과 색감을 입히는 PVC 또는 PP 계열의 플라스틱이다. 강영민은 이를 가구나 오브제 혹은 인테리어 소재로 활용하며 ‘플라튜보(Platubo)’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 영화배우로도 활동하는 윌 스미스의 아들 제이든 스미스가 그를 팔로우하고 있으며 협업 아티스트이자 모델로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의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6월 12일 제네시스는 첫 전기차 출시를 기념해 강영민이 소속된 ‘크리에이티브 콜렉티브 이즈잇(1S1T)’과 함께 업사이클링을 주제로 <리: 크리에이트(Re: Create)> 특별전을 열었다. 강영민은 지금 새로운 가능성의 시장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쇠 파이프에 플라스틱을 코팅하는 공장과 함께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플라스틱 파이프 공장에서는 1년에 약 50톤의 PVC를 생산 공정 중 폐기한다. 만약 빨간 파이프 다섯 개와 노란 파이프 세 개를 생산해야 한다면 기계에 해당 색상의 PVC를 일정량 집어넣고 뽑아내는데 늘 잔류 찌꺼기가 남는다. 처음에 집어넣은 빨간색이 전부 비워질 때까진 빨강과 노랑이 뒤섞인 주황색 구간이 나오는 것이다. 그 구간이 커팅되어 비닐 포대에 버려지는 걸 보고 그 중간 단계를 작품으로 만들게 됐다.
작업 과정을 담은 메이킹 영상을 보면 마치 방앗간에서 가래떡이 뽑히듯 기계에서 물렁한 플라스틱 파이프가 쏟아져 나온다. 컬러도 다양하다. 내 눈엔 폐플라스틱을 담은 투명 비닐 포대 자체가 너무 예뻤다. 플라스틱은 색을 다루기 좋은 소재인데 공장 기계의 특성상 서로 다른 컬러가 섞여 구간마다 다른 색감을 띠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받은 감동을 다른 사람들에게 직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원래의 상태를 최대한 살리는 방식을 택했다. 사물을 보는 관점에 따라 쓰레기로 여겨지던 것도 아름다운 작품이 될 수 있다.
이를 이용해 ‘플라튜보’라는 브랜드도 만들었다. 지난해 말부터 나와 한 팀으로 활동하는 이즈잇과 함께 폐플라스틱의 자연스러운 무늬와 대리석 컬러를 활용한 파이프 타입의 인테리어 소재를 개발하고 있다. 지금 내 옆에 놓인 의자의 긴 등받이 부분이 바로 플라튜보다.
이즈잇은 어떻게 결성된 것인가? 건축, 공학, 디자인, 사진, 파인 아트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친구들로 구성되어 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줄곧 혼자 작업해오며 한계를 느낀 부분이 있다. 디자인 외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많은 일이나 기업과의 커뮤니케이션, 대형 프로젝트의 어려움 같은 것들이다. 제품 디자인 외에도 공간 연출이나 영상, 음악까지 디자인을 둘러싼 다양한 영역에 보다 폭넓게 참여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알렉산더 왕, 제이든 스미스도 작품 제작을 문의한 것으로 안다. 정말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다. 인스타그램에서 제이든 스미스가 나를 팔로우한 바로 다음 날 알렉산더 왕에게 DM이 왔다. 제이든 스미스는 자신의 사무실에 둘 작품을 구입하고 싶어 했고 알렉산더 왕은 맨해튼의 매장 디스플레이를 문의했다. 코로나로 인해 진행이 늦어지고 있지만 현지에서의 1차 미팅은 끝낸 상태다. 그리고 엊그제 다시 연락이 왔다. 전시 등 바쁜 일정이 마무리되는 대로 본격적으로 논의할 예정이다.
대체 어떻게 당신을 알고 직접 연락한 걸까? 우리 팀의 전략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내 작품을 특정 패셔니스타의 패션 스타일로 해석한다거나 시그니처 패션 아이템의 컬러를 담아내는 식으로 인스타그램에 해시태그를 달기 시작하면서 패션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됐다. 맨 처음엔 스트리트 패션 마니아들이 즐겨 보는 매체의 인스타 페이지에 내 작품이 소개됐고, 그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퍼져나간 것 같다.
대형 브랜드나 기업도 아닌 소규모 아티스트 그룹이 인스타그램 홍보 마케팅 전략을 짜고, 또 그게 통한다는 게 흥미롭다. 나뿐 아니라 코로나 시대를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SNS를 통해서만 다른 세상을 접하지 않나. 패션 위크도 디자인 페어도 모두 취소됐다. 새로운 걸 찾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제이든 스미스나 알렉산더 왕과 얘기를 나눌 때도 사전에 그의 피드를 분석해 좋아할 만한 컬러와 디자인을 제안했다.
리복의 글로벌 광고 모델로 활약하기도 했다. 촬영이 끝난 후 알았지만 브랜드 마케팅 담당자 역시 작가를 찾던 중 SNS를 통해 나의 스타일과 취향을 보고 연락했다고 했다. 당시 모델로 참여하면서 신제품으로 나온 신발의 컬러를 담은 의자도 제작했다.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은 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 작품과 함께 섰을 때 잘 어울리는 작가이고 싶은 욕심이 있다.
1년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앞으로의 작업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까? 팀명 ‘1S1T’은 ‘Is it?’, 정말 그런지 스스로 되물으며 한계에 도전하고자 노력한다. 업사이클링 자체보다는 우리만의 시각으로 다르게 보고 아름다움 너머의 본질을 탐색하고 확장해나갈 것이다.
#5 신문지, 벽돌이 되다 | 이우재
이우재는 버려진 신문지로 종이 벽돌과 가구를 만든다. 어느 날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잔뜩 쌓인 신문지 더미를 본 그는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벤 졸업 프로젝트(2016)로 ‘페이퍼 브릭(Paper Brick)’을 처음 선보인 후, 다채로운 작업으로 일회용 신문지에 지속 가능한 새 삶을 선물하고 있다. 종이 특유의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과 건축자재 같은 마블링, 높은 강도를 지닌 이우재의 작품은 현재 독일 비트라 뮤지엄 샤우데포트 랩(Schaudepot Lab)에서 소장 전시 중이며 런던의 민트 숍과 사치 갤러리에 전시된 바 있다. 국내에서는 종이를 주제로 한 윤현상재 ‘Space B-E 갤러리’ 전시로 알려졌으며 지난해 갤러리아 광교 COS 매장을 이 아름다운 잿빛 벽돌로 가득 채우기도 했다.
왜 벽돌 모양인가? 다른 물성으로 변환되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종이와 상반되는 단단한 건축자재 모양을 떠올렸다. 벽돌 형태를 택함으로써 사용되는 종이의 양이 적어지고 마르는 속도와 변형도 줄었다. 브릭 하나를 만드는 데 500g 정도의 신문지가 사용된다.
색감도 실제 시멘트 벽돌과 비슷하다. 페이퍼 브릭의 밝은 회색 톤은 신문지 원래의 색이다. 다른 톤의 색을 입히더라도 특유의 느낌이 있다. 그런데 한국 신문은 색이 다르게 나온다. 그간 네덜란드에서 작업해온 터라 신기했다. 나라별로 신문에 사용하는 잉크가 달라 색이 좀 다르게 나온다.
종이로 만든 가구는 전에도 있었다. 프랭크 게리(Frank Gehry)는 골판지 의자 ‘Wiggle Chair’를 만들었고, 시게루 반(Shigeru Ban)은 종이 카드보드지 관을 이용해 재해 난민을 위한 건축물을 만들기도 했다. 영향을 받은 인물이 있다면?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부터 시게루 반의 작업을 좋아했다. 뉴질랜드에서 건축을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운 좋게 그분의 강의를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때부터 시게루 반처럼 한 가지 재료를 여러 방향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어릴 때 어머니와 종이 죽으로 탈이나 인형을 만들며 놀았는데 그런 기억도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꾸준히 종이라는 재료를 사용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종이 신문이 사라져가는 요즘 이런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게 흥미롭기도 하다. 많은 양의 신문지를 구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요즘도 광고나 포장 용도로 신문지가 많이 사용되고 있긴 하다. 페이퍼 브릭은 신문지로 만들었지만 다른 종이로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이는 쉽게 사용되고 버려지는 재료 중 하나로 재활용이 가능하긴 하나 그 과정이 반복될수록 입자가 작아지고 결국엔 더 이상 재사용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그런 종이에 새 삶을 주고 다른 시선과 촉감으로 종이를 접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
네덜란드에선 대만 디자이너 파오 후이 카오(Pao Hui Kao), 한국 디자이너 이수지와 함께 ‘더 머티어리얼리스츠(The Materialists)를 결성해 다양한 소재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디자인 실험을 해왔고, 지난해엔 한국, 올해는 호주에 머물고 있다. 나라별로 어떤 차이가 있나? 네덜란드 사람들은 디자인을 중요한 문화로 여기기에 획기적인 아이디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더치 디자인 위크’ 같은 디자인 전시가 열릴 땐 예술, 디자인계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함께 즐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기업이 새로운 도전을 하기까진 많은 시간이 걸린다. 요즘은 한국이 오히려 유럽보다 새로운 작가 발굴이나 작업에 대한 투자에 더 적극적인 것 같다. 한국 디자인계는 매우 트렌디하고 멋지다.
지속 가능한 소재를 컨셉으로 한 COS 매장 작업 외에 다른 흥미로운 협업 프로젝트는? 지난해에 Lynk & Co 암스테르담 컨셉 스토어에 들어가는 가구를 제작했다. 이 프로젝트 또한 ‘지속 가능’이란 주제로 진행되어 내가 작업한 가구 및 폐자동차 부속물로 만든 가구와 함께 완성됐다. Lynk & Co 다른 지점에서 작업 요청이 있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진행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오이뮤(Oimu)와 협업 프로젝트로 신문지로 만든 인센스 홀더를 출시하기도 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높은 노인 빈곤율과 폐지 줍는 노인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기우진 대표의 ‘러블리페이퍼’처럼 사회에 도움이 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보고자 한다.
올해의 계획은? 올 초 호주로 거점을 옮기는 중요한 결정을 했다. 그곳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볼 생각이다. ‘제품’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향으로 작업을 이끌어나가려 한다. 예를 들면 종이의 재료적 특성을 살린 회화나 조소 작품 같은 것들. 건축적 재료나 제품이 아닌 공간 속 오브제로 발전할 수도 있다. 가장 큰 바람은 빨리 팬데믹이 끝나 한국에서 작업하는 날이 오는 것이다.
#6 옥수수와 디지털 크래프트 | 류종대
한때 요트 디자이너로 일하던 류종대는 넓고 푸른 바다 대신 노란 옥수수밭으로 나아간다. 정부 기관과 기업, 시민사회가 함께 기후변화에 대응해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는 글로벌 협의체 P4G 서울 정상회의 개최를 기념하는 대림미술관 전시 <기묘한 통의 만물상>에서 만날 수 있는 그의 작업은 모두 옥수수 전분에서 추출한 친환경 플라스틱 소재를 3D 프린터로 가공하여 만든 것이다. 사람이 앉거나 물건을 올려둘 수 있는 보편적인 기능을 지닌 ‘Colors’ 시리즈는 유쾌한 형광 컬러와 독특한 형태로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가 제 쓰임을 다하면 자연에서 생분해된다. 옥수수, 사탕수수, 콩과 같은 천연 원료로 만든 이 바이오 소재는 최근 다양한 영역에서 각광받고 있다. 밀라노의 디자인 갤러리 로사나 오를란디는 2019년부터 ‘Guiltless Plastic’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캠페인의 일환으로 매년 어워드를 연다. 류종대 역시 ‘로우 플라스틱 프라이즈’ 공모에 참여한 바 있다. 최근의 경향은 대안적 신소재다.
요트를 타고 망망대해를 누비다 보면 누구라도 자연인이 될 것 같다. 요트 조정 면허는 있지만 아직 내 요트는 없다. 한 번씩 요트를 타고 놀러 가긴 하나 그렇다고 특별히 환경문제에 관심이 높았던 건 아니다. 그저 일반적인 관심 정도였는데 3D 프린팅 작업을 하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특별한 계기가 있나? 초기엔 ABS 같은 석유화학 플라스틱도 써봤는데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더라. 지독한 냄새와 유해 가스 때문에 전문 시설을 갖춘 공장이 아니고는 쓸 수가 없었다. 나부터 오래 못 살 것 같았다. 그래서 당장 바이오 플라스틱으로 바꿨다.
그게 언제인가? 2016년 무렵이다. 원래 시스템 퍼니처 디자인을 했는데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터지면서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났다. 그게 인생의 변곡점이 된 셈이다.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하고 목공예·아트 퍼니처 작가로 활동하면서 요트 회사 직원이던 선배의 소개로 요트 가구와 인테리어 일을 하게 됐다. 그때 3D 프린팅을 처음 접했고 그 기법을 기존 아트 퍼니처 작업에 적용하게 된 것이다. 마침 일본 아티스트 레지던시에 가게 되면서 3D 프린터로 좀 더 색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디지털 크래프트’라는 이름처럼 질감과 색감, 형태, 그 작업 속성에 현대적 요소와 한국적 전통 공예가 공존하는 것이 특징이다. 길이가 24m 이상 되면 보통 슈퍼 요트라고 하는데 그렇게 큰 요트는 운송 기기이자 건축물로 등록되어 인테리어 디자인이 필요한 배경이 된다. 규격화된 산업 시스템에서 행해지는 작업이라 디지털 프로세스가 필수적인데 의외로 여기에 목공예 같은 아날로그 디자인이 잘 어울렸다. 자연스럽게 아트 퍼니처 작업을 할 때도 디지털과 아날로그 요소 두 가지를 조합하고 병행하게 됐다. 예를 들어 ‘D-Soban’의 경우, 우드워킹 상판을 쓰고 다리 부분은 전통 기와 모양을 차용해 디지털로 디자인 제작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새로운 기술과 전통, 아날로그적인 것이 만나니 신선하고 더 돋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이번 전시에 소개한 ‘Colors’ 시리즈는 전보다 파격적이다. 형광 컬러에 형태도 자유롭고, 표면에선 섬유질 같은 독특한 질감이 느껴진다. 제작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소반 시리즈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정교한 작업이라면 최근의 스툴과 화병 같은 컨테이너는 좀 더 대중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제작 시간을 단축했다. 그러다 보니 결이 크다고 해야 할까? 그런 질감이 오히려 ‘Colors’의 특성을 아이덴티티처럼 보여주는 결과가 된 것 같다.
전통 단청 무늬나 불교의 탱화처럼 과감하고 선명한 색감이 눈에 띈다. 묘하게 한국적이다.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의 문화 속에서 한국 사람들과 감정을 교류하며 살아왔으니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강의할 때도 학생들에게 얘기하는 부분이지만 ‘한국적인 것’이란 각자의 삶에 녹아든 무엇이지 그걸 디자인으로 규정하는 건 창의적인 활동을 할 때 방해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3D 프린터는 어떤 의미인가? 자동화 기계라기보단 하나의 도구. 동그란 조각도로 동그란 홈을 파고 각진 조각도로 각을 팔 수 있듯 3D 프린터도 제각각 개성이 있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르다. 어떤 작업을 할 때 제 능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지 도구의 활용 측면에서 연구를 많이 하는 편이다.
어떤 사람들이 주로 당신의 작품을 구입하나? 기억에 남는 한 분은 매해 아내 생일에 소반을 선물로 주었다. 소반 모으는 게 취미라고 했는데 내 소반을 3년에 걸쳐 세 점 정도 구입했다. 다양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에서 내 작업이 행복하게 쓰일 수 있길 바란다. 물론 자연이 온전히 보존되었을 때 그 행복이 온전히 지속될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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