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새보다 가벼운 한예리의 움직임

2021.07.28

by 손은영

    새보다 가벼운 한예리의 움직임

    자신에게 귀 기울여 물 흐르듯 찾아가는 한예리의 움직임. 새보다 가볍고 나비보다 가뿐하다.

    타조 깃털 장식의 하이넥 니트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옐로 깃털 장식 원피스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창간 25주년을 맞아 <보그>라는 지면 연회(宴會)에 무용수로서 한예리를 초청하며 한 폭의 수묵담채화 같은 화보가 나온 건 순전히 우리 탓이다. 새벽안개가 내려앉은 산등성이 배경이며 힘차게 일필휘지로 붓칠한 아크릴 판, 곡선이 유려한 옥색 도자기 앞에서 한예리는 몸에 춤이라는 감각이 새겨진 사람처럼 움직였다. 어떤 마음으로 촬영 왔냐는 질문에 그제야 한예리는 반짝거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즐겁게 춤추자’ 다짐하고 왔어요. 오늘은 <보그>의 날이다, 25주년 축하한다 하면서요.” 한예리는 연회의 느낌을 잘 안다고 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연회를 열잖아요. 거기에 항상 춤이 빠지지 않고요. 전 그런 무대에 자주 섰어요. 특히 한국무용은 오방색을 화려하게 쓰다 보니 늘 신나죠. 오늘은 일단 물 흐르듯이 제 안에 있던 어떤 움직임을 찾아가면서 움직였어요. 어떤 무드를 떠올리면서요.”

    올해 한예리는 무용수로서 무대에 여러 차례 올랐다. 통영국제음악제에서 <디어 루나(Dear LUNA)> 초연 무대에 섰고, DDP에서 열린 2021 P4G 서울 녹색미래 정상회의 개회식 오프닝으로 <연리지> 무대에 올랐다. 지난 6월에는 2021 국제현대무용제(MODAFE) 홍보대사로도 나섰다. 춤, 대사, 음악, 영상이 어우러진 작품 <디어 루나>에서 한예리는 내레이션을 맡고 발레리나 김주원과 2인무를 펼쳤다. 달그림자를 닮은 한예리의 차분한 음성이 달빛처럼 빛나는 무대를 감쌌고, 한예리를 비롯한 무용수들은 한 편의 시 같은 몸짓을 펼쳐냈다.

    두 나무의 나뭇가지가 맞닿아 있듯 인간과 자연은 공존하고 공생한다는 내용을 담은 무대 <연리지>에서는 시를 읊고 무용을 더했다. “<연리지>는 전하려는 메시지가 정확했기 때문에 아픈 나무와 지구를 보듬는 느낌이었어요. 다시 일어서고 뿌리 내릴 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로서 움직임도 굉장히 많이 정제하고 대사에 집중하도록 노력했어요.” 무대에서 한예리의 춤과 음성은 어떤 세계의 안내자처럼 다가온다. “무용은 추상적인 부분이 많아서 관객에게 편안하게 다가가기 위해 요즘 해설이나 설명을 해주기도 해요. 연극에서 춤이 들어가듯 춤에도 그런 연극적 요소가 들어가는 거죠.”

    퍼프 소매의 실크 드레스는 문초이(Moon Choi).

    ‘길이 보이면 걷는 것을 생각한다’는 후반부가 기억난다며 한예리는 <디어 루나> 속 일부를 차분하게 들려줬다. “‘길 끝에는 무엇이든 있고 무엇과도 만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꿈꾼 최선의 길로 들어설 수 없다. 그래도 가야 된다.’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어떤 길로 가게 되는데 원하지 않거나 만족스럽지 않은 길일 수도 있지만 일단 들어서면 갈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잖아요.” 이를 통해 한예리가 떠올리는 존재는 끊임없이 길을 다져가며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저는 오랫동안 성실하게 한 길을 가는 사람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어요. 무용수들은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쉼 없이 몸을 움직여요. 어떤 생각을 갖고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아침에 눈을 뜨면 움직이는 거예요. 오늘은 움직이기 싫다거나 날씨가 어떻다는 생각을 아예 닫아버리죠.”

    28개월부터 무용 학원에 다니며 대학에서까지 무용을 전공한 그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영화 작업 하느라 오랫동안 춤을 안 췄더니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이 안 아프더라고요. 너무 어릴 때부터 해서 원래 안 아픈 게 정상인 줄도 몰랐어요. 아침에 일어날 때 되게 힘들고 한두 시간 몸 풀고 땀 쏟으면 말랑말랑해지거든요. 무용은 물론 운동하는 분들은 통증을 동반하고 살아요. 통증을 멈추기 위해서 몸을 또 쓰면 아픔이 반복되고요. 이번에 주원 언니도 디스크 때문에 몸이 좋은 상태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춤을 추기 위해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너무 춤을 사랑하는구나 느꼈어요.”

    무용수로서 한예리 역시 ‘단순하게 좋아해서 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때는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해서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확실히 힘든 일은 멋모를 때 해야 합니다(웃음). 연기를 하면서 다행히 난 좋아하는 걸 또 만났구나 해요. 다만 연기는 좋아하는 만큼만 하고 싶어요.”

    리넨 소재 드레스는 기준(Kijun).

    무용을 왜 좋아하는지 말로 표현하기 쉽진 않다고 했지만 한예리는 어떤 순간에 대한 얘길 들려줬다. 몸에 집중했을 때 만나는 세상이다. “몸에 계속 집중하면 그 순간만큼은 다른 세상이거든요. 저만을 위한 세상이고 홀가분해져요. 그리고 무대에 섰을 때 관객이나 같이 군무하는 친구들이 주는 에너지를 받을 때 발바닥부터 찌릿찌릿해요.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기분인데 바닥에 제 발이 짝짝 붙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다가 음악이랑 딱 붙는 순간 희열이 엄청나고요. 라이브로 에너지를 쓰는 것도 너무 좋고 관객과 소통하는 느낌도 좋고요. 그래서 그렇게 무용을 좋아했나 봐요.” 급하게 준비하느라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한예리는 <디어 루나>를 연습하며 매일 몸 푸는 시간이 좋았다고 했다. 무대에 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매일 제 몸의 상태를 정갈하게 만드는 시간이 큰 힐링이 됐다고. 지금 드는 생각은 늦기 전에 ‘미친 듯이 춤추는 공연을 해보고 싶다’다. 이어서 한예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지금이 제일 젊을 땐데 빨리 한번 해야겠어요.”

    무용만 하던 한예리가 처음 영화와 연이 닿은 건 김민숙 감독의 <사과>에 살풀이 무용수로 출연하면서부터다. 본격적으로 배우가 된 후에도 <육룡이 나르샤>, <최악의 하루>, <춘몽> 등 여러 작품에서 춤추는 모습을 선보였다. 감독들은 무용수이기도 한 한예리로부터 영감을 받아 인물의 직업을 바꾸고 남산 아래든 옥상이든 춤추는 장면을 넣었다. 한예리는 <육룡이 나르샤>에서 전공인 한국무용을 선보이기도 했고 <춘몽>에서는 자유롭게 몸부림치기도 했다. <최악의 하루>에서 은희가 료헤이를 위해 춤춘 장면은 우리에게도, 한예리에게도 사랑스럽게 남았다.

    배우, 무용수로서 다른 점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한예리는 “연기하며 꽉 채워진 감정을 춤추며 비운다”고 두 개의 정체성을 잘 운영하고 있음을 말해왔다. 프로로 활동하는 무용수만큼 실력이 안 되면서 욕심을 부리는 게 아닌가 생각도 했지만 할 수 있는 만큼 무대에 오르고자 한다.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공연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에 꾸준히 오르고, 무용을 생소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 무용을 접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대의를 내비치기도 하지만 그녀는 정말 순수하게 자신을 위해서도 무용을 한다. “감정적으로 던지는 배우 일을 하다 보니까 신체를 더 던지고 싶을 때가 있어요. 에너지를 누르는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이걸 터뜨려서 다 쏟아내고 나면 해소되는 것들이 있어요. 코로나로 움직이는 반경이 너무 좁아져서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도 있고요. 걷기, 뛰기 같은 운동보다는 조금 더 제 몸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요”라며 몸이 근질거린다고 했다.

    A라인 가죽 소재 미니 원피스는 라카지(La Cage).

    드라마, 음악, 영화 등 많은 영역에서 기존 장르로 구분이 어려워지듯 무용 역시 마찬가지다. 앞서 “그 사람의 형태나 움직임 같은 것이 나와서 그 사람의 춤이 된다. 장르가 아니라 누구의 춤을 보러 간다”고 요즘 무용계의 흐름을 알려줬지만 한국무용을 전공한 한예리에게는 정화수처럼 맑고 잔잔한 느낌이 있다. “정적인 느낌을 좋아해요. 에너지를 밖으로 뻗는 것보다 안으로 담는 걸 좋아하고요. 한복의 형태도 네모반듯하게 떨어지는 느낌이 없잖아요. 곡선을 중요시하듯이 한국의 춤도 그렇게 변형되고 지속되어왔어요. 선생님들이 ‘공간이 도화지라면 너의 손은 붓끝이라고 생각하고 그림을 그려라’라고 가르치시거든요. 한복은 노출되는 부분이 손끝과 발끝 정도밖에 없기 때문에 선의 흐름이 중요한데 그런 움직임이 멋있어요.”

    춤은 의복의 형태, 시대적 배경과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한예리는 한국무용은 무대라는 공간 자체가 방이었다고 설명했다. “방은 천장이 낮잖아요. 지금은 앞쪽을 보면서 춤을 추지만 예전에는 사방을 보면서 췄다고 들었어요. 한복에 어울리는 움직임을 찾아온 거죠. 한복은 가슴을 동여매는데 그러면 자연스럽게 갈비뼈가 벌어질 수 없는 상태가 돼요. 몸이 말린 상태에서 춤을 추니까 팔이 벌어질 수가 없고요. 안쪽으로 닫히면서 움직이게 되니까 계속 안쪽으로 움직임이 돌게 돼요.” 요즘 다시 흥미가 생긴 춤은 궁중 정재다. “어릴 때는 심심하게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놀이로 왕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만든 춤이다 싶어서 재미있어요. 궁중에서 연회를 열며 어떤 춤인지 노래로 설명해주면서 시작해요. 포구문에 공을 넣은 무용수에게는 꽃을 주고 넣지 못한 무용수에게는 먹으로 얼굴에 그림을 그리고요. 연꽃에서 나와서 추는 연화대무라는 춤도 있고 정말 다양해요.”

    수묵화 느낌의 검정 리본 리넨 드레스는 기준(Kijun).

    여백미를 살린 동양화 느낌의 화이트 실크 드레스는 제이든 초(Jaden Cho).

    섬세한 컷아웃 디테일의 네오프렌 소재 드레스는 제이든 초(Jaden Cho).

    춤에는 기술적인 면이 있지만 인성을 제대로 갖춰야 아름답게 출 수 있다고 한다. 무용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는 춤출 때 가장 솔직해진다는 것이다. 한예리는 자신에 대해 알게 되면서 표현되는 춤이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살풀이는 추면 출수록 어려운 춤이다. “선생님들이 10대, 20대, 30대에 추는 춤이 모두 다르다고 말씀하세요. 세월이 쌓이면서 경험이 생기잖아요. 연기할 때처럼 춤에도 경험이 다 드러나요. 그래서 아무것도 없이 마냥 깨끗하게만 추던 때랑 세월의 풍파를 견디고 나서 춤을 출 때 에너지가 다르다고요. 나이가 들면 몸은 굳고 나쁜 버릇도 생기지만 나름의 멋이 있다고, 너라는 사람을 표현하는 게 된다고요. 그런 지점은 연기랑 비슷해요.”

    그래서 한예리는 누구나 춤을 출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집에 있다가 엉덩이 한 번 씰룩씰룩하는 것도, 조금 전 화보 촬영이 끝났을 때 덩실덩실 기지개 켜듯 위로 올린 두 팔도 모두 춤이다. “예전에는 춤을 잘 춰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자기답게 움직이거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춤이지 않나 싶어요. 거창할 필요가 없어요. 누군가를 위해서 춤을 추기보다 자신을 위해 춤을 추는 게 좋고요. 그럼에도 춤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냥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추라고 말하고 싶어요. 만약 어떤 춤을 배워보고 싶다면 그래야겠지만, 어떤 사람의 움직임에서 나오는 솔직함은 서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번짐 효과를 연출한 비대칭 소매의 실크 톱은 스포트막스(Sportmax).

    한편 코로나가 헝클어놓은 시간 속에 배우 한예리에게는 아카데미 시상식 참석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있었다. 불과 3개월 전이었지만 한예리에게는 오히려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지나가버린 느낌이다. “딱히 변화를 체감할 순 없어요. 아카데미 시상식에 다녀왔어도 제 생활은 똑같아요. 평소처럼 드라마 촬영하고 있고 그저 화보를 좀 더 자주 찍고, 다른 분들이 좀 더 알아봐주는 정도예요. 다들 아카데미 어땠냐고 궁금해하시는데 현장에 있었지만 정말 TV를 보는 느낌이었어요(웃음). 정신없이 스케줄 마치고 돌아왔고 자가 격리 하는 2주 동안 가만히 방에 있어서 더 먼 과거처럼 느껴지나 봐요. 바로 드라마 <홈타운> 촬영이라서 계속 대본만 봤거든요.” 우리 귓가에는 한예리가 불렀던 <미나리> ‘Rain Song’의 온기가 남아 있는데, 한예리의 차기작 <홈타운>은 눅진한 스릴러 장르물이다. “주인공들이 계속 힘든 상태를 연기해야 해서 매번 현장에 갈 때마다 즐거운 ‘홈’은 아니구나 해요(웃음). 누가 죽었는데 어떻게 신날 수가 있겠어요. 다른 배우들에게 말도 못 시키겠고요.” 2년 전 40도가 넘는 날씨에 오클라호마 트레일러에서 <미나리> 가족들과 엄청난 더위와 씨름했건만 또다시 차원이 다른 더위를 경험하고 있다. “<홈타운>도 너무 더워요. 배경이 10월이라 긴팔 점퍼를 입고 촬영하고 있거든요. 앞으로 10도가 더 오를 텐데 다들 걱정하고 있어요. 위로라면 <미나리> 때가 더 뜨거웠다는 것? (웃음) 그런데 그때는 햇살이랑 초록이 싱그러웠어요. 뭔가 살아 있는 생명력이 느껴졌거든요. <홈타운>에서는 계속 비가 옵니다.”

    오늘의 초청 무용수 한예리에게 마지막으로 실제로 축하 무대를 올린다면 어떤 춤이 적당할지 물었다. “엄청 신났으면 좋겠어요. 다양한 세대의 다양한 여성이 무대에 올라 각자의 음악에 맞게 즉흥적으로 움직여도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굉장히 한국적인 느낌으로 가보면 어떨까요? 시대별로 복식을 쭉 훑어보는 거죠. 복식과 춤이 어떻게 같이 변화해왔는지 보여주는 춤도 되게 재미있을 것 같아요.” 맑은 눈으로 탐험한 인간의 감정을 솔직한 몸짓으로 드러내는 무용수, 투명한 마음으로 우리 가슴을 어루만지는 배우. 상상 속 연회를 마친 한예리는 여전히 몸이 근질거리는 듯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저는 이제 집으로 갑니다. 내일은 목 졸리는 장면을 찍어야 하거든요(웃음).” (VK)

    블랙 울 소재 롱 드레스는 디올(D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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