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아시아 첫 개인전을 연 피오나 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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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아시아 첫 개인전을 연 피오나 배너

2021-09-01T20:09:51+00:00 2021.09.02|

서울에서 아시아 첫 개인전을 연 영국 아티스트 피오나 배너가 〈보그 코리아〉를 위해 특별한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패션 사진가  엠마 서머튼이 카메라를 잡고 공기 주입식 전투기가 된 모델들은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채 색다른 캣워크를 선보인다.

아티스트 피오나 배너. 그녀는 오랜 친구이자 세계적인 포토그래퍼 엠마 서머튼과 의기투합해 새로운 패션 에디토리얼을 만들었다.

피오나 배너(Fiona Banner)의 몸에는 ISBN 바코드가 새겨져 있다. 등허리 부분의 이 문신은 작가 스스로가 정식으로 등록된 하나의 출판물임을 증명한다. 2009년 ‘The Vanity Press’라는 이름하에 출판을 시작한 그는 자기 자신은 물론 사물에 각각의 ISBN 번호를 발행하고 퍼포먼스로서의 출판을 통해 기획된 역사, 전기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같은 출판물은 갤러리를 벗어나 아마존 등을 통해 세계로 유통되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언어를 통해 이미지를 구술하고 이미지를 둘러싼 언어를 활용해 작품을 발표하는 그에게 세계는 일종의 언어적 조합이다. 화려한 이미지와 텍스트의 편집으로 허영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패션 매거진은 그러한 세계의 축소판일 것이다.

세 명의 모델 케이틀린 배너, 에반젤린 링, 커스티 해리스가 피오나의 오브제를 입고 퍼포먼스를 펼쳤다. 피오나의 오브제에 집중하기 위해 블랙 타이츠에 롤러스케이트로 자유로운 움직임을 연출했다.

피오나 배너와 <보그>의 협업은 지난 6월 서울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그의 아시아 첫 개인전 <프라나야마 타이푼(Pranayama Typhoon)>이 열리면서 기획됐다. 2002년 터너상 최종 후보로 선정된 그는 2010년 영국 테이트 브리튼 전시 당시 실제 군대에서 쓰던 두 대의 전투기 ‘해리어와 재규어(Harrier and Jaguar)’를 설치해 화제를 모았다. 추락하는 새처럼 거꾸로 매달린 해리어와 배를 드러낸 채 고꾸라진 재규어는 고풍스러운 미술관에 박제된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괴물 같았다. 살상 기계인 전투기의 이름이 개와 맹수에서 유래한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바라캇 컨템포러리의 전시에는 공기 주입식으로 형태를 부풀리는 풍선 타입의 전투기 모형 팔콘(Falcon)이 등장한다. 청와대와 경복궁 사이에 위치한 갤러리에서 바닥에 엎드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잿빛 전투기를 만나는 건 묘한 기분이다. 사나운 ‘매’를 뜻하는 팔콘은 매의 부리와 날개를 본떠 만들어진 유인용 미끼 전투기다. 배너는 실제로 이 전투기가 생산된 중국의 어느 지역에서 전투기 형태의 옷 두 벌을 제작했다. 그리고 코로나로 한동안 영국이 봉쇄된 동안 영상 작업에 들어갔다. 서울 전시에서 처음 선보인 영상 <프라나야마 오르간(Pranayama Organ)>이다. 팔콘 전투기 의상을 입은 배너는 황폐한 바닷가를 배경으로 또 다른 미끼 전투기 타이푼(Typhoon) 의상을 입은 배우와 함께 느린 춤을 춘다. 불길하고도 웅장한 파이프오르간 연주와 거대한 생명체의 호흡을 연상시키는 공기를 주입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흐르는 가운데 부리를 맞대거나 날개를 펼치는 두 사람(전투기)의 제의적 퍼포먼스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프고 거룩하다.

이 의상을 활용해 촬영을 제안한 건 배너였다. 그가 화보로 자신의 작업을 선보이는 건 처음이다. 우리는 <보그> 지면을 퍼포먼스 무대이자 한 권의 갤러리,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2019년 배너는 한 포럼의 이브닝 퍼포먼스로 패션쇼를 연출한 적 있다. 헬베티카를 비롯한 여러 글꼴로 이뤄진 대형 풀 스톱(Full Stop, 마침표)을 검은색 헬륨 풍선으로 제작해 모델들이 그 풍선을 들고 퍼레이드를 펼친 것이다. 작가는 패션쇼 ‘런웨이’를 활주로라는 본래의 의미와 공연 무대, 두 가지 모두로 받아들였다. 패션쇼 캣워크와 디스토피아적 군사 행렬은 전혀 다른 세계 같지만 공통점이 꽤 많다. 반드시 정해진 옷을 입어야 하고, 웃어선 안 되며, 양식화된 독특한 걸음걸이로 걷는다.

배너는 모델들에게 브랜드가 지워진 옷을 입히고 언어의 추상적 상징인 풀 스톱을 연결함으로써 패션쇼의 이데아를 유의미한 여백의 ‘하이쿠 극장’으로 만들었다. 풀 스톱은 배너의 풍경화 시리즈에선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검은 표류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쉽게도 코로나19 확산으로 작가의 서울 방문은 무산됐지만 우리는 각각 서울과 런던에서 화상 통화와 메일을 통해 촬영 컨셉을 논의했다. 이러한 비대면 협업은 배너에겐 익숙한 방식이다. 그는 베를린에 거주 중인 소설가 톰 매카시(Tom McCarthy)와 구글 문서 도구를 이용해 각자의 파트를 작성하는 식으로 출판물을 완성한 바 있다. <보그> 촬영에는 호주 출신의 사진가 엠마 서머튼(Emma Summerton)이 기꺼이 합류했다. 최고의 패션 사진가 중 한 명인 엠마는 작가의 오랜 친구다. 이 멋진 여성 아티스트들이 보내온 결과물은 지금 당신이 보는 바와 같다.

엠마 서머튼과는 어떤 인연인가? 엠마와의 협업을 먼저 제안해 뜻밖이었다. 수년 전 엠마가 내 스튜디오를 찾아왔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패션계에서 일하기 전이었고 우린 많은 작업을 함께 했다. 엠마는 늘 스튜디오에 있는 것만 찍었는데, 폴라로이드 사진 수백 장이 모두 아름다웠다. 난 엠마가 패션 사진가로 성장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녀의 사진에 담긴 초현실적 분위기와 퍼포먼스적 에지를 사랑한다. 이번 프로젝트를 함께 할 수 있게 돼 기쁘고 <보그 코리아>에도 감사하다.

프로젝트의 기획자로서 촬영 컨셉을 설명해달라. 지면을 퍼포먼스 공간으로 여긴 채 화보를 촬영했다. 패션 매거진의 맥락에서 매거진에 개입하고 있지만 여기에 패션 정보는 없다. 실제 옷이나 브랜드 이름은 빠진 상태다. 서울 전시에서 공개한 <프라나야마 오르간>의 두 주인공을 이미지화한 것으로 영상에서는 대형 미끼 전투기가 전투기 모양 코스튬으로 변하고 두 명의 인간이 작은 전투기 로봇처럼 과장된 자세로 공격적 구애 의식을 행한다. 나는 이걸 일종의 위장, 코스튬의 한 형태로 본다. 반인반수처럼 절반은 인간, 절반은 전투기. 혹은 맹금류(팔콘, 매)나 바람(타이푼, 허리케인) 같은 절반은 자연, 절반은 파괴적 기계다.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충돌과 갈등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이 화보는 그러한 페티시를 다룬다.

모델들은 모두 여성이고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있다. 무엇을 의미하나? 모델들은 나와 꽤 오래 알고 지냈다. 아티스트 커스티 해리스(Kirsty Harris)는 영상에 출연했고, 모델 겸 아티스트, 뮤지션인 에반젤린 링(Evangeline Ling), 내 딸 케이틀린 배너(Caitlin Banner)도 그렇다. 우리는 롤러스케이트를 신었는데 하이힐이나 동물 발굽을 연상시키거나 비행기 바퀴 같다. 또 낙하산과 롤러스케이트가 등장하는 로버트 라우셴버그(Robert Rauschenberg)의 1960년대 퍼포먼스에 대한 답례의 의미도 있다.

피오나 배너와 엠마 서머튼이 공동 작업으로 완성한 이미지. 피오나 배너의 아이코닉한 전투기 코스튬을 모델 에반젤린 링이 입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로버트 라우셴버그는 <펠리컨>에서 낙하산을 펼친 채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가 무용수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의 무대장치를 만들고, 또 다른 친구 존 케이지(John Cage)는 발표회에서 그 유명한 4분 33초를 연주하던 시절이다. 당신 역시 엠마 서머튼, 톰 매카시 등 다른 예술 장르의 아티스트와 협업한다.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매카시와는 서울 전시에서도 텍스트 작업을 함께 했다. ‘편집되지 않은 듯하지만 조심스럽게 편집된 구성의 텍스트 인터뷰’라는 컨셉으로 톰과 함께 텍스트를 써 내려갔다. 부조리극 같은 전시 서문이다. 모든 전시는 일정 기간 진행된다는 점에서 연극과 비슷하지 않나. 우리는 두 생명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연극 대본식으로 만들었다. 이번 전시에서 주요하게 다룬 주제 중 하나가 이름 짓기인데, 태풍/T/톰(Typhoon/T/Tom)과 매/F/피오나(Falcon/F/Fiona)로도 풀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텍스트를 프린트한 종이 뭉치를 쌓아 조각 작품처럼 한쪽에 전시했다. 출판물의 느낌을 주고자 한쪽 가장자리를 바인딩했는데 관람객이 페이지를 한 장씩 떼어갈 수 있다. 출판물인 동시에 조각이며 퍼포먼스인 셈이다.

파트너이자 저널리스트 겸 다큐멘터리 제작자 닉 로젠(Nick Rosen)과 협업할 계획은 없나? 환경 캠페인의 일환으로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책도 출간했다. 하하. 닉과는 그저 삶이랄까…

예정대로 서울에서 촬영을 진행했다면 어땠을까? 작품 배경이 되는 장소 역시 당신의 작업에서 꽤 중요하니까. 맥락은 늘 작업의 일부다. 설치 작품의 배경이 된 장소 중 하나인 채널 터널(Channel Tunnel)의 경우, 영국과 프랑스 국경을 연결하는 채널이자 분립을 상징한다. 또 아테네는 폐허로 유명한 도시이자 잃어버린 헤게모니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휴전선과 가까운 서울에서는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그 탐험을 함께 하지 못해 유감이다.

피오나 배너와 엠마 서머튼이 공동 작업으로 완성한 이미지. 피오나 배너의 아이코닉한 전투기 코스튬을 모델 에반젤린 링이 입었다.

<프라나야마 오르간>을 촬영한 그 황량한 해변은 어디인가? 영국 남부 해안가로 오랜 시간 해저에 잠겨 있던 암석이 산을 이뤄 우주의 어느 행성처럼 환상적인 곳이다. 영국의 국경이기도 하다. 나에겐 굉장히 익숙한 지역으로 종종 수영하러 가곤 한다. 물속에서 수몰된 고대의 숲을 상상하면 묘한 기분이 든다.

해양 풍경화에 문장 부호를 그려 넣은 회화 시리즈에는 고대의 신비로운 유물처럼 바다 위를 떠다니는 수수께끼 암표가 등장한다. 물결 표시 ‘~’를 한국적 특색을 담은 문장 부호로 읽어낸 점이 인상적이다. 한글에 대한 이해를 위해 시각적으로 어떻게 배치되는지 구두점과의 관계가 어떠한지 공부하면서 물결표(Tilde)가 지역적으로 바뀌는 부호라는 걸 알게 됐다. 영어에서도 마침표와 다르게 통용되지만 언어적 내용을 포함하지 않는 언어의 일부다. 해경화와 잘 어울리는 물결 모양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또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조수(Tide)라는 영단어와도 자연스레 연결된다. 변화무쌍한 바다의 풍경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해안선의 모습이다. 나는 해경화 시리즈에서 국경과 통로에 대해 고민하며 더 나아가 우리가 국가에 따라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물리적이고 정치적인 변화의 파도가 자연과 기후 변화로 이어지는 방식을 생각했다. 그림 중앙에 놓인 물결표는 바다의 표식이자 장벽이다.

당신은 <더 배니티 프레스> 출판사의 발행인이자 정식 등록된 출판물이다. 당신의 ISBN 번호와 제목이 궁금하다. ISBN은 등록 연도인 2009, 제목은 내 이름이다. 늘 아이디어와 예술이 유통되는 방식에 관심이 많았다. 출판이라는 형식적 구조에서 어떻게 매체가 탄생하고 세계를 떠도는지 궁금했다. 더불어 전기(Biography)의 신화와 모조성, 자아 개념의 불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주어진 맥락을 쉽게 가정해서는 안 된다. 나는 사물의 가치에 대해 다루는 것을 좋아한다. 출판사를 만들어 작품을 발행하기 시작하며 ‘피오나 배너 aka 더 배니티 프레스’라는 별명도 생겼다.

‘허영의 출판사’는 정확히 무슨 뜻인가? 우리가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예술과 우리를 돌아보는 또 다른 유형인 ‘허영(Vanity)’ 사이에는 균열이 있다. 스스로에게 관대한 아마추어 자영 출판사에서 자주 쓰는 용어로 일종의 언어유희다.

벽에 투영한 프로젝션과 실제 오브제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극적 대비를 이룬다.

출판물의 목적은 누군가에게 ‘읽히는 것’이다. 독자가 당신에게서 무엇을 읽길 바라나? 하하! ‘피오나 배너 aka 더 배니티 프레스’는 제약이 없는 무편집 출판물이자 진행 중인 퍼포먼스면서 읽지는 못하는 작업이다. 부조리한 제스처다.

NFT 아트 시장은 어떻게 여기나? 최근 크리스티와 소더비에 NFT 아트 작품이 나왔는데, 블록체인 기술을 통한 일종의 인증서로 출판물의 ISBN과도 비슷한 역할이다. NFT는 부동산과 시장의 맥락에서 분리될 때 비로소 흥미로워질 것이다.

작업실은 어떤 곳인가? 작가의 작품과 그 작업이 탄생하는 공간 사이엔 연관성이 있다. 여긴 원래 오래된 넥타이 공장이었다. 처음 들어왔을 땐 건물 바닥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는데, 넥타이를 큰 통에 담아 공장 안쪽에서 입구까지 한 번에 굴려 바깥 언덕 아래로 운반했다고 들었다. 이 공간이 내 작업과 어떻게 맞닿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용도로 두루두루 쓸 수 있어 만족한다. 때로는 출판사였다가 엉망진창인 조소 작업실이었다가 오늘 같은 날은 가끔 촬영 세트장으로도 쓰인다.

이제 우리의 만남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됐다. 이 인터뷰의 마지막 문장이 무엇이길 원하나? ‘Full Stop(마침표)’ 세 개로 끝내자. ‘To be continued’ 혹은 ‘Should it be’의 뜻을 담아…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