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을 향한 기도와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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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을 향한 기도와 기대

2021-09-27T19:39:18+00:00 2021.09.28|

클레어 루이즈 프로스트는 뉴욕과 이스탄불을 오가며 활동하는 디자이너로, 영화 제작자이자 배우다. 그녀가 디자인을 가르치기 위해 찾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카불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뾰족하고 장엄한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계절마다 다르긴 하지만 먼지나 진흙으로 가득한 도시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다채로운 컬러가 곳곳에서 눈을 즐겁게 한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장미와 포도 덩굴로 유명한 곳이지 않나! (카불은 인도 무굴 왕조의 시조 바부르(Babur) 왕의 유명한 정원이 있던 곳이다. 그리고 몇 해 전 식물을 심고 새롭게 단장했다.) 사실 그곳은 꽃과 정원이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토양이 매우 척박하고 기후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프간 사람들은 훌륭한 정원사들이며, 자긍심도 굉장하다. 그래서 다채로운 색채가 도처에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스물여섯 살, 20대 중반의 나이로 이스탄불에 살 때였다. 아프간 비영리 조직 ‘자르도지(Zardozi)’에 채용되어 아프간 여성에게 패션 디자인을 가르쳤다. 교육 대상은 현지 시장에 판매할 자수 튜닉과 헤드스카프 등 의류와 액세서리를 소량 만드는 이들이었다. 2011년에서 2015년으로 시간이 흐르는 사이, 오픈 소스 디자인을 제공하는 내 역할이 마자르(Mazar), 헤라트(Herat), 잘랄라바드(Jalalabad), 카불에 있는 자르도지의 스태프를 위해 연간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이 네 곳은 문화, 스타일, 언어까지 뚜렷하게 달랐다.

나와 함께 일한 이 비영리 조직의 임무는 여성이 가족을 부양할 경제적인 기회를 발굴하고 그들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런 여성 중 상당수는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자수와 기본적인 바느질 기술이 있었다. 아프간 자수는 독특하고 특별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종류는 구한자수(Counted Stitch Embroidery) 혹은 타르 쇼마(Tar Shomar)다. 기하학무늬가 그려진 패브릭이 작고 정갈한 스티치로 뒤덮인다. 무척 섬세하고 정갈하다. 그래서 수작업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자수는 칸다하리(Kandahari) 자수다. 이것은 남성의 튜닉에서 볼 수 있는 종류로, 자수의 질감이 희미하게 빛나도록 주로 톤온톤, 즉 여러 색조를 띠도록 디자인한다. 이들 여성의 힘은 솜씨에 있었다. 그리고 그 교육 강좌는 튜닉, 헤드스카프, 쿠르티(Kurti), 다만(Daman, 카불의 일하는 여성을 위한 스커트 정장)뿐 아니라 아기용 베개, 담요, 침대 이불 등의 디자인에 도전하도록 이끌었다.

나는 배색하는 방법으로 컬러 믹싱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빨강과 파랑을 섞은 보라, 초록과 약간의 노랑을 섞은 파랑 등에 대해 설명했다. 또 차가움에 차가움을 더한 톤, 따뜻함이 가미된 차가운 톤, 따뜻하고 차가운 톤과 더불어 만들어낼 수 있는 각기 다른 효과를 이야기했다. 많은 눈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래서 우리는 수채화 그림 물감과 색상환을 통해 기본 내용에서부터 초점을 맞췄다. 주황은 노랑을 더한 빨강, 이 보라 옆에 있는 파랑은 보라를 검정으로 보이게 만든다는 걸 알려줬다. 특히 한 여성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톤과 무브먼트를 본능적으로 이해하는 타고난 디자이너였다. 그녀의 작품과 재능은 그 비영리 조직이 있는 건물 지하실의 회색빛 산업용 카펫으로 덮은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나에게 배운 것 이상이었다. 그녀가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아트나 디자인 학교에 진학해 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전문 경력을 쌓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와 어머니는 삼촌과 살았고, 그가 그녀의 결혼 상대와 그녀의 미래를 비롯한 모든 것을 결정했다.

잘랄라바드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대도시에서 온 여성처럼 청바지와 튜닉을 입는 대신 전통적인 샬와르 카미즈(Shalwar Kameez)를 착용했다. 잘랄라바드는 다른 곳보다 부유하지도 않고, 좀 더 보수적인 도시였다. 그래서 모든 잘랄라바드 여성은 바깥에서는 검정 아바야(Abaya)를 입었다. 이 망토형 투피스를 입으면 두 눈만 보인다. 그리고 수많은 아프간 여성과 마찬가지로 패브릭을 사러 외출할 때 앞 좌석에 앉지 않았다. 남성 운전자 옆에 앉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실내에서 아바야를 벗으면 짙은 레드 립스틱과 파우더로 치장한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패턴이 있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아바야를 벗어서 세 가지 레오퍼드 프린트가 그려진 헤드스카프와의 앙상블을 보여줬다. 그녀는 미국으로 떠난 한 남자가 청혼을 하고,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될 거라는 판타지를 갖고 있었다.

이 여성들과 함께하는 점심시간이 나는 너무 즐거웠다. 바스마티 쌀밥과 스튜로 뭉근히 끓인 콩, 신선한 민트와 고수로 만든 샐러드, 보온병에 가득 찬 녹차와 홍차를 따라놓은 머그잔이 점심상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오른손으로 쌀밥을 떠서 먹는 우아하고 능숙한 모습이 나를 놀라게 했다.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따라 하려고 시도했고, 누군가가 내게 숟가락을 건넸다.

그들은 내가 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한 발을 페달에 올려놓은 채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재봉틀을 사용할 수 있었다. 재봉틀은 야생동물 같았다. 컨트롤이 쉽지 않아서다. 하지만 그 여성들은 재봉틀로 ‘부웅부웅’ 소리를 내며 재단된 옷을 바느질했다. 우리가 사용하던 줄자는 표준이 아니었다. 몇몇 줄자가 인치보다 더 크게 센티미터로 표기돼 있었다. 하지만 이 학생들은 ‘큰 줄자’ ‘작은 줄자’라 불렀다. 모든 측량을 같은 줄자로 하는 걸로 기억하는 한 센티미터를 사용한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들의 세계는 이렇게 사소하고 짜증 나는 장애물로 가득했다.

2015년에 마지막으로 카불을 방문했다. 그리고 몇 주 후 내가 종종 묵었던 파크 팰리스 호텔이 탈레반의 공격을 받았다. 14명이 사망했다. 이미 그곳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그곳에 가는 것이 이제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여전히 그렇다. 비영리 조직과의 업무가 어려워지고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받는 자금 지원이 줄어들었지만, 운 좋게 카불의 장인들과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패브릭과 옷에 사용할 자수를 그들에게 의뢰하기 시작했다. 또 전통 방직공이자 11명의 딸을 둔 남성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자수 박힌 패브릭과 스트라이프에 스토라이(Storai), 하시나(Hasina), 파리마(Farima), 얄다(Yalda), 마리암(Maryam), 다닌(Daneen) 등 존경하는 그곳 여성들의 이름을 붙였다. 다른 작품에는 카불, 마자르, 헤라트 등과 같은 도시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이스탄불에 패브릭, 자수 슬리퍼, 칸다하리 자수가 들어간 의류 등의 생산 시스템을 세팅하고 왓츠앱과 DHL을 통해 그 여성들과 계속 일했다. 주로 뉴욕에서 지내는 요즘도 이 관계를 이어가기로 다짐했다. 세상이 아프가니스탄과 그곳에 사는 놀라운 사람들이 지닌 아름다움을 알아봤으면 좋겠다.

요즘 카불에서 나를 위해 생산 시스템을 관리해주는 여성이자 내가 만난 가장 똑똑한 사람과 문자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이런, 정말 안됐어요! 당신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안전하기를 바랍니다!” 그녀의 답은 심플했다. “우리 모두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기도합시다!” 기도가 효과적이길 기대한다.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