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나와 트레이닝복

Fashion

달고나와 트레이닝복

2021-10-22T10:24:50+00:00 2021.10.19|

K-컬처가 팝 컬처가 되는 순간의 낯섦과 희열.

누군가 화제의 영상이라며 터키의 한 요리사가 지름 50c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달고나를 만드는 영상을 공유했다. 설탕만 넣어 만든 거대한 원에 하트 모양을 찍어 얼굴보다 큰 하트를 떼어내는 그 영상 아래엔 급박한 느낌의 댓글이 즐비했다. 모두 한결같이 “베이킹 소다가 빠졌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런, 달고나의 ‘달’도 모르는 분 같으니라고!

터키는 물론이고 미국, 러시아, 인도네시아 등 세계 곳곳에서 달고나를 만들고 있다. 500년쯤 지난 뒤 역사학자들이 2019년 팬데믹 이후 먹거리 유행을 조사하다가 세계 각지에서 달고나라는 것을 만들어 먹었다는 흔적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 게 아닐까. 국수나 만두가 세계에 다양한 형태로 전파되기까지 수천 년이 걸렸다는데 달고나가 세상을 장악하기까지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한동안 <오징어 게임>의 인기에 무심해 보였던 고고한 매체 <뉴욕 타임스>까지 달고나의 토종 이름인 ‘뽑기(Ppopgi)’와 그 유래를 설명하며 국자를 활용해 정통 방식으로 달고나를 만드는 법을 선보인다. 몇 주 사이 유튜브를 통해 달고나 레시피를 배운 누군가가 “프라이팬이 아니고 국자를 이용하다니 잘못되었다”고 댓글을 달자, 그 아래에 “국자가 맞는 방식이다”라며 다른 이가 (영어로) 바로잡는다.

<오징어 게임>이 9월 17일 넷플릭스를 통해 여러 국가에 동시 공개될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로 세상 사람들이 디테일에 열광하며 팝 컬처 신에 영향을 미칠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20세기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면 하굣길에 뽑기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가 드물다. 성공하면 하나를 공짜로 받을 수 있는 기초 도박의 쾌감과 부모님이 말리는 대표 불량식품이라는 금기까지 더해져 초등학교 기억 중 꽤 강렬한 순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집에서 몰래 만들어야 하는 용기가 필요했던 스낵이 세계가 열광하는 트렌디 푸드로 격상할 줄이야. 달고나의 정체성을 두고 ‘쿠키’와 ‘캔디’ 사이에서 논란 중인 외국인들을 보고 있노라니 영화 <극한직업>의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하는 고뇌가 담긴 대사가 떠오르고, 이 문제는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양자택일만큼이나 심각한 고민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은 <뉴욕 타임스>의 푸드뿐 아니라 패션 기사에도 등장했다. 팬데믹 시기의 유행 패션이 공교롭게도 트레이닝복인 가운데 <오징어 게임>의 등장으로 트레이닝복이 더 주목을 받고 있다는 분석 기사였다. 팬데믹 유행 이전에 한국인 시청자에게 매우 친숙한 체육복에 실내화 차림 컨셉이었지만 한국에서의 맥락은 이제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디스토피아의 놈코어화(Normcore-ization)”라는 문장까지 보니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 추억의 ‘추리닝’ 패션은 할로윈 코스튬 패션계에서도 상승세다. 코스튬을 준비 중인 외국 팬들은 트레이닝복과 핫 핑크 점프수트, ‘다스베이더’풍 블랙 버버리 후디, 영희 인형 원피스 사이에서 갈등 중이다.

그리하여 <오징어 게임>이 나에게 안긴 후유증이란 이런 것이다. 한국에서 또래 문화를 부단히 경험하고 자란 사람으로서, ‘트렌드’ 카테고리에서 외국인들이 즐겁게 한국 문화를 수용하는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오류를 바로잡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정통 뽑기 게임에서 바늘 사용은 반칙이며 오로지 너의 손과 지략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까? 딱지치기에서 이기면 뺨을 때리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딱지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술래에게 포로로 잡힌 친구들을 모두 풀어줄 수 있는 해방의 게임이라고 바로잡아줘야 할까? 잠깐, ‘술래’는 영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넷플릭스도 처음 경험하는 듯한 콘텐츠의 급작스러운 전 지구적 인기에 왜 내가 유독 책임을 느끼는 걸까? 한국계 한국인에게 익숙한 것들이 세상으로 나가니 매우 신기한 것이 되었는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세상을 들썩이게 만드는 팝 컬처가 되어버리는 상황에 모두 함께 놀라고 있다. <오징어 게임>은 다국어를 지원하는 엔터테인먼트 플랫폼 컬처가 이끌게 될 포스트 팬데믹 대중문화의 신호탄 같기도 하다. OTT 콘텐츠도 유튜브나 틱톡만큼 빠르게 퍼지는 거대한 유행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어떤 수익을 창출하는 골드러시로 이어질지 누구도 섣불리 예측하지 못한다.

BTS가 발표한 노래가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에 오르고,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타고, 한국 배우가 아카데미 배우상을 타고, 한국 드라마가 외국 OTT의 인기 장르로 등극하는 동안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대중문화 현상을 경험 중이다. <오징어 게임> 인기의 기저에는 인생 역전을 위해 가상 화폐와 주식을 도박처럼 거래하는 불안한 세태와 팬데믹이 안겨준 디스토피아 비전이 놓여 있겠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무거운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방편으로 부엌에서 달고나를 만들고 길에서 딱지를 치며 웃는다. 낙오자들의 치열한 사투를 여과 없이 담은 드라마가 되레 사람들에게 웃음과 활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달고나에 베이킹 소다를 한 자밤 넣지 않은들 어떠하리. ‘마이 유니버스’의 가사인 ‘시련’을 ‘실연’으로 발음한들 어떠하리. 이 각박하고 힘겨운 시기에 우리가 지구인으로 함께 웃을 수 있어 다행이 아닌가. 한국의 콘텐츠가 세계 컬처 올림픽 같은 경쟁 레이스에서 1등을 해서 뿌듯한 게 아니라, 살아남은 모든 이들이 함께 노래하고 웃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줘서 기쁘다. 세상에 공명하는 팝 컬처의 컴백이 반가운 가운데, 누군가 달고나 레시피를 물어본다면 정확하게 가르쳐줘야 한다는 ‘TMI 정신’도 따라온다. 서먹한 외국인과 만났을 때 스몰 토크를 위해 <오징어 게임>을 언급하며 여러 토픽을 거뜬히 말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이 콘텐츠는 큰일을 해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