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가와 스포츠인들이 창조해낸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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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와 스포츠인들이 창조해낸 움직임

2021-10-29T12:11:14+00:00 2021.10.27|

공중으로 뛰어 턴을 한다. 한 팔로 지탱한 채 두 다리를 뻗는다. 골반으로 리듬을 만들어낸다.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위해 단련하고 감내하고 훈련한다. 이로써 신체와 정신은 밀착된다. 의지를 통과한 움직임은 삶을 대하는 적극성이다. 그리고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거리감이 의무가 되며 우리는 서서히 움직이길 멈췄다. 댄스에 열광하고 스포츠를 갈망하는 건 본능을 향한 그리움이다. 움직임은 어떤 사고 없이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니까. 스케이트보더, 현대무용가, 리듬체조 선수, 피겨스케이터가 창조해낸 움직임을 만났다. 물처럼 흐르고 불보다 타오르며 바람만큼 완연하다. 두 눈이 시원하다.

 

김민의 턴

노란색 메시 보디수트와 흰색 실크 드레스는 버버리(Burberry), 보석 박힌 머리핀은 무차차모나(Muchacha Mona).

수채화가 번진 듯한 볼륨 퍼프 소매 롱 드레스는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운동화는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 보석 박힌 머리핀은 무차차모나(Muchacha Mona).

리듬체조 선수 김민은 6월 아시아 선수권 대회를 가장 의미 있었던 경기로 꼽았다. “출국 3일 전에 주장 언니 발뼈 두 개가 골절되었어요. 기권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언니 의지가 강했어요. 마취 주사도 기내 반입이 안 됐고 결국 테이핑만 하고 뛰었어요. 경기 후 모두 엉엉 울었죠.” 코로나로 인해 경기장 시계가 멈춘 지 2년째였다. 단체전 배경음악은 BTS의 ‘Dynamite’였다. “외국 코치에게 작품을 받는 경우가 90%죠. 그런데 이번 작품은 저희가 다 짰어요. 어떻게 표현하겠다는 우리의 생각이 담겼어요.” 은메달을 따며 도쿄 올림픽 출전은 이루지 못했지만, 국가 대표 팀에서 마지막이자 성과가 좋았던 시합이었다. 리듬체조 선수로서 활동은 이어가지만 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김민은 국가 대표 타이틀을 내려놨다. 초등학생 김민은 국제 무대에 오른 바 있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개막식 굴렁쇠 소녀가 김민이다. 고모 김인화 선수의 영향으로 다섯 살에 리듬체조를 시작했다. 훈련 강도가 높았지만 그보다 더 강렬한 뭔가는 등장한 적 없다. “몸으로 표현한다는 게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경기를 마치고 박수를 받을 때 찾아오는 성취감에 중독된 듯해요.” 후프, 볼, 곤봉, 리본 중 김민이 자신 있는 수구는 볼이다. “다른 기구보다 크기가 작다 보니 계속 몸에 붙어 있어야 해요. 물이 흐르는 듯한 느낌이에요.” 김민은 음악을 몸으로 표현하는 종목임을 분명히 인지한다. 그래서 경기 중의 표정은 음악 그 자체다. 김민의 또 다른 강점은 정신력이다. “한번 시작한 건 끝까지 가야 해요. 체력도 중요하지만 체력을 이끌어가는 건 정신이에요.” 축구 같은 스포츠도 즐기고 BTS와 더보이즈를 좋아하는 스무 살 김민은 리듬체조 선수로서 또 다른 시작 앞에 서 있다. “운동선수의 끝부분에 와 있으니 부상 없이 잘 마무리하고 싶어요. 이제 운동은 많이 했으니 공부를 더 하고 싶어요.”

 

조현주의 스타일

흰색 라인이 들어간 드레스는 가니(Ganni at Net-a-Porter), 그 위에 레이어드한 오버사이즈 슬리브리스 티셔츠는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

노란색 롱 드레스는 비뮈에트(Bmuet(Te)), 하이톱 운동화는 나이키(Nike).

15세의 스케이트보더 조현주가 나이키 운동화에 데님 재킷을 입고 들어섰다. 한 손엔 가장 친한 친구인 스케이트보드를 들고 있다. 수명을 다한 보드는 그 데크로 볼펜, 반지 등을 만드는 아티스트에게 기부한다. 조현주는 아홉 살 때 TV에서 보드 타는 남자아이의 힙한 스타일에 매료됐다. 미끄러져 내려가는 움직임뿐 아니라 자유로운 옷차림, 연습하느라 해진 신발 모두 ‘쿨’했다. 조현주에겐 스타일이 중요하다. “스케이트보더로서 스타일을 갖고 싶어요. 무릎 방향, 손짓 하나까지 나만의 태를 갖추고 싶어요.” 조현주가 스케이트보드를 사랑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세계의 문화다. “성별, 나이 상관없고 어떤 편견도 없이 보드를 탄다면 모두 친구죠. 멋지지 않나요?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엘리트 스포츠로도 크게 성장할 거예요.” 조현주는 어린이날 보드를 선물 받은 지 4년 만인 2018년 12세에 스케이트보드 국가 대표가 됐다. 하루에 500번씩 넘어지며 연습했다. 낙법을 배우고 보호대를 차지만 멍들고 뼈가 부러지기 일쑤였다. “지금은 부상이 일상이라 무섭진 않아요. 타는 재미가 모든 악조건을 뛰어넘거든요. 물론 계단이 많거나 기물이 높으면 잠깐 두렵지만 괜찮아져요. 완벽히 이 단계를 익히고 다음으로 가면 안전하게 탈 수 있을 거라 믿으니까요.” 한국에는 스케이트보드 연습 여건이 열악하다. 국제 규격에 맞는 경기장도 없고, 경기장은 바닥이 깨지거나 일반인과 함께 연습해 사고 위험마저 있다. 국가 대표로 출전한 첫 해외 대회인 2019 반스 파크 시리즈에서 처음 국제 규격 경기장을 보고 압도될 정도. 하지만 세미파이널까지 올라 실력을 증명했다. 오는 파리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출전이 다음 목표다. “언젠간 스케이트보드 관련 학위도 취득해서 대중에게 이 종목이 자전거 타기처럼 친숙해지도록 힘쓰고 싶어요.”

 

이경구의 선택

리본 디테일 슬리브리스 드레스는 유돈 초이(Eudon Choi).

물방울무늬 니트 드레스는 프라다(Prada), 캘리그래피가 그려진 화이트 티셔츠는 가니(Ganni at Net-a-Porter).

지난 9월 ‘무용인 한마음축제’에서 시각장애인를 위한 무용 음성 해설이 이뤄졌다. 해설자 중 한 명이 현대무용수이자 현대무용단 고블린파티(Goblin Party) 소속 안무가 이경구다. “내가 가장 많이 누리는 공간인 극장이 실은 모두를 수용하지 않는다니 충격이었어요. 무용이 시각뿐 아니라 청각, 촉각으로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하며 화면 음성 해설 작가와 함께 무용 음성 해설을 준비했어요.”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출신으로 2016 춤 비평가상 베스트 5 선정과 함께, 2017 포스트 젊은 예술가상를 수상했다. 2012년 입단한 고블린파티에선 장난꾸러기 도깨비처럼 무거운 주제도 유머 있게 표현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이경구는 기억을 만드는 안무가다. “풀지 못하고 지나친 저의 기억과 감정을 몸으로 이야기해요. 제 춤을 본 관객도 저마다 기억을 갖겠죠. 의미 있는 기억이 되길 바라요.” 이경구가 기억하는 첫 춤은 네 살 때다. 설에 한복을 입고 음악도 없이 팔을 벌리고 눈을 감고 춤을 췄다. 어머니는 딸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 탭댄스, 댄스스포츠, 걸스 힙합 등 여러 춤을 접하게 했다. 현대무용이 가장 늦었다. “열아홉 살 때 TV에서 안은미 선생님의 춤을 봤어요. 제가 글쓰기를 좋아했는데 현대무용가가 움직이면서 이야기를 쓰는 직업처럼 느껴졌죠.” 그에게 춤이란 뭘까. “몸이 할 수 있는 모든 게 춤이죠. 말하고 노래하고 때론 그냥 웃는 자체가 춤입니다. 사실 저는 감정을 말로 잘 전달하지 못해요. 부끄러움도 많이 타고. 춤을 추면 ‘내가 만든 또 다른 사람’이 되어 몸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해요. 어떤 때는 무대에서 다른 시공간에 다녀온 듯 느껴져요.” 그는 이 세계를 많은 이와 공유하고 싶다. “무용을 꼭 한번 배워보세요. 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내 신체를 어디로 데려갈지 선택하며 움직이면 자유를 느낄 수 있죠.”

 

김예림의 몰입

꽃이 그려진 시폰 드레스는 블루마린(Blumarine).

페이크 퍼 소매가 풍성한 주황색 드레스는 에이치앤엠(H&M), 목걸이는 제이에스티나(J.Estina).

“피겨스케이팅은 큰 무대에 홀로, 수많은 관중 앞에서, 2분 50초 혹은 4분 10초 동안 나만의 시간을 펼칠 수 있어요. 게다가 예술과 스포츠가 결합된 종목이죠.” 김예림은 김연아 이후 13년 만에 2018 ISU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한 피겨스케이팅 국가 대표다. 현재 수리고 3학년으로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스무 살이 된다. 그는 2010 밴쿠버 올림픽에서 김연아의 경기를 보고 피겨스케이팅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성장하는 내내 김연아 대표 키즈로 불릴 만큼 좋은 성적을 거둬 6학년 때 국가 대표가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훈련한다. “사실 사춘기에는 반복된 일상이 힘에 부쳤어요. 제가 찾은 방법은 그럴 때일수록 더 열심히 하자는 거였어요. 친구들이 독하다고 했죠.” 김예림은 잦은 부상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햄스트링 근육이 찢어졌지만 한참 후에 알았다. 아픔을 참는 것이 습관이 된 것이다. 오히려 난관은 표현력이었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연기가 쉽지 않았다. “세계 유명 선수들의 영상을 보며 공부했죠. 요즘엔 매 시즌 안무가에게 받는 프로그램 음악을 깊이 들으려고 해요. OST가 많은 편이라 해당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의 감정, 표정, 옷 등도 관찰하죠. 최애곡은 <라라랜드>의 엠마 스톤이 독백처럼 부르는 ‘Audition(The Fools Who Dream)’이에요. 갈라 프로그램을 위한 선곡이었는데, 잘 맞아서 경기용으로 바꿨죠.” 김예림은 동계 올림픽 선발전을 앞두고 있다. 어찌 보면 전성기의 마지막 올림픽 출전 기회라 압박이 클 듯하지만 “메달보다는 두고두고 떠올릴 행복한 기억을 만들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피겨는 이미 제게 많은 기쁨을 준걸요. 일상에선 주위 시선을 많이 신경 쓰는데, 피겨 할 때는 주위가 음 소거되면서 나만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 같아요. 몰입의 즐거움이죠.”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