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재즈 애호가 4인이 꺼내본 재즈의 기억

2021.11.09

by 조소현

    재즈 애호가 4인이 꺼내본 재즈의 기억

    흔들리는 사람들, 한밤의 재즈…

    상징적인 재즈 클럽이 사라졌을 때만 재즈는 뉴스에 등장한다. 하지만 재즈가 우리 삶에 흐르지 않은 적은 없다. 을지로, 성수동 일대에서 작은 재즈 클럽이 성행하는 요즘, 재즈 애호가 4인이 과거인 적 없는 기억을 꺼냈다.

    재즈 바와 재즈 클럽 사이에서

    음악은 꽤 많은 경우 일직선으로 흐른다. 제공자에서 감상자로.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인터플레이(연주자 상호 간의 ‘케미’를 바탕으로 한 연주)의 음악이라고 하는 재즈는 사실 연주자와 감상자의 ‘교감의 음악’이기도 하다. 연주 중에라도 뮤지션이 훌륭한 즉흥연주를 선보이면 관객은 박수로 응원하고, 연주자는 가벼운 미소와 목례로 감사 인사를 전한다. 이렇게,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시선과 호흡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재즈 클럽이다. 그곳은 재즈 뮤지션으로서 정체성과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장소이며 재즈 뮤지션의 자존심이기도 한 존재다. 블루노트나 빌리지 뱅가드 같은 유명 재즈 클럽에서 연주한 이력은 재즈 음악가로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표다. 재즈 연주자들이 유명 음반사에서 앨범을 발표하고 유명 음대의 교수가 되어 재즈 페스티벌에는 수백만 원 이상을 받아야 서는 재즈 스타들이 얼마 안 되는 페이로도 기꺼이 재즈 클럽 무대에 오르는 이유다.

    따분한 이야기를 조금만 더 이어가겠다. 재즈 발전의 기틀은 재즈 클럽에서 닦았다. 연주자가 구상한 것을 가장 자유롭게 실험하고 연주할 수 있는 곳이 재즈 클럽이고, 감상자는 그것을 수용한다. 그건 연주자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지만 관객은 무언가 새로운 것이 꿈틀거리는 순간이라는 것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자신들 앞의 수십 년이 그걸 증명했고, 또 자신들이 그걸 증명할 거란 걸 알기 때문이다. 새로운 음악 앞에서 관객이 재즈를 잘 알고, 잘 모르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재즈 클럽은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자 모두를 동일 선상에 서게 하는 장소다.

    기쁘게도 이런 모습은 한국에서도 찾을 수 있다. 기성 재즈 클럽은 아주 오랫동안 그러한 역할을 해왔다. 최근엔 다채로운 음악을 선보이는 부기우기(이태원), 자유로운 즉흥연주를 장려하는 게토얼라이브(성수)가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 실제로 많은 젊은 감상자들이 이런 무대에 열광한다. 연주자가 자신이 가진 것과 실현하고 싶은 것을 선보이면, 관객은 과거의 유산으로 만들어진 현재의 음악을 보고 미래의 모습을 그린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재즈 스탠더드 같은 뉴욕의 유명 재즈 클럽뿐 아니라 몽크(부산), 원스 인 어 블루 문, 올 댓 재즈(이상 서울) 등 국내 주요 재즈 클럽도 폐업 또는 잠정 휴업했다. 한편 분위기 좋은 재즈 바가 많이 생겼다. 좋은 선곡으로 재즈 LP를 틀어주는 곳도 몇 군데 다녀왔다. 안정적이었다. 관객은 수십 년간의 역사가 공인한 명반과 명연이 만드는 편안한 분위기를 즐겼다. 재즈 음악이 흐르고, 감상자가 있고, 음료를 마신다는 점에서 재즈 클럽과 재즈 바의 기능은 동일하다.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재즈 바와 재즈 클럽은 동의어가 아니다. 재즈 클럽에서 재즈가 주체라면 재즈 바에서 재즈는 부수적이라는 느낌을 풍긴다. 좋은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즐기기 위해 재즈가 기능적으로만 존재해야 한다면 재즈인들과 재즈 애호가들은 그곳을 재즈 클럽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그 어떠한 비교 우위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재즈 바에서 수십 년 전의 음반만 반복해서 듣고, 현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거에 멈춰 선 채 재즈의 지금과 미래를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영화 <라라랜드>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재즈는 과거의 전통을 중시하는 동시에 계속 살아서 변화하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하늘길이 막히기 직전인 지난해 2월, 나는 베트남 하노이에 다녀올 수 있었다. 낮에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빙 밍 재즈 클럽’이라는 곳에 들렀다. 오페라하우스와 고가 브랜드 매장이 있는 프렌치 쿼터에 위치한 그곳은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공간이라는 느낌이었다.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했는지 간판에는 아직 불이 들어와 있지 않았다. 내부에는 허비 행콕(Herbie Hancock) 등 이곳을 방문한 유명 재즈 뮤지션의 사진, 점주이자 현지 재즈 뮤지션 빙 밍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직원은 우리가 앉기도 전에 메뉴판을 들이밀었다. 음료를 시키고 자리를 잡자 곧 연주자들이 등장했다. 대중성을 최우선에 둔 듯한 레퍼토리부터 음악은 그저 배경음악 또는 소음 차단용이라는 듯이 시끄럽게 떠드는 손님들,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의 직원들까지, 그곳의 이름은 재즈 클럽이었지만 재즈 바로 기억하게 될 거라고 여겼다.

    그곳 맨 앞줄에서 경청하며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낸 건 한국인 20대 손님들이었다. 마찬가지로 무대의 연주자들도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베트남 청년들이었다. 창의성이나 연주력, 컨셉까지 무엇 하나 한국의 젊은 연주자에 비할 것이 못 되었지만 연주에 집중하는 모습과 진심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공연이 끝난 뒤 클럽 밖으로 나가는 그들을 따라가서 짧은 인터뷰를 요청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꾸옹 부, 응우옌 레 같은 베트남 출신의 유명 연주자에 대한 생각을 묻자 그들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세계적인 연주자가 되어 유명해지는 꿈보다는 당장 더 많은 연주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나는 관객의 소리가 너무 커서 연주에 집중하기 힘들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들에게도 그랬냐고 묻자, 놀랍게도 서로의 연주밖에는 들리지 않아서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즈 클럽에서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시 몸을 돌려 대화를 이어갔다. 그들은 몇 달 뒤 한국에서 연주할 거라고 말했다. 더 좋은 환경에서 연주한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졌다. 한국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명함을 건네고 각자의 길을 갔다.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뒤늦게 점등된 조명은 ‘Binh Minh Jazz Club’이라는 간판의 상호를 환하게 비추었다. 나는 그곳을 재즈 클럽으로 기억할 수 있다. / 류희성 월간 <재즈피플> 기자

    브라보! 인천 그리고 재즈

    나의 인천 재즈 클럽 답사기는 우연히 펼친 책 한 권에서 시작됐다. <한국 재즈 100년사>에서 발견한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에. “1983년 인천에 버텀라인이 오픈하였다. 현재 부근에 자유공원과 차이나타운이 있는 버텀라인은 2013년으로 30년이 되는데 아마 자리를 옮기지 않고 30년 이상 한자리를 지키는 곳은 버텀라인이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검색하자 버텀라인은 여전히 성업 중이었다. 다음 날 ‘인천과 재즈’, 두 개의 낯선 단서를 쥔 채로 1호선 급행열차를 탔다.

    Since 1918 중화루와 마주한 적산 가옥 형태의 범상치 않은 외관, 15개의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100년을 넘은 근대건축물 안에 기적처럼 생존하는 재즈 클럽 버텀라인이 있다. 서울의 올 댓 재즈, 원스 인 어 블루 문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상징성 있는 공간도 지난해 영업을 종료한 터라, 버텀라인의 웅장한 공간감, 그 안에서 조용히 바이닐을 틀고 있는 주인장의 존재가 더없이 초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블랙 비니를 눌러쓴 허정선 대표는 20대 시절 단골손님으로 드나들던 재즈 바의 다섯 번째 사장이 되었다. 1995년 1월 1일 시작해 올해로 26년 동안 운영하고 있다. 이곳의 전신이었던 뉴욕의 버텀라인은 문을 닫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이 공간을 처음 만든 사람도 지금은 별이 되었다. 어림잡아 5~6m는 되어 보이는 높은 천장과 세월을 간직한 나무들이 서로를 단단하게 지탱하는 구조를 올려다보았다. 경이롭고 뭉클했다. 건축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고전 양품점으로 멋쟁이들이 드나들던 공간이었다. 진흙, 갈대, 짚 등을 엮어서 만든 딴딴한 건물이라 보수 작업도 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눈이 오거나 비 오는 풍경을 보고 싶어서” 답답한 벽을 뚫어 큰 창을 냈다.

    버텀라인의 공식적인 첫 공연은 1999년 ‘신관웅 재즈 빅밴드’ 13인조의 무대였다. 그때의 공연 포스터가 화장실 한구석에 여전히 붙어 있다.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관객, 바 테이블 근처에 서 있는 관객 등 100여 명이 몰린 기념비적 출발이었다. 인천재능대에 처음으로 생긴 재즈 음악 전공 학생들, 음악가, 평론가, 기획자, 손님들로 하나둘 연결된 끈을 통해 버텀라인이라는 재즈 커뮤니티는 그렇게 함께 성장해왔다. 버텀라인 33주년 당시에 뭘 더 하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라며, 가게를 대신 봐주고 배낭여행을 독려한 사람들 역시 오랜 단골들이었다. 그렇게 주인장은 미국 서부, 동부 뉴욕 곳곳의 바와 클럽을 투어하며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서 바를 운영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도 종종 벌어지는데, 최근에는 우연히 방문했다 이 공간의 존재에 놀란 정원영 음악가와의 협업으로 주목해야 할 신진 아티스트의 공연을 함께 기획하여 재즈 피아니스트 남메아리, 록 밴드 홍해의 공연을 올렸다. 계속해서 ‘버텀라인 초이스 아티스트’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아티스트를 소개하고 그들의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10월 9일 토요일 저녁 밴드 ‘Naked Breath’의 공연이 있던 날. 7시를 넘기자 풋풋한 커플부터 나이 지긋한 노부부까지 다채로운 관객층이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트럼펫, 색소폰 연주자의 강렬한 에너지, 피아니스트와 드러머의 통통 튀는 리듬, 베이시스트의 묵직한 울림. 관객과 음악가 모두가 각자의 호흡으로 음악에 몰입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뒤에서 지켜보는 벽화 속 빌 에반스와 마일즈 데이비스까지. 재즈의 신들이 이곳을 수호했기에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언젠가 오늘을 회상하며, 재즈라는 음악의 즉흥성과 우연, 그리고 책 한 구절에서 출발해 인천의 낯선 동네까지 한걸음에 달려와 내가 목격한 이 장면을 두고두고 기억하는 미래의 어느 순간을 떠올렸다. 26년 동안 재즈 클럽을 운영하는 일에 대해 “하루하루가 위태롭다”고, 미래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주인장의 바람처럼 버텀라인의 40주년 공연엔 나윤선의 목소리가 이 공간에 울려 퍼지길 기원했다.

    재즈 클럽 버텀라인을 기점으로, 인천 신포동에는 변화의 풍파에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여러 장르의 음악 바들이 여전히 간판에 불을 켜고 있다. 1989년 오픈한 ‘흐르는 물’과 1979년 문을 연 ‘탄트라’가 대표적이다. 특히 흐르는 물은 최근 이전했지만 그전까지 근대건축물에 자리 잡은, 5,000여 장의 LP를 보유한 바이닐 바로 김마스타, 황명하 등 포크 뮤지션의 공연을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탄트라는 최근 송도에 2호점을 내며 2세대가 함께 운영 중이다. 부평동의 ‘창고재즈펍’은 2017년 5평 남짓한 공간에서 시작했다가 확장, 이전하며 MZ세대의 재즈 공연 입문소로 유명해졌다. 또 부평구 부평동의 ‘락캠프’, 남동구 구월동의 ‘공감’, 연수구 연수동의 ‘뮤즈’ 등이 연합해 홍대 ‘클럽데이’처럼 ‘인천 라이브 뮤직 홀리데이’ 행사를 동시다발적으로 열고 있다. 특히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을 앞두고 사전 행사로 인천 전역의 클럽에서 라이브 클럽 파티를 여는데, 올해는 12개 클럽이 관객 없이 촬영한 영상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역사를 지닌 공간이 자리를 지켜올 수 있는 동력은 지켜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노력 덕분이겠지만, 지역 라이브 공간이 서로 연대하고 상생하는 관계에서 피어나는 힘도 분명히 작용할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공간을 계속 찾고 응원하는 관객의 존재다. 건축, 음악, 사람 그리고 술이 있는 인천의 재즈 클럽 버텀라인을 시작으로 다채로운 음악 바를 호핑하면서 아방가르드하고 때때로 애틋함이 느껴지는 이 도시의 아우라를 오감으로 느껴보는 것도 특별한 여행법이다. / 김아름 ‘오비맥주’ 브랜드 콘텐츠 매니저

    제발 입 좀 다물어주세요

    “죄송합니다만,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3년 전, 도쿄 와세다대학교 후문 근처. ‘뮤지션의 영혼을 들어요!’라는 문장과 함께 ‘Jazz Nutty(재즈 너티)’라고 쓰인 간판 옆 청록색 문을 열자, 나이가 지긋한 주인장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고수를 다루는 무슨 일본 만화 같은 데서나 나올 법한, 평생 들어본 적 없는 놀라운 문장이었다. 여행 내내 입이 아플 정도로 수다를 떨던 친구와 나는 “우리 뭐 특별히 할 말 있냐?” “없지”라며 바로 태세 전환한 후 들어갔다. 오히려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그 엄격한 규칙이 경외심과 기대감을 갖게 했다. 물론 약간의 두려움도 조금은 있었다. 우리의 긴장을 누그러뜨리기라도 하듯 공간은 다행히 소박하고 아늑했다. 들어가자마자 맞닥뜨리게 되는 두 대의 커다란 JBL 스피커(프로페셔널 시리즈 4331B)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고, 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 벽에 작은 테이블이 대여섯 개 있었다. ‘Nutty(델로니어스 몽크가 1954년에 발표한 곡 제목)’라는 이름에서 예측할 수 있듯 벽에는 델로니어스 몽크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후 1시간 반에서 2시간 동안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커피를 주문하고 나란히 앉아 재즈를 듣는 게 전부였다. 주인장 부부가 조용히 커피를 타는 모습,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카운터 벽에 빼곡히 차 있는 LP와 CD 중 신중히 하나를 골라 다음 곡을 트는 모습, 단골인 듯한 할아버지 손님이 와서 습관처럼 커피를 주문하고 (역시 한마디도 안 한 채) 음악을 듣는 모습을 봤을 뿐이다.

    여기까지 읽고 숨이 턱턱 막히는 분위기를 예상했나? 소름 끼치는 냉혈한 같은 모습의 주인장 부부를 상상했나? 미안하지만 아니다. 공간과 주인의 태도는 더없이 따뜻하고 친절했다. 차가운 건 오히려 내 감각이었다. 음악에만 이렇게 집중하던 시간이 과연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이상하고 희한한 경험이었다. 다들 알 것이다. 집에서 혼자 음악을 들을 때도 중요한 할 일이라도 있는 듯 괜히 여기저기를 왔다 갔다 하거나 쓸데없이 휴대전화를 한 번씩 열어보게 된다는 걸. 공연장에서 음악을 들을 때는 일행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답잖은 영상을 찍느라 정신없기 일쑤다. 그들의 사운드보다 중요한 건 나의 경박한 함성, 나의 시끄러운 기분과 흥분이었다. 재즈 너티에서는 리듬, 화음, 소리의 질감, 음악의 흐름, 음악이 주는 분위기에만 완전히 몰두할 수 있었다. 공간의 밀도가 빽빽해 휴대전화 꺼낼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 내 앞에는 커피와 음악, 그리고 오늘따라 유난히 ‘과묵한’ 친구가 있을 뿐이었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나갈 생각도 못했을 거다.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손님의 대화를 제한하는 재즈 킷사(혹은 재즈 카페, 재즈 바)는 사실 일본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다. 호시노 데쓰야 감독의 다큐멘터리 <재즈 카페 베이시>에 따르면, 일본도 이런 빡빡한 규정을 쉽게 시행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소 극성스러운 이런 문화는 1950년대에 처음 등장, 1970년대에 일본 전역으로 퍼졌다고 한다. 처음 의도는 재즈 음반을 구하기 힘든 시대에 청자에게 순수한 음악 감상 공간을 제공하려는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1961년에 문을 연 유명한 재즈 바 디그(Dig)의 경우 처음부터 손님의 잡담을 금지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고요함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다음 그들이 제한한 건 ‘신문 보기’였다. 누군가 신문지 넘기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거슬린다고 뭐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다음엔 술을 한 잔 이상 주문할 수 없도록 했다. 주인장 호즈미 나카다이라는 인간 본성을 그 이유로 든다. “술 마시면 떠드니까요.” 하지만 으레 그렇듯, 한 잔만 마셔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떠드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술도 금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드는 사람들은 죽어도 살아 돌아오는 좀비처럼, 좀처럼 사라질 줄 몰랐다. 결국 디그의 주인장은 1967년, 떠들어도 되는 재즈 바 ‘더그(Dug)’를 하나 더 오픈한다. 디그는 결국 1983년에 폐점했고, 현재는 더그만 남아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그 더그, 소설 <상실의 시대>에 나온 그 더그 말이다. 1967년 도쿄에 문을 연, 또 다른 전설적인 재즈 바 이글(Eagle)의 경우 오후 6시 이전까지는 대화를 금지하고, 오후 6시 이후부터는 말문을 트게 하고 있다.

    재즈가 뭐길래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의문을 가지는 사람 많을 거다. 멋있게 말하자면, 재즈는 뮤지션들의 대화다.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기 위해 잠시 입 좀 다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뮤지션들은 매 순간 음을 선택하고 만들어간다. 주제는 연주를 시작하면서 정해진다. 재즈는 시간에 따라 흘러가는 음악이다. 뮤지션들이 자신의 계획과 즉흥을 섞어 잠시 시간을 빌려 쓰는 게 재즈다. 재즈의 시간 안에서는 모든 게 가능하고, 매 순간이 자유롭다. 이해를 위해, 유튜브에서 유명한 허비 행콕이 마일즈 데이비스와 ‘So What’을 연주하던 당시의 일화를 소개해보겠다. 그는 마일즈 데이비스가 솔로 파트를 연주할 때 실수로 완전히 잘못된 코드를 연주해버렸다. 죽고 싶어 하는 허비 행콕을 뒤로하고, 마일즈 데이비스는 그 잘못된 음이 맞는 음처럼 들리도록 연주했다. 허비 행콕은 깨달음을 얻은 듯 말한다. “마일즈는 그 음을 실수로 듣지 않았어요. 그 순간에 잠시 일어난 일, 사건, 현실의 일부, 하나의 해프닝으로 본 거죠.” 델로니어스 몽크의 “틀린 것이 맞는 것이다”와 같은 맥락이라고나 할까?

    유튜브를 통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뉴욕 카페에서 흘러나올 것 같은 가을 감성 재즈’, ‘빗소리와 함께 우리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재즈’, ‘방구석에서 쌉쌀한 재즈 한 모금’ 플레이리스트를 듣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요즘, 일본의 야박한 재즈 킷사 문화가 한국에서도 슬슬 꿈틀대려고 하는 듯하다. SNS 시대의 공간이 주는 피로 때문인지, 휴대전화 촬영을 자제하고 말소리를 줄여달라는 음악 감상 카페들이 생기고 있다. 네이버 리뷰에 ‘사장이 독재자다’ 같은 욕이 무진장 달릴 수 있겠지만, 소란스러운 유튜브 덕분에 오히려 유튜브를 안 볼 수 있는 음악 감상 공간, 철저한 침묵의 세계가 필요해진 건 아닐까? 물론 코로나19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이유도 있을 거다. 비말 튈 일이 없다. / 나지언 디지털 미디어 기획자

    어쿠스틱 밴드 뮤지션의 재즈 클럽 이용법

    블로섬 디어리(Blossom Dearie), 쳇 베이커(Chet Baker)를 좋아하면서 대학 시절 재즈 클럽을 찾아다녔다. 막상 클럽에 가니 연주자들이 돌아가며 즉흥연주를 하는 게 상상과 달리 어렵고 몰입되지 않았다. 예측 가능하고 쉬운 음악을 좋아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천재 피아니스트 윤석철 씨에게 재즈 피아노를 배워보기도 했다. 즉흥 연주를 위한 수많은 스케일을 외우는 게 너무 어려웠고, 노래하면서 스캣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기에 ‘아! 나는 진정으로 재즈를 좋아하는 게 아니구나!’ 깨닫고 말았다.

    2015년 싱어송라이터 주윤하 씨의 재즈 공연에 게스트로 참가하면서 재즈 음악가들과 친분이 생겼다. 나는 좋아하는 재즈 스탠더드 곡의 영향을 받아 여러 곡을 작곡했고, 동시에 쉬운 음악을 좋아하니까 라이너스의 담요가 어린이를 위한 재즈 밴드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항상 재즈 음악가들과 밴드를 꾸리고 싶었다. 감사하게도 그 꿈이 이뤄져 훌륭한 음악가들과 지금까지 몇 년간 함께 연주하고 작업했는데, 한 사람 한 사람 성향을 파악하고 나니 그제야 그들의 즉흥연주가 그들의 캐릭터로 들렸다. 그리고 그 전에 즉흥연주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8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그 밤이 떠올라 이야기해본다.

    8년 전, 일본 오사카에서 로컬 인디 밴드와 합동 공연을 열었다. 당시엔 아는 재즈 음악가가 한 명도 없었는데, 함께 공연할 오사카 밴드 세션 중 나오 오리노라는 재즈 음악가가 있었다. 그 언니의 초대로 어느 저녁, 지하의 작은 공간을 찾아갔다. 좁고 오래된 물건이 가득한 곳이었다. 피아노와 오르간, 앰프 등이 한쪽에 모여 있었고, 그 앞으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30여 명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로 공간이 가득 찼다. 나오 언니와 기타를 치는 중년의 신사가 호스트인 잼 데이였다. 시작에 앞서 나오 언니가 한국에서 인디 음악가가 놀러 왔다며 나에게 연주를 부탁했다. 그때는 잼을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서 나 홀로 피아노에 앉아 내 곡 ‘Picnic’을 연주했다. 고맙게도 사람들이 곡에 대해 물으며 관심을 보여줬다.

    내가 자리로 돌아간 뒤, 본격적인 잼 데이가 시작됐다. 신청한 연주자가 나와서 재즈 스탠더드 중 무슨 곡을, 무슨 키로, 시작과 끝은 무엇으로, 이런 세부 사항을 호스트와 정하고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키 큰 할아버지가 성큼성큼 걸어 나와 뉘어 있던 콘트라베이스를 세워 올렸다. 할아버지는 호스트와 짧게 상의하고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곡이 끝나자 박수를 받으며 멋쩍게 인사하고는 휙 자리로 돌아갔다. 왕년에 활동하다 은퇴한 재즈 음악가로 추측되는 포스였다. 훤칠하고 과묵한 할아버지를 닮아 베이스 소리가 성큼성큼 딛는 발걸음 같았다. 다음 차례는 중년의 여자분이었다. 근황을 이야기하는데 어렴풋이 알아듣자니, “한동안 전업주부로 사느라 연주를 놓고 지내다 오랜만에 연주한다. 실수가 많을 것이다” 그런 말이 들렸다. 그녀는 오르간 앞에 앉아 능숙하게 연주했다. 작은 실수가 있었지만, 자녀와 가사를 돌보는 일상 중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을까 상상되어 그녀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몰입했다. 그다음엔 젊은 남자분이 피아노를 연주했다. 퇴근길에 들렀다고, 잘하지 못해도 즐겁게 들어달라 했다. 취미로 피아노를 배운 모양이다. 서툰 연주였지만 퇴근하고 여기까지 와서 참가하는 열정, 사람들 앞에서 서투름을 드러내는 용기, 그동안 했을 연습, 하나씩 상상되면서 소리가 재미있게 느껴졌다. 소녀같이 어려 보이는 얼굴의 여자분은 음악을 배우는 학생이라 했다.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했다. 어려 보이는 얼굴과 달리 꽤 중후한 목소리였다. 어떻게 음악을 배우기로 결심했을까,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을까 궁금해졌다. 그 뒤로도 사람들의 연주가 한동안 이어졌다. 곡, 키, 시작과 끝, 솔로를 연주할 순서 같은 것만 약속하고, 큰 틀 안에서 각자 자신을 자유롭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 재즈 연주다. 거기서 들은 연주는 마치 하나하나 자기의 사연을 풀어놓는 것처럼 들렸다.

    지금 라이너스의 담요와 함께 연주하는 음악가들은 섬세한 성격에 괴짜인 걸 숨길 수 없는 피아니스트, 둥글둥글 예의 바른 성격에 지독한 연습 벌레인 기타리스트, 옛 스윙 음악을 뚝심 있게 좋아하고 소신이 강한 베이시스트, 세 사람이다. 이들의 즉흥연주를 듣고 있으면 어쩜 딱 그 사람 같다. 그 사람을 관찰하듯 그의 연주를 듣게 된다. 처음 재즈 클럽에 다닐 때, 연주 중인 사람을 궁금해하고 상상했더라면 더 재밌게 들리지 않았을까.

    나에게 재즈 피아노를 가르쳐준 피아니스트 윤석철 씨는 매주 월요일 홍대 재즈 클럽 에반스에서 열리는 잼 데이의 호스트를 10여 년째 맡고 있다.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 외국인, 쟁쟁한 재즈 뮤지션, 탭댄서에 이르기까지 여러 인물이 자신의 악기를 가져와 참가하는데, 열기가 대단하다. 누군가의 연주가 끝나면 사람들은 귀와 마음을 온통 열고 있다는 듯 큰 소리로 화답한다. 연주로 자신을 이야기하고 다른 연주자와 기꺼이 대화하는 용기, 거기에 열렬히 화답하는 관객의 환호에 나는 감동하고 만다. 누군가의 데뷔 무대가 될 잼 데이를 10년 넘게 지켜온 호스트들과 클럽이 멋지게 보인다. 그저 이 생동감 있는 역사가 오래 이어지길 바란다. / 연진 ‘라이너스의 담요’ 보컬 (VK)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CARLTON DAV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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