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망을 이끄는 35세의 올리비에 루스테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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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망을 이끄는 35세의 올리비에 루스테잉

2021-11-11T16:14:19+00:00 2021.11.11|

25세에 발망의 선봉장이 된 올리비에 루스테잉은 브랜드를 프랑스 패션계의 혁명 세력으로 키웠다.

MASTER OF CEREMONIES 지난 9월 29일, 파리 라 센 뮤지칼(La Seine Musicale)에서 발망에서의 10주년 기념 패션쇼를 성공적으로 마친 올리비에 루스테잉이 슈퍼모델 군단과 함께 무대 위로 걸어 나오는 모습.

올리비에 루스테잉(Olivier Rousteing)이 임시 대기실에 앉아, 프랑스 미래를 재구상하려는 사업체 설립자 여러 명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평소처럼 블랙 차림이다. 블랙 코트, 블랙 팬츠에, 애완견처럼 보이는 인조 모피로 만든 블랙 클로그(Clogs)를 신었다. 그리고 여러 개의 두꺼운 금반지가 손가락을 감싸고 있다. 수행원이 무대 가장자리로 안내하자, 그는 벽에 기대어 인스타그램 화면을 스크롤해 보인다. 2011년 루스테잉은 25세에 발망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그 후 극도로 온라인화되는 고객의 시선을 끌면서 이 하우스의 힘을 공고히 다졌다.

“우리가 조금 더 남아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가 한 동료에게 소곤거렸다. 엄청난 관심이 쏟아질 것을 예상하는 것이다.

루스테잉이 참여한 이 컨퍼런스는 패션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파이터스 데이(Fighters Day)라는 이 대규모 회의는 미국 타입 프랑스 기업가의 회합으로, 기술 전문가와 스타트업 중진을 비롯해 불과 얼마 전까지 프랑스다운 상상 속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던 ‘자수성가형’ 남성과 여성이 같이하는 자리다. 무대에 오른 루스테잉은 18세부터 자신의 길을 걷겠노라 결정했다고 프랑스어로 말한다. “그러고 나서 6개월 후 패션 스쿨을 그만뒀어요. 학교나 다른 백그라운드 없이, 투지와 열망밖에 없었기에 분투해야 했죠. 그렇게 파리로 왔고, 발망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재직한 지 어느덧 10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그 자리에서 일하는 한 자신과의 싸움이 계속되죠.”

보르도(Bordeaux)에서 중산층 양부모 손에서 자란 이 흑인 남성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파리 패션 브랜드에서 직급이 가장 높은 유색인이다. 이 컨퍼런스가 열리는 스테이션 F(Station F)는 원래 물류 센터였지만 파리 케 도스테를리츠(Quai d’Austerlitz)에 자리한 근사한 스타트업 캠퍼스로 바뀌었다. 젊고, 다양하고, 다재다능한 관중이 그 자리에 함께한다. 그렇지만 루스테잉은 ‘취향, 창의성과 사업체가 교차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라는 분명한 화두를 꺼낸다.

“다양성과 ‘팝 문화, 인구(Population)’ 등 대중을 뜻하는 ‘Pop’을 주제로 다루기 위해, 옷을 활용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인스타그램을 처음 시작한 2013년에, 회사 대표님이 회의 중에 이렇게 말했죠. ‘자네, 지금 뭐 하고 있나? 인스타그램에 명품을 올리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너무 천박해’라고 말이죠.”

상승세가 격렬해진 후 루스테잉은 스스로를 새로운 길의 화신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는 최근 말했다. 자신이 키워오던 야망의 매력과 화려함 속에 뭔가가 빠진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되었고, 그래서 조금 더 개인적인 장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고.

루스테잉에게 이 새로운 활동의 핵심은 아니사 본느퐁(Anissa Bonnefont) 감독의 다큐멘터리 <Wonder Boy>다. 이 작품은 친부모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한 루스테잉의 애달픈 노력에 포커스를 맞춘다. 지난 6월 넷플릭스에 공개되었을 때 프랑스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이 성공적인 결과를 현지에서는 당연한 일로 점쳤다.

“올리비에는 초창기부터 그 소셜 미디어를 간파하고 있었고, 이 디지털 영역이 패션계의 미래에 내재했죠.” 얼마 전 피에르 A. 음펠레(Pierre A. M’Pelé)가 말했다. 온라인 추종 세력을 통해 명성을 얻은 프랑스 패션 저널리스트 세대의 대표 주자인 그가 이렇게 덧붙인다. “그것은 단지 온라인 쇼핑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어요. 대중과 직접 소통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죠.”

1945년 설립 당시 발망은 프랑스의 시크한 전후 매력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비쳤다. 피에르 발망(Pierre Balmain)은 옷감의 매력적인 흐름과 트림 테일러링을 결합해 굉장히 균형 잡힌 아우트라인을 만들어냈고, 소피아 로렌, 조세핀 베이커(Josephine Baker), 레이디 애스터(Lady Astor)와 태국 왕비 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82년 그가 작고하자 이 패션 하우스는 오스카 드 라 렌타의 비전을 통해 움직였다. 1992년부터 발망을 진두지휘하던 이 디자이너는 이 브랜드의 고전주의를 새천년 시대로 이끌었고, 크리스토프 드카르냉(Christophe Decarnin)을 영입해 글램 록의 고급스러운 환골탈태를 이뤘다. 그리고 2009년 루스테잉이 합류했다.

합류한 지 2년 만에 발망의 최고 자리에 등극했을 때, 그는 매스 마켓의 실용주의(그는 2015년 H&M과의 협업을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 중 하나로 꼽는다)와 특유의 단호한 모양 및 재단을 결합했다. 루스테잉이 맡은 후 매출은 7배가량 증가했다. 거의 처음부터 루스테잉은 반엘리트(Anti-elite) 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패션 산업의 영역을 넘어서야 대중 차원의 소비자를 끌어들일 수 있다’는 포부를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그가 ‘발망 군대’라 부르는 인스타그램의 열렬한 지원단을 지휘했다. 루스테잉은 대중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쏙 들어간 양 볼, 놀라운 침착함, 짧은 헤어스타일을 가진 캐릭터로 만들어갔다.

2013년 멧 갈라에서 만난 킴 카다시안은 그 누구보다 루스테잉의 패션에서 중심을 이루고 ‘발마니아(Balmania)’라 불리는 이 열정적 브랜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정말 재미있고 화려하죠. 그리고 사람들이 매혹적으로 느끼게 만들면서 예술 작품에서 캐주얼한 작품까지 넘나들 수 있어요.” 카다시안이 설명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최고의 방식으로 오버더톱(Over-The-Top), 즉 대담하고 화려한 느낌을 풍기죠.”

수년간 패션계는 그의 방향 전환에 더디게 반응했다. 그러나 긴 봉쇄 기간에 전 세계에서 삶과 일이 스크린을 통해 이루어지자, 루스테잉의 비전이 더 실용적이고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드 카펫이나 부티크 윈도우를 초월해 자신의 패션을 알리고자 했던 노력은 이제 선견지명으로 보였다. 많은 디자이너가 컬렉션을 기본으로 되돌릴 때, 그는 공간을 확장하고 모든 것을 더 공개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지난 9월에는 10주년 기념 발망 패션쇼 겸 콘서트를 개최했다. 발망이 대규모 멀티미디어 방식으로 두 번째 시도하는 ‘발망 페스티벌 VO2(출연진에 도자 캣(Doja Cat)과 프란츠 퍼디난드(Franz Ferdinand)도 포함되었다)’의 티켓 수천 장이 6월 어느 날 아침 최소 15유로의 기부금으로 온라인에서 판매되었고, 하루가 지나기 전에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

루스테잉은 한 인간으로서 정체성 찾기와 같은 방식으로 디자이너로서 정체성을 찾았다. 서서히, 대중의 시각으로 말이다. 어린 시절 그는 늘 스케치를 하며 지냈고 종종 외로움에 사무치곤 했다.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그가 설명했다. “양부모님에게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는 확신을 드려야 했죠.”

공부를 잘해도 친구가 생기지 않았고 유명해지지도 않았다. “늘 혼자였어요. 친구가 없었으니까요.” 그가 말했다. “항상 제가 되고자 하는 사람처럼 옷 입는 것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이 못되게 구는 바람에 쉽지는 않았죠.”

그는 집에서 그 시대를 주름잡던 세계적인 팝 문화의 위엄과 함께 그것을 구체화시킨 슈퍼모델에 대해 꿈꿨다. “신디 크로포드, 나오미 캠벨, 클라우디아 쉬퍼만큼 큰 영향을 준 사람들은 없었죠.” 특히 그들의 영향력이 패션계를 넘어섰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패션계를 전혀 모르던 어머니도 그들을 알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가 파리 패션 스쿨 에스모드 진학을 결정하자 가족들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몇 달 후 그가 학교를 그만두고 학위나 자격증도 없이 경쟁이 치열한 창작 분야에 뛰어들기로 결정하자, 부모님은 더 많은 근심 걱정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루스테잉은 초창기 패션계 활동을 조화와 융합을 위한 노력이라 묘사한다. 패션계가 원한다고 여겨지던 그런 유의 디자이너가 되고자 애쓴 것이다. 그렇지만 초창기 컬렉션에 대한 반응은 복합적이었고, 때로는 가혹했다. “재능이 부족하고, 패션계에서 일할 만큼 뛰어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힘들기 마련이죠.” 이 우려에 대한 반응으로 루스테잉은 오히려 접근 방법을 수정하며 더 완강히 밀어붙였다. 발망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3년을 보낸 후 그는 ‘돌파구’가 될 만한 것을 경험했다. ‘나다워지기’를 결심한 것이다.

루스테잉에 따르면 인스타그램은 그런 면에서 하나의 계시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 브랜드의 유기적 팬층을 확보하는 데 인스타그램이 유용하다는 것을 캐치했다. 그렇지만 오늘날 대형 브랜드가 가장 막강한 팬층을 확보하기 마련이다. 소셜 미디어는 기업 마케팅의 일환이며, 전문 직원들이 포진해 전략적 피드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스테잉이 보기에 그런 면은 인스타그램 같은 플랫폼을 지나치게 관리되고, 진정성을 담아내지 못하며, 상명 하달식이라 여긴 일반인이 그것을 떠나는 이유다. 그래서 루스테잉은 다시 노선을 변경하고 방향을 틀었다.

현재 발망은 음악, 방송 시리즈, 영화 등 엔터테인먼트와 글귀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고 루스테잉이 설명했다. “미래에는 표현이 더 중요해질 것 같아요. 사람들은 2초 후 사라지는 영상보다 스토리를 더 많이 추구할 거예요.” 발망이 보기에 ‘미래에는 이야기, 즉 내러티브가 핵심’인 것이다.

OPEN ACCESS “루스테잉은 패션의 에너지와 열정, 재미를 대표하죠.” 루스테잉의 절친한 친구 킴 존스가 말했다.

CLOSE ENCOUNTERS 모델 줄리아 스테그너가 입은 드레스, 모델이자 배우 아자니 러셀이 입은 자카드 톱과 스커트, 배우 재지 비츠가 입은 크롭트 톱과 스커트는 발망(Balmain).

루스테잉은 때때로 자기 자신을 ‘새로운 프랑스(La Nouvelle-France)’의 전형으로 묘사한다. 이 용어는 희망과 불편함을 똑같이 지닌다. 더 공개적이고, 경쟁적이고, 더 능력주의적인 프랑스를 향한 전망은 호소력을 지닌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새로운 프랑스’가 기본적으로 미국화된 프랑스라는 우려가 있다. 광적이고, 돈 버는 것에만 열중하며, 점차 특색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루스테잉은 이런 관점이 세계화 시대의 현실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제가 미국화되었을까요? 맞아요. 그게 자랑스러워요.” 그가 말했다.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세계화의 멋진 모습이죠” 루스테잉과 그의 양부모 모두 그가 혼혈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원더보이>에서 입양 서류를 찾았고, 친부모 모두 흑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의 생모는 지부티(Djibouti), 생부는 에티오피아 출신이었다. 그를 임신했을 때 생모는 14세, 생부는 25세였다. 그녀는 루스테잉의 출생 기록서에 친부와의 관계를 기록하지 않았다. 친모는 제왕 절개로 아이를 출산했다. 산도가 좁은 것이 이유인 듯했다. 루스테잉이 이런 정보를 확인하고 다큐멘터리 촬영 카메라 앞에서 주체할 수 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C’est atroce”라고 말했다. ‘형편없어, 끔찍해’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친부모가 사랑하는 성인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가 끝날 무렵, 루스테잉은 생모가 누구인지 알면 안 되지만 정식 절차를 통해 전달되도록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것을 보내지 않았다. 생모의 세상에 자신이 직접 억지로 끼어들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어쩌면 그녀가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성공한 아들을 알아보길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그녀가 직접 연락을 취할 수도 있을 테니까.

재스민 향이 도시를 감싸고 따뜻하고 습한 어느 밝은 날 아침, 파리 중심가에 있는 루스테잉의 집으로 갔다. 개인 뜰을 지나자 양치식물과 바나나 화분이 놓인 아치형 계단이 나온다. 천연목 바닥과 미늘 창살 우드 블라인드로 가려진 박공식 유리 천장을 비롯해 흑백 실내장식이 적도 어딘가 위치한 리조트 카바나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루스테잉은 커피 한 잔을 들고 낮은 체어에 풀썩 앉으며 한껏 미국식 분위기를 풍겼다. 심플한 블랙 후디와 블랙 레깅스를 입고 있다. 엄지가 닿는 후디 소맷자락이 해져 있었다.

“항상 일종의 껍질을 쓰고 있어요. 일종의 가면인 거죠.” 그가 말했다. “때때로 너무 오버했고 진짜 모습 이상의 캐릭터를 연기했다고 생각하죠.” 그렇지만 최근 루스테잉은 공적인 모습이 진짜 얼굴이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디자이너들이 힘겹게 노력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쉬운 세상이 아니니까요.”

<원더보이>는 더 이상 가식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그가 처음 하는 노력이었다. “카메라는 자신과의 약속과도 같았죠.” 하지만 그가 살아가면서 개개인보다 익명의 관객과 함께 카메라 렌즈 앞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 조용히 드러나고 있다. 루스테잉은 35세의 게이다. 그리고 15년간 남자 친구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다큐멘터리에서 자신의 몇 안 되는 친구 중 한 명인 자신의 운전기사 모하메드(Mohammed)와 헬스장에서 만난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로 잘생긴 한 젊은 남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영상 속 그는 일을 끝낸 후 넓은 집으로 돌아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외로운 우주 비행사처럼 널따란 테이블에서 혼자 식사를 했다.

“정말 외로워요. 하지만 동정을 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가 말한다. “친구들이 있어요.” 킴 카다시안, 카라 델레바인, 그의 운전기사와 오랜 친구 몇몇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많지는 않아요. 저녁 약속을 많이 잡지도 않죠. 외식도 그렇고.” 파티를 찾아다니는 멋진 날라리 같은 이미지는 단지 그가 성공을 위해, 갈망하는 찬사를 위해 필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사랑받아야 해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차이점은 저는 개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거죠.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대중의 시선을 필요로 합니다.”

루스테잉은 평안을 느낄 만큼 충분한 성공을 일궜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솔직히 인정하면서 앞으로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말한다. 그는 내게 이카로스 신화를 아는지 물었다. “그것은 날아오르고 또 날아오르다가, 결국 자기 몸이 탈 때까지 날아오르는 이야기죠. 제 인생 스토리가 그것과 살짝 닮은 듯해요. 더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하지만 자유로워지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죠. 때때로 지나치게 큰 꿈을 꿀 수도 있거든요.”

파이터스 데이 컨퍼런스가 스테이션 F에서 막을 내리자, 연단에 오른 사람들이 모두 일어섰고 관객이 무대로 돌진했다. 사람들이 루스테잉 주변에 모여들어 서너 줄로 늘어서자, 그는 무대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권위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거나 꿈에 대해 말하는 것을 인내심 있게 들었다.

아무도 말을 건네지 않은 다른 패널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면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루스테잉은 스태프 두 명 사이를 지나, 또 다른 두 명이 서 있는 무대의 문을 빠져나간 후, 복도 아래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진한 색 수트를 입은 경비원 한 무리가 그를 가까이에서 엄호하며, 옆 출구를 통해 거리로 나가 서둘러 모하메드가 기다리는 검은색 SUV 차량 쪽으로 데려갔다.

루스테잉은 블랙 코로나 마스크를 썼다. 게다가 좀 더 개인적인 다른 마스크도 착용했다. 움푹 들어간 양 볼에, 선글라스를 낀 매력적이고 사진발이 잘 받는 완벽한 스타 이미지로 자신을 덮은 것이다. 그는 무대와 차 사이 어디선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안심이나 체념이 담긴 숨을 내뿜고, 발로 그 담배를 비벼 끈 후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문이 열린 차에 다시 올라 개인적인 세상의 그늘로 휩쓸려 들어갔다.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