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가 느껴지는 ‘잉크’ 디자이너 이혜미의 집
격자창이 인상적인 ‘잉크’ 이혜미의 집에서는 이야기가 들린다. 누군가의 옷장에 영원히 간직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옷을 만들듯, 좋아하는 사람들과 머무는 순간을 상상하며 꾸몄기 때문이다.
“이사 기념으로 친구들과 오붓한 파티를 열 생각인데, 그날 <보그>도 초대할까요?” 2015년 액세서리 브랜드로 시작해 일곱 번의 컬렉션을 발표한 잉크(Eenk)의 디자이너 이혜미가 다정하게 제안해왔다. 이윽고 낙엽 굴러가는 소리만 들리는 초겨울 저녁 7시. 잔잔하고 고요한 빌라에 손님이 하나둘 도착했다. <보그> 디지털 디렉터를 거쳐 비주얼 디렉터로 활동하는 허세련, 에디 슬리먼의 셀린느 쇼에 캐스팅돼 더 유명해진 모델 강소영, 오즈세컨 디자이너 유은송까지. 모두 5년 이상 함께한 ‘절친’들이다. 유은송은 치즈와 하몽, 올리브를 먹음직스럽게 도마에 올렸고 허세련은 석류, 용과 등 과일을 자르고 샐러드를 버무렸다. 강소영은 익숙한 듯 바구니를 꺼내 샌드위치와 빵을 담았다. “온라인으로 부동산을 둘러보다가 격자창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는 사진 한 컷을 보고 ‘바로 이 집이다!’라고 생각했어요. 바로 이 자리에 다이닝 테이블을 놓고 친구들과 와인 마시는 장면을 상상하며 계약했죠.”
거실을 둘러싼 아름다운 것들을 소개해달라는 <보그>의 요청에 한 손에 와인 잔을 들고 거실로 자리를 옮긴 그녀가 설명을 이어갔다. “거창한 컨셉을 정해놓고 물건을 채운 건 아니에요. 옷을 입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조화로움’이듯 인테리어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면 쉽더라고요. 오래 사용해오던 비초에(Vitsoe)의 620 소파를 시작점으로, 완성도 높고 어울림이 좋은 아이템으로 퍼즐을 맞춰나갔어요. 남편도 저도 ‘집은 따뜻한 위로여야 한다’고 여겨왔기 때문에 새 가구보다는 포근한 빈티지 가구 위주로 골랐죠.”
말간 우윳빛으로 커버를 교체한 까시나(Cassina) 소파와 회화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노이치(Noiich)의 그레이 카펫, 투박하지만 조형적인 근사함을 지닌 아프리칸 스툴, 직접 제작한 커튼과 일종의 조각처럼 보이는 메타포라 테이블까지. 그녀가 가장 자주 머무는 거실에서는 조금의 힘겨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옷장에 영원히 간직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옷을 만들어요. 가구를 고를 때도 마찬가지죠. ‘시간이 지나도 질리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을까’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데, 오랫동안 저의 위시 리스트에 있었던 비초에 620 소파 역시 이런 고민 끝에 데려왔어요. 시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는 모던함과 기능성을 모두 갖추기란 결코 쉽지 않죠.”
6개월 전,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을 계획하면서 그녀가 가장 공들인 공간은 다이닝 룸이다. “파리의 루루 레스토랑에서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이 디자인한 화이트 다이닝 테이블을 보고 한눈에 반했어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우아함에 눈을 뗄 수 없었죠. 하지만 너무 짜 맞춘 그림을 그리기는 싫어서 다른 의자를 매치해보려 했지만 결국은 튤립 체어가 단짝이더라고요. 대신 의자 패드를 유니크한 원단으로 교체해 악센트를 줬어요.” 오리지널 패드를 과감히 제거하고 예전부터 눈여겨보던 크바드라트와 라프 시몬스가 협업한 패브릭으로 교체하니 우아함이 배가 됐다. 격자창과 어울리는 조명을 찾는 데는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너무 화려하거나 심심하지 않았으면 했고, 앉았을 때 눈높이가 맞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한 달 동안 빈티지 숍을 돌다가 사무엘 스몰즈에서 이 조명을 보는 순간 망설임 없이 구매를 결정했어요.”
테라스로 이어지는 벽면에 사진가 김재훈의 건축 사진을 걸고, 반대쪽에 아르네 야콥센(Arne Jacobsen)의 블랙 빈티지 테이블을 두어 남편의 서재로 꾸몄다. 이렇게 온화한 감성을 담아 완성한 다이닝 룸은 이혜미 부부나 지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공간이 됐다. 자연스럽게 침실로 옮겨간 그녀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 집으로 오게 된 결정적 계기는 온기였어요. 아무리 예쁜 걸 다 갖다놔도 서늘한 느낌이 들면 쇼케이스처럼 불편하게 느껴질 뿐이니까요. 사방에 위치한 콜로니얼 스타일의 창과 싱그러운 산책로, 드라마틱한 격자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과 나무를 볼 때마다 집이 나를 보듬어주는 듯한 안정감을 느껴요.” 디자이너 아제딘 알라이아가 디자인한 아파트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침실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침대와 빈티지 캐비닛, 대리석 테이블 등 최소한의 가구만 두어 부부가 오롯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어떤 영감이 떠오를 때 기록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앙드레 소르네(André Sornay) 테이블과 마그누스 올레센(Magnus Olesen) 의자는 그 순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가구랍니다.” 그녀는 언젠가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흔적을 밟는 여행을 꿈꾼다. “한때 르 코르뷔지에의 공학적 디자인에 반해 아카이브를 수집했는데, 지금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작업에 푹 빠졌어요. 특유의 우아하고 따뜻한 디자인을 보면 향수가 느껴지거든요.” 아울러 기회가 온다면 아일린 그레이(Eileen Gray)의 룸 디바이저를 구매하고 싶다며 미소 지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새하얀 침구를 정돈하는 동안 맞은편에서는 친구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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