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성차별적 표현인가요?
때늦게 ‘그녀’에 대해 고민하며 과연 ‘그녀’에게 해를 끼친 적 없는지 생각했다. 언어는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언어를 만든다.
번역가, 기자, 소설가 등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이 써오던 표현이 도덕적, 정치적, 윤리적으로 옳았는가 고민에 빠지는 시기를 겪는다. 호되게 혹은 가볍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나 역시 말이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으며 유모차를 유아차로, 저출산을 저출생으로, 몰래카메라를 불법 촬영으로, 주부를 살림꾼으로 고쳐 쓰며 내가 달라지길 그리고 세상이 달라지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를 의식하게 된 후, 그녀를 둘러싼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녀 딜레마’의 시작이다.
‘그녀’는 서울시여성가족재단에서 제작하는 ‘성평등 언어사전’에 매년 등장한다. 언어학자 다수는 영어 ‘She’를 번역한 일본어 ‘피녀(彼女)’가 어원인 ‘그女’는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을 지칭하는 표현이므로 성차별적이라고 지적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은 ‘그녀’를 “주로 글에서,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여자를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로 설명하고 있다. ‘그’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 앞에서 이미 이야기하였거나 듣는 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주로 남자를 가리킬 때 쓴다.” 그러니까 원칙적으로 ‘그’는 성별을 드러내는 말이 아니지만 그와 그녀를 구별해서 사용함으로써 성별을 부여해온 것이다.
“그녀가 성차별적 표현인가요?” 질문했을 때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신지영 교수는 ‘그럴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남’이라는 표현이 없는 상황에서 그녀를 사용하기 때문이죠.” 신지영 교수는 저서 <언어의 줄다리기>에서 ‘여교사’를 예로 들어 과거의 이데올로기와 고정관념을 담은 단어에 대해 밝힌 바 있다. 여교사, 여교수에는 ‘전문적인 일에 능숙한 사람은 보통 남자다’라는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 여교사, 여교수라는 표현은 이들이 일반적이지 않은 존재가 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신지영 교수는 성별을 지칭해야 한다면 남성과 여성이 모두 존재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여성 교사’, ‘여성 교수’를 쓰는 편이 낫다고 했다. “배우와 여배우, 교수와 여교수 등 한쪽 성별만 특정하여 기술하는 것은 총칭적 의미를 갖는 쪽의 성별을 표현하지 않은 한쪽 성별로 고정하여 일반화하는 문제를 갖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배우, 교수, 검사, 기자 등은 기본적으로 남자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정말이지 ‘그녀’를 자주 사용해왔다. 지금까지 말과 글을 통해 쓴 ‘그녀’를 다 모아 엮는다면 제주도 정도는 가볍게 덮을 수 있다. 인터뷰 기사에서 늘 그녀로 지칭했음은 물론이고 여성 소설가 특집에는 ‘쓰는 그녀들’, 시위 현장 취재 기사라면 ‘그녀들의 광장’이라고 썼다. ‘당당한 그녀’, ‘그녀의 사정’, ‘그녀에 대한 고찰’… 만능 키처럼 그녀만 들어가면 모두 제목이 완성됐다. 화보 제목으로 ‘그녀’만 쓰고 만족스러워 박수를 친 적도 있다. 일상 대화에서도 자주 사용했는데 대명사라 익명성이 보장되는 장점이 있을 뿐 아니라 “그녀 알아?” 입을 떼면 대화의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곤 했다. 우리는 그녀를 그녀라 부르는 자신을 기꺼워했다. 패션 잡지 업계는 왜 이렇게까지 그녀를 사용했을까. 논문은 나온 바 없지만 번역 기사에서 비롯되었을 확률이 높다. ‘She’를 쓰는 문화에 대한 선망이 부지불식간에 스며들었다고 해야 할까. ‘She’를 번역한 ‘그녀’에 우리는 우아함, 아름다움, 특별함 같은 이미지를 추가로 심어 ‘그녀’를 액세서리처럼 사용했다. 시적 허용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그녀’를 그런 마음으로 쓰지 않지만 여전히 ‘그 여자’보다 ‘그녀’로 부르길 좋아한다. 과거의 잔재다.
여자 독자를 대상으로 여자 사진을 싣고 여자에 대해 글을 쓰면서 사용한 ‘그녀’에 성차별적 의도는 없다고 항변하고 싶다. 하지만 글 속에 빼곡한 ‘그녀’는 성별을 제일 앞으로 내세운다는 걸 부정할 순 없다. 그러니까 조소현을 말하면서 성별인 여자가 먼저가 된다. ‘여자 조소현’이 시작점이 되고 거기서 생각을 발전시켜나가게 한다. 어떤 가치 판단에 성별이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았더라도 ‘여자 조소현’이라서 어떤 행동과 어떤 생각을 한 것처럼 반복해서 비친다. 기사에 여중생, 여직원, 40대 여성 등 행위자의 성별을 밝히는 것이 내용 이해에 꼭 도움이 된다고 보기 어려운데도 끊임없이 성별을 기재하는 언론이 우리 생각에 끼치는 영향과 다를 바 없는 결과를 낳는다. 소설가 박문영은 비슷한 이유로 ‘그녀’를 쓰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의 직업, 역할, 존재가 유난하고 특수하게 드러날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이숙명은 한 글자라도 더 간결한 편이 아름다운 글이라 생각하는데 ‘그녀’는 불필요하게 한 글자 ‘녀’를 더한 경우라 지양한다는 의견도 들려줬다. 성별 표현에 직관적 거부감이 있는 독자를 위해 덜 쓰고자 한다고도 했다.
물론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프리랜서 번역가 이선희는 고충을 토로했다. 성차별적 표현에 대해 고민했고 문학 작품을 번역할 때는 더 주의했고 ‘그녀’를 결벽적으로 쓰지 않던 시기도 있었지만, 잡지 기사 번역을 하며 ‘그녀’를 사용한다. 프랑스, 아프리카 등 온갖 국적의 모델과 디자이너가 등장하는 <보그> 기사에서 모두 ‘그’로 통일할 경우 독자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다. 게다가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표현의 필요성이 더 높아지는 참이다. “어떤 성으로도 확정 지을 수 없는 성 정체성이 유동적인 사람, 즉 젠더 플루이드”로 스스로를 설명하는 디자이너 해리스 리드는 어떻게 호칭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에겐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대명사로 They를 쓴다는 사회적 합의도, Xe나 Ze 같은 신조어도 없다. ‘그’ 혼자 모든 역할을 해내야 한다. 이마저도 성별과 무관한 삼인칭 대명사가 아닌 남자로 인식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소설가 박문영은 2018년 <지상의 여자들> 작업 때부터 성별 구분을 두지 않고 ‘그’로 통일해 쓰고 있다. 그리고 잘 안 읽힌다, 별문제 없이 읽었다 등 여러 반응을 경험했다. 헷갈려서 소설 읽기를 포기할 뻔했다는 독자도 있었다. “어떤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편안하게 스민다는 게 진짜 어려운 일이구나, 다시 깨닫게 됐어요. 여러 난관이 있지만 시점을 달리하거나 이름을 계속 언급하는 방식으로 개선해나갈 생각입니다. 이런 문제를 진작에 해결한 작품도 꾸준히 보고요. 사실 소설이란 ‘흘러가야 하는 이야기’이고 지칭 때문에 소설 읽기에 방해가 된다면 곤란하죠. ‘그녀’를 주체적인 의미로 새로 쓰는 시도도 분명히 있고요. 하지만 저는 작업물의 외부와 내부, 형식과 내용이 이어져 있다고 보는 편이라 성별 정보가 서사에 아주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면, 가능한 한 ‘그’ 또는 ‘이름’을 쓰려고 합니다.” 얼마 전 이야기를 나눈 소설가 정세랑 역시 비슷한 고민을 거쳤다고 했다. “활동 초기에는 익숙한 대로 그/그녀를 썼는데, 번역가를 겸하는 작가님들이 특히 이 문제에 고민이 깊으셔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도 지양하게 되었어요. 주인공의 이름을 쓰거나 맥락상 적절히 생략하는 방식으로 쓰는데, 익숙해지니 무리 없이 쓰게 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부모’보다는 ‘양육자’를, ‘아내’보다는 ‘배우자’를 쓰려고 합니다. 말이 생각을 담는 틀이고, 말과 생각이 역동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치기에 생각이 바뀌어 말이 바뀌기도 하고 말을 바꾸면 생각이 바뀌기도 하는 듯해요.”
이런 시도는 우리가 얼마나 고정관념이 있는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한다. 공저 <마감 일기>에서 칼럼니스트 이숙명은 터무니없이 마감을 늦게 하는 편집장, 평론가들의 세태를 쓰며 ‘그’로 표현했는데 많은 독자가 이들을 남자로 인식한 에피소드를 전했다. “권위적 존재가 등장하는 텍스트에선 성별을 밝히지 않으면 독자들이 남성으로 읽어내는 습관이 있어요. 권위를 갖춘 여성을 일상적으로 익숙하게 만드는 데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성임을 중간에 드러냈다면 사고의 전복을 일으키는 효과가 생겼을 것이다. “성 중립 표현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국문에서 성 중립 표현이 될 수 있는가, 이미 남성형 표현으로 고착되지 않았나, 올바른 용어 사용이 반드시 정치적으로 공정한 해독으로 이어지는가 고민이 시작됐죠. 그래서 내린 결론은 기계적으로 그/그녀를 ‘그’라고 통합하는 건 부적절하며 아직은 혼용할 필요가 있다입니다.”
신지영 교수는 “그녀로 표현할 때 얻어지는 표현상의 이점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표현하여 얻어지는 이득보다 그렇지 않음으로 해서 얻어지는 공동체의 이득이 크다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다. “모든 단어는 그 단어만이 가질 수 있는 의미와 묘미가 있게 마련입니다. 존재 이유가 있어서 살아남은 것이니까요. 따라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그 글을 쓰는 사람의 이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어의 선택이 이념을 드러내므로 자신의 이념이 그 표현에 잘 담기는지를 신중하게 살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980년대에 태어나 2000년대를 몸소 겪으며 단어가 이념을 바꿔놓은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미혼’을 ‘비혼’으로 사용하며 결혼이 누구나 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친가’와 ‘외가’를 지우며 가족 관계의 균형을 맞췄다. 최근 출판계에서 성 인지 감수성을 반영해 개정판을 내는 흐름이 한창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여류 작가, 처녀작 같은 표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중이다. 이런 흐름 가운데 그토록 사랑하던 ‘그녀’와 결별하겠다는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겠다. 다만 ‘그녀’를 쓸 때는 필요에 대한 고민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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