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령과 김하늘의 날카로운 ‘킬힐’
김성령, 김하늘이 드라마 <킬힐>에서 만났다. 삶을 예술로 표현해온 두 배우가 욕망의 정체에 더 깊이, 더 가까이 다가선다.
백 퍼센트 김성령
1988년 미스코리아 진. 세리미용실의 간판스타. 도회적인 이미지의 CF 모델. 첫 영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로 신인상을 휩쓴 충무로의 신데렐라. 김성령의 데뷔 이력은 누구보다 화려하다. 그뿐인가.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한 외모에 화목한 가정, 성공적인 커리어까지, tvN 드라마 <킬힐>의 톱 쇼호스트 옥선처럼 김성령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황금빛 인생의 주인공이다. 흠결 없는 매끈한 삶에 고난과 역경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미모의 여배우가 데뷔 이래 거의 한 해도 쉼 없이 무려 60여 편의 영화와 드라마, 연극에 출연해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다. 드라마 <상속자들>로 제2의 전성기를 맞기까지는 슬럼프도 있었다.
최근 그는 윤성호 감독의 정치 풍자 코믹극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이상청)>에서 얼떨결에 문체부 장관이 된 전직 사격 스타 이정은을 연기하며 화제를 일으켰다. <씨네21>은 이 드라마를 2021년 ‘올해의 한국 시리즈’ 1위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말년의 웹툰 대사를 제목 삼은 이 웅장한 대파국의 드라마에서 김성령은 디테일한 표정 변화와 능청스러운 연기로 황당하고도 통쾌한 극의 묘미를 제대로 살렸다. ‘엎친 데 덮친 격, 산 넘어 산, 될 대로 되라’ 식의 극한 상황에도 김성령은 ‘1980년대 김연아’로 불리던 올림픽 영웅(이정은)의 품위를 놓치지 않는다. 눈부신 5월의 여왕, 미의 여신에서 말만 한 아이들의 엄마로, 때로는 란제리 브랜드의 뮤즈로, 혹은 군대까지 다녀온 여성 장관으로 끊임없이 변신 중인 김성령의 새로운 도전. 드라마 <킬힐>의 공개를 앞두고 나눈 인터뷰는 허기를 때우기 위한 김밥 한 줄도 채 먹을 새 없이 시작됐다.
참 배고픈 직업이네요. 스케줄은 불규칙하고 늘 몸 관리를 해야 하니까.
모르는 사람들이 부럽다고 하면 제가 그래요. “너 나처럼 불행하게 살아보고 싶어?” 배고프면 기분이 안 좋잖아요. 물론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건 너무 감사하지만 개인적으로 희생해야 할 게 많죠. 인간이 본능적으로 즐겨야 하는 그런 행복을 포기해야 되니까. 나뿐 아니라 보여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다 그럴 거예요.
웨이크 서핑에 프리 다이빙, 수영, 요가, 승마… 운동도 꾸준히 하시잖아요.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안 해봐서 그렇지. 다만 너무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금세 끝을 보더라고요. 전 설렁설렁 하니까 끝이 없어요. 그저 ‘오늘 내가 몸을 움직여 칼로리를 소모했다’는 데 의의를 두죠. 안 빠지고 계속하는 게 중요한 거니까. 제가 요가를 5년이나 했는데 아직도 물구나무서기를 못해요.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그야말로 24시간이 모자라겠어요.
요즘은 헬스만 해요. 일주일에 서너 번 운동하고 마사지며 트리트먼트도 매주 받아야 하고. 준비된 상태라는 게 그냥 툭 나오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드라마 촬영하고 부수적인 스케줄 소화하고, 애들도 아직 고등학생이라 챙겨야 하죠. 가끔은 누가 나 대신 시간표를 짜주면 좋겠어요.
드라마 <킬힐>은 언제부터 준비하신 거예요.
<이상청>보다 얘기는 먼저 오갔어요. 전 내용만 좋으면 웬만해선 들어오는 건 다 해요. <이상청>도 대본이 너무 웃기고 재밌었거든요. 아무리 함께 하는 배우나 감독이 좋아도 대본이 지루하고 재미없으면 못하죠.
윤성호 감독과는 MBC 에브리원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에서 처음 만났죠? 미스코리아 출신의 중견 탤런트 김성령 역할을 맡아 제대로 코믹 연기를 선보였어요. 지금 봐도 재밌더라고요.
한창 새로운 뭔가를 갈망할 때였어요. 당시 조한철이라는 배우랑 친했는데 제가 호기심이 많은 걸 아니까 넌지시 한번 던져본 거죠. “누나, 이런 게 있는데 관심 있어?” 그런데 의외로 제가 “나 너무 하고 싶다”고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고 해서 하게 된 거예요. 감독님도 워낙 독특하고 첫 만남부터 느낌이 좋았어요. 어떻게 보면 운명 같은 일이죠. ‘연기를 이렇게 편하고 재미있게 할 수 있구나.’ 촬영 현장에 가는 게 즐겁고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약간 자신감이 붙었달까? 저한텐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이에요.
<이상청>에서의 정은을 보면서 새삼 김성령이라는 배우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졌어요. 그간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부수는 작품이었잖아요.
전 망가지고 그런 건 신경 안 써요. 뭐든 새롭게 도전해보는 게 좋아요. 다만 연기할 때 좀 힘들었던 건 정은이 일반적인 정치인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운동만 하던 사격 선수가 갑작스레 정치인이 된 경우이기 때문에 말투나 행동이 너무 능숙하진 않아야 한다는 거였죠. 전 <이상청>이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정은이 성장하는 드라마라고 생각했어요. 만약 시즌 2를 하게 된다면 그때는 진짜 멋진 활약을 보여드릴 수 있겠죠.
<킬힐>에선 유명 쇼호스트 옥선 역할을 맡으셨는데 평소 홈쇼핑은 좀 이용하나요.
그럼요. 어떨 땐 몇 세트씩도 사요. 특히 더블 구성! 더블 구성은 더 싸거든요. 여러 개 사서 주변에 나눠주기도 하고요. 얼마 전엔 냄비를 사서 너무 잘 쓰고 있어요. 생활용품부터 건강식품까지 두루 홈쇼핑이나 온라인 쇼핑을 이용하죠. 유일하게 옷만 매장에 가서 사요. 입어봐야 하니까.
미스코리아에 나간 이유가 리포터나 방송인이 되고 싶어서였다고 들었어요.
친언니가 학창 시절에 교내 방송국 아나운서를 했거든요. 나중에 국내에 홈쇼핑 채널이 생기고 나선 쇼호스트 시험도 보고 그랬어요. 저도 언니 따라 중학교 때 방송반 활동을 했는데 목소리가 좀 특이하다는 얘길 종종 들었어요. 그땐 배우는 꿈도 못 꿨고요. 딱히 할 줄 아는 것도 없었고 배우가 된다는 건 완전히 딴 세상 얘기라고만 생각했죠.
홈쇼핑 쇼호스트 역할이 전혀 생소하진 않았겠어요.
제가 쇼호스트 유난희 언니랑 친해요. 언니한테 “나중에 배우 은퇴하면 나도 쇼호스트 하고 싶다”는 얘길 한 적도 있어요. 용돈도 벌고 기부도 하고 싶다고. 철없는 소리였죠. 내가 하고 싶다고 다 되는 게 아닌데 내 생각만 한 거예요. 목숨 걸고 판매하는 업체 생각은 못한 거지.
유난희 씨는 우리나라 1호 쇼호스트잖아요. 최고의 쇼호스트이기도 하고요.
늘 승승장구, 잘나가는 분이라 그런지 우리 드라마 스토리처럼 성공을 위해 암투를 벌이는 건 오히려 모르더라고요(웃음). 그저 철두철미하게 일만 열심히 했으니까. 나중에 친해지고 나서야 난희 언니가 원래 아나운서를 꿈꿨고, 숱한 실패와 도전 끝에 홈쇼핑으로 가게 됐다는 걸 알게 됐죠. 참 대단하다고 했어요. 사람의 운명이라는 게 그렇게 다 자기 몫이 있나 봐요. 방송에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킬힐>에서 제 대사도 그래요. “인생은 다 자기 몫이 있고 차례는 돌고 도는 거니까.”
결혼 후 한동안 방송을 쉬다 뒤늦게 경희대 연극영화학과에 들어가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것도 본인의 운명이었겠죠?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그러는데, 모든 도전은 결핍에서 오는 것 같아요. 20대의 전 일에 대한 욕심은커녕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미스코리아도 옆에서 나가라고 해서 나갔고, 덜컥 진이 되고 난 후엔 그 후광으로 뜻하지 않게 너무 많은 경험을 하게 됐죠.
바로 <연예가중계> MC를 맡고 영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로 그해 신인상을 휩쓸었죠.
하지만 제가 갈망하던 일이 아니라 그런지 더 이상 하고 싶지가 않았어요. ‘결혼해서 현모양처로 살아야지’ 했는데 아이를 갖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엄마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뭐라고 답해야 하나. 배우를 했던 사람, 공인도 아니고 일반인도 아니고 애매한 위치. 한번 배우의 길로 들어섰으면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자식을 잘 키울 자신은 없지만 최소한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다.’ 그때 철이 든 거죠.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고 그냥 ‘띵!’ 이렇게.
공부는 자랑스러운 나 자신이 되기 위한 출발이었고요.
‘열심히 하자!’ 결심은 했는데 뭐부터 해야 될지 모르겠더군요. 생각해보니 연기를 체계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학교라는 목표가 생긴 거죠. 그때 함께 입학한 동기 중에 연예인이 많았어요. 그런데 단 한 번도 수업에서 본 적이 없어요. 그때 제 나이가 서른아홉, 마흔이었는데 스무 살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죠. 전 너무 좋았어요.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었고, 전 과목 A 학점으로 장학금까지 받았어요.
와, 열정! 그래도 장학금은 학생들에게 좀 양보하지 그러셨어요?
하하. 기부했죠. 학생들이 졸업 작품을 찍는데 제작비가 부족해서 한 팀당 50만원씩 10팀을 지원하려고 했는데 교수님께서 그보단 제 이름으로 카메라를 사서 학교에 기증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기회가 담보되는 건 아니잖아요. 불과 10년 전만 해도 드라마와 영화 모두 남자 배우의 이야기뿐이었으니까. 여배우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어요.
맞아요. 그런데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잖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그냥 늘 준비하고 있는 거고, 어느 순간 차례가 돌아왔을 때 제 몫을 잘해내면 돼요. 그래야 다음이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여성 3인이 주인공인 이번 드라마가 더 반가웠을 것 같아요.
되게 신선했어요. 젊은 여성들도 아니고, 제 나이대의 이야기잖아요. 제가 맡은 옥선은 베일에 싸인 인물이에요. 톱 쇼호스트에 정치인 남편, 반듯한 아들까지 겉으로 보기엔 완벽하지만 상처가 많은 여자죠. ‘엔젤 옥선’이라는 천사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데 실제 저랑은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어요. 전 그 정도로 머리가 좋진 않거든요(웃음).
이혜영, 김하늘 배우와는 처음 호흡을 맞추는 건가요.
전노민 선배 외에는 감독님도 그렇고 다 첫 만남이에요. 처음 대본 리딩 할 땐 너무 긴장돼서 청심환 먹고 갔잖아요. 누가 부담을 주거나 불편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긴장한 거예요. 역시 이혜영 선배님은 그 아우라와 멋이 엄청나요. 하늘이는 나긋나긋 편하게 잘 대해주고. 극 중에서 서로 견제하는 역할이다 보니 현장에서도 적당한 긴장감을 갖고 가려고 해요.
각 캐릭터의 패션도 화제예요.
몇억씩 하는 고가의 주얼리를 착용하다 보니 늘 가드들이 현장에 따라올 정도죠. 의상 피팅도 많고, 재밌어요. 언제 이런 걸 드라마에서 또 보여주겠어요? 컬러도 정해져 있어서 하늘이는 레드, 이혜영 선배님은 블랙 퍼플 그리고 저는 카멜 골드 계열을 주로 입어요.
1988년 미스코리아 때 입었던 형광 그린색 드레스가 떠오르네요. 지금 봐도 파격적이에요.
‘랑유’ 김정아 선생님 옷이었어요! 당시 앙드레김 선생님만큼이나 유명한 디자이너였는데, 청담동에 큰 매장이 있었죠. 협찬을 받으러 가서 세리미용실 원장님이랑 두 분이 연두색 드레스로 결정한 거예요. 저야 아무것도 모르는데 무슨 의견이 있었겠어요? 덕분에 무대에서 완전히 튀었죠. 그래서 그 뒤로는 무슨 인터뷰만 하면 ‘행운의 색은 연두색, 그린’이라 말하고 다녔죠(웃음). 정말 그 컬러가 저한테 행운을 가져온 것 같아 그린을 되게 좋아했어요.
20대엔 미스코리아, 30대엔 행복한 가정, 40대엔 배우로서의 커리어, 그리고 지금까지 이 모든 걸 유지하고 있다니, 참 근사한 인생이에요. 나이를 먹고 점점 여유가 생김에 따라 일을 대하는 자세에도 변화가 있나요.
저하고는 상관없는 것 같아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 마음가짐은 똑같아요. ‘열심히 해야 되겠다.’ 40대 후반엔 너무 일만 하는 게 아닌가, 좀 쉬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제가 오십엔 은퇴해서 5년쯤 안식년을 갖고 다시 나와 엄마 역할을 하든 할머니 역할을 하든 하고 싶다고 했더니, 저희 소속사 대표가 그러더군요. “쉰 살에 쉬면 누나한테 쉰다섯 살은 없어요.” 맞는 말이죠. 대중은 기다려주지 않아요. 사실 그게 공평한 거고. 쉼 없이 달려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극 중 인물들은 모두 성공을 좇는데 본인이 생각하는 성공은 뭔가요.
자유로워지는 거죠. 그런 얘기 많이 하죠? 경제적인 자유, 신체적인 자유, 사회적 시선으로부터의 자유 또
무슨 자유… 자유로워지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잖아요. 성공이란 게 기준이 없고, 또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더 큰 뭔가를 바라고 얽매이게 되는데, 거기서 초월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어쩌면 진정한 성공이겠죠.
인스타그램 프로필 설명이 ‘내가 만나는 나’예요. 그건 무슨 뜻인가요.
완전히 제 개인 공간일 수는 없겠지만, 진짜 나의 기록에 가깝다 정도? 팬과 소통하는 장소이기도 하고요. 요즘 돌아다니질 못하고 사람도 못 만나니 업로드할 사진이 없어서 맨날 그대로예요.
두 아들도 엄마의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나요.
아뇨, 안 하더라고요. 엄마가 김성령이라는 게 좀 부담스러운가 봐요. 저는 팔로우하는데 두 아들은 나를 팔로우 안 하고, 자기네 것에 댓글도 달지 말라고 해요. 그래서 조용히 ‘좋아요’만 누르고 있어요(웃음).
예전에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에서 소녀시대 멤버의 엄마 역할을 제의받고 이런 반응을 보였죠? “내가 그런 말만 한 애들 엄마를 한다고?!”
맞아, 맞아. 하하. 그런 대사가 나왔어요.
미스코리아로 데뷔하셨지만, 인생의 기회라는 건 왕관을 쓸 때뿐 아니라 그걸 내려놓을 때 또 새롭게 찾아오는 것 같아요. 스스럼없이 하나의 캐릭터로 자신을 풍자하고, ‘탄이 엄마’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것처럼요.
기회는 돌고 도는 것 같아요. 때로 꺾일 때도 있고 반등할 때도 있고 그런 거죠. 주식도 그렇잖아요. 영원한 상한가는 없어요. 바닥을 치면 다시 올라갈 때도 있는 거죠. 인생은 모르는 거예요. / 이미혜 칼럼니스트
김하늘의 도전
배우란 이미지로 각인되는 존재라서 이름처럼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진 것에도 영향을 받는다. 김하늘 이전에 하늘이라는 이름은 없었고 세기말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우리 앞에 등장한 그로부터 우리는 살아 움직이는 하늘을 봤다. 스톰 광고에서 어떤 신인류의 모습을 하고 있던 김하늘은 화보와 전광판에서 걸어 나와 <바이 준>으로 힙한 청춘이 됐고 이후 <로망스> <동갑내기 과외하기> <6년째 연애 중> 등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를 통해 우리의 20~30대를 지배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정체를 공유했다. 맑고 깨끗했지만 다층적인 내면을 지닌 듯 보였던 이 배우에게는 늘 한 켠의 여백이 있었고 그곳은 우리가 감정을 이입할 구석이 됐다. 비현실적 외모를 지녔지만 늘 그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됐다. 근작 <공항 가는 길> <바람이 분다> <18 어게인>에서도 김하늘은 꾸준히 사랑의 정체를 탐구해왔다. 홈쇼핑에서 벌어지는 세 여자의 끝없는 욕망과 처절한 사투를 그린 tvN 드라마 <킬힐>에서 김하늘이 맡은 인물은 나락에 떨어진 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흑화하는 ‘우현’이다. 우리가 꼭짓점 삼아 몰입을 시작할 인물은 이번에도 김하늘일 것이다. 인간이 지닌 감정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김하늘은 이번에도 집요하게 그 정체에 다가선다.
엄청난 변화를 겪는 인물 설정에 따라 머리를 잘랐다고요. 짧아진 머리만큼 가벼워진 것이
있다면요.
데뷔한 이래 가장 짧은 상태예요. 사실 개인적으로 긴 머리를 안 좋아해요. 제게만 어울리는 커트 머리를 하고 싶은데 주변에서 너무 반대하니까. 몇십 년째 반대해요(웃음). <공항 가는 길> 당시 머리 길이까지 잘랐다가 새롭지 않아서 1cm씩 자르다 보니 더 짧아졌는데 기분이 아주 좋아요. 저는 작품 할 때 오히려 가벼워져요. 결혼 생활이나 육아는 안 해본 일이라 부담스럽고 무거운데 20년 넘게 이쪽 일을 했으니 현장에 오면 훨씬 편하고 자유로워요.
아내나 엄마보다는 배우로서 정체성이 훨씬 강하죠.
당연히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어요. 배우 일을 시작했을 때 소속사 대표님이 병든 병아리 같다고 했어요. 아픈 병아리가 눈을 감으면 쌍꺼풀이 생기는데 딱 그 느낌이라고요. 학교 졸업하자마자 이쪽 업계 일을 했는데 데뷔작을 제외하고 대부분 베테랑 감독님들, 유명한 상대 배우들과만 일했어요. 그러다 보니 부담감이 너무 커서 현장이 스트레스였고요. 질책 받고 자존심도 상했는데 주변에서 “이런 건 못하지만 이런 건 잘했어” 한마디씩 해줬고 덕분에 포기하지 않았어요. 스트레스 받으니까 밥도 못 먹겠고 그때 엄청 말랐어요. ‘잠잘래?’ ‘밥 먹을래?’ 하면 잠부터 잤으니까요. 지금은 무조건 밥이지만. 이젠 배가 채워져야 현장에서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겨요.
배우로서 편안해진 건 언제부터인가요.
편하다기보다 현장이 좋다 느낀 게 영화 <동감>부터예요. 그전까지는 거기 서 있는 제 모습이 너무 낯설고 어색해서 절대 제 작품 모니터링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동감> 시사회 때 비로소 제 연기를 볼 수 있었어요. 그 작품으로 칭찬을 많이 받았는데 내가 민폐가 아니라 내 역할을 하는구나, 내 연기로 흥행할 수 있구나 자신감이 올라왔어요. 작품 욕심도 그때부터 생겼고요.
관객의 입장에서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건 행복이에요. 청춘물부터 시작해 이제는 결혼하고 엄마가 된 후 펼쳐지는 삶 또한 대리 경험할 수 있었어요. 지금 이 시점에서 보여주고 싶은 인물이나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사실 <18 어게인>이 끝나고 로맨틱한 작품을 하려고 했어요. 여전히 사랑 이야기가 좋거든요. 설레는 감정선이 너무 좋아서 50대가 되고 60대가 돼도 그럴 거예요. 처음 <킬힐> 대본을 봤을 때 선뜻 하겠다고 못했어요. 여러 장르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도 낯설었어요. 이 작품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그리고 우현이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밟고 일어서려는 여러 감정이 성숙했어요. 그런데 몇 개월 후에 다시 봤는데 감정이 되게 다르게 다가오는 거예요. 아마 <18 어게인>의 로맨틱하고 말랑말랑한 감정이 쌓여 있다가 빠져나갔나 봐요. 어렵게 보이던 감정이 ‘좋은데?‘ ‘새로운데?’ ‘하고 싶은데?’로 바뀌어 있었어요. 그렇게 작품에 들어갔고 거의 10년 동안 했던 느낌이나 호흡과 다른데도 현장도, 연기도 너무 재미있어요.
기모란, 배옥선, 우현 세 여자가 펼쳐내는 이야기인데, 여배우 위주의 작품이라는 점에 특히 눈길이 갑니다.
늘 여배우들 사이에 호흡이 좋은 작품을 바랐어요. 또래 친구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감정도 연기하고 싶었고요. 흥행이 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델마와 루이스> 같은 로드 무비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너무나 연기를 잘하시는 선배님들과 작업하면서 긴장되지만 설레요. 이혜영 선배님은 걸음걸이부터 손동작, 시선까지 다 달라요. 선배님은 정말 멋있으세요. 어느 누가 이혜영 선배님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김성령 선배님은 미스코리아 때부터 좋아했는데 <의뢰인>과 <상속자들>을 보고 더 좋아졌고요. ‘두 선배님들과 같이 작품을 할 수 있다니!’ 처음에 정말 환호성을 질렀어요.
쇼호스트의 세계가 폭넓게 펼쳐지리라 생각합니다. 쇼호스트를 연기하며 인상 깊게 느낀 직업관이 있나요.
드라마라서 더 극적으로 그려지겠지만 홈쇼핑의 세계는 정말 치열해요. 판매량이 연봉과 직결되니 자기 관리에 엄격해요. 어떤 쇼호스트는 이 직업을 택한 후 라면을 한 번도 먹지 않았다더군요. 항상 감정 안에서 연기를 했는데 쇼호스트로 판매하는 장면을 찍으려니 사용하는 단어나 애티튜드가 너무 어려웠어요. 원래 NG를 안 내는데 이번에는 나더라고요. 그러다가 대본대로 안 하겠다고 했어요. 그냥 이 옷을 판매한다고 생각하고 들어갔어요.
전작 <18 어게인>에서는 아나운서로 리포터 연기를 하기도 했어요.
비슷하지만 또 달라요. 그땐 선생님으로부터 발음이랑 억양 모두 수업을 받았어요. 얼마 전에 다시 봤는데 잘했더라고요(웃음). 전문직 연기를 할 때 어설프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나 봐요. 되게 잘하고 싶고 그렇게 보이고 싶어요.
쇼호스트가 그렇듯 직업이란 그 직업을 선택한 인물의 많은 면을 드러내곤 해요. 어떤 면 때문에 배우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감성적이라 학창 시절 인간관계가 어려웠어요. 어릴 때니까 ‘난 왜 이럴까’ 일기를 정말 많이 썼어요. 비가 올 때 냄새, 소리가 다 느껴졌고 눈물이 났어요. 사춘기가 아니라 그런 작은 것들에 감정이 많이 왔다 갔다 했어요. 어떻게 보면 되게 외로웠어요. 내 감정을 표현하면 친구들은 그 정도는 아니래요. 내가 유별나다 생각해서 서서히 표현을 안 했고 그러면서 외로워졌어요. 난 그런 게 좋지 않았어요. 나쁘게 말하면 모난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모나지 않은 사람이고 싶은데 그게 뭔지 몰랐어요. 그런데 이런 내가 연기하는 데는 너무 큰 도움이 됐어요. 인물을 받아들일 수 있고 감정 표현을 잘할 수 있어요.
김하늘만큼 코믹함을 어색하지 않게, 귀여움을 부담스럽지 않게 표현한 배우가 떠오르지 않아요. 슬픈 연기도 마찬가지고요. 실제로 우리는 모든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고 살진 않으니까요. 당신에게는 늘 현실적인 절묘한 선이 존재한 듯 보였어요.
정확해요. 코믹 연기도 오버를 해서 웃기고 싶지 않고 공포 영화를 찍어도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서 공포감을 표현하고 싶지 않았어요. 멜로도 마찬가지고요. 과하지 않게 적정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연기해요.
그럼에도 소리, 가슴, 머리가 모두 다 열리는 폭발적인 연기에 대한 바람을 드러낸 바 있지요.
<킬힐>에서 어머니랑 함께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진짜 폭발을 해요. 전 평소 화를 낼 때도 소리를 지르는 성격이 아니에요. 그런데 막다른 감정을 표현해야 했고 정말 미친 사람처럼 표현했는데 너무 힘들어서 쓰러지고 싶었어요. 사실 가볍게 임하는 신이 없을 정도로 모든 신에 다 힘이 있어요. 엄청난 발산이었는데 옛날 같으면 얼굴이 찌그러지면 화면에 어떻게 나올까 고민할 텐데 지금은 내가 이런 것도 할 줄 아는구나 해요. 결혼해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예전에는 식당에만 가도 모자를 쓰고 긴장했다면 지금은 그런 게 없거든요. 전체적으로 많이 편안해졌나 봐요. 그러니까 이런 연기할 때도 거리낌이 없어졌어요.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만 해도 엄청난 자유가 찾아오지요.
정확한 포인트예요. 그걸 놓고 연기한 게 너무 홀가분하고 내가 많이 변했구나, 내가 이런 걸 눈치를 안 보고 해버리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다른 어려운 신도 자신 있게 할 수 있게 됐어요. 앞으로 작품을 고르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오로지 엔터테인먼트 목적만 가진 작품처럼 일상을 벗어난 작품에 뛰어들고자 하는 욕구는 없을까요.
전 정말 다 해보고 싶어요. 사실 트렌드 안에서 해보고 싶은 작품 다 해봤어요. <피아노> 같은 멜로 가족 드라마, <동갑내기 과외하기> 같은 로맨틱한 작품, <블라인드>로 스릴러도 했고 상도 받았어요. 결혼 후에는 불륜 이야기도 해봤고요. 이제 여러 채널 안에서 다양한 장르와 색깔이 생겼잖아요. 그 트렌드 안에서 또 다른 작품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이번에 <킬힐>을 선택할 때 ‘괜찮을까?’ 했지만 걱정보다는 기대와 설렘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요. 연기 생활을 오래 했으니 그래야 할 때이기도 하고요. 가끔 제가 지루할 때가 있어요. 연기도 헤어스타일도 옷까지도 전부. 아무리 외양을 바꿔도 내 안에서 나오니까 당연히 지루할 수밖에요. 오늘 촬영을 하면서 처음으로 머리를 넘겨봤는데 기분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 기분이 뭘까 생각했더니 예쁘고 안 예쁘고가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대중은 내 얼굴도, 내 목소리도 다 알아요. 이제는 김하늘의 예쁜 모습보다 새로운 모습에 박수를 쳐줄 것 같아요. 작품 역시 선입견이나 틀을 다 깨고 도전하고자 해요.
붉은 하이힐을 신고 유리를 박살 내는 모습으로 드라마 <킬힐> 포스터에 등장해요. 킬힐은 무엇을 상징한다고 봤나요.
단순하게 욕망이에요. 위에 올라서고 싶은 것. 저도 촬영할 때 하이힐을 신으면 우월하고 당당한 느낌이 들고 자신감이 넘치거든요. 평소 액세서리를 안 하는데, 중요한 자리가 있으면 액세서리를 하고 하이힐을 신고 치마를 입어요. 하이힐을 신으면 온몸이 쫙 펴져요. 절대 구부정하지 않죠. 치마를 입는 이유도 마찬가지예요. 바지를 입으면 다리가 보이지 않고 아무래도 걸음이 흐트러져요. 치마를 입으면 또박또박 걸을 수밖에 없게 꼿꼿하게 서게 되죠.
드라마 <킬힐>은 욕망을 전면에 드러냅니다. 배우 김하늘의 욕망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요.
클 수도 아닐 수도 있어요. 가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크고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아요. 욕망이랑 욕심은 다른데 욕심은 많아요. 그런데 그건 다 작품에 대한 욕심이에요.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진 아닌 것 같아요. 가만히 속에 다 담아놓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 작품 하고 싶어”라고 말하고 드러내요.
성공을 쟁취하고자 하는 등장인물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나요? 당신에게 성공이란 어떤 상태, 어떤 의미인가요.
두 가지 의미의 성공이 있어요. 남들이 봤을 때 성공과 내가 봤을 때 성공. 예전에는 남들이 보는 성공에 더 귀를 기울였는데 지금은 내가 만족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성공이란 크지 않아요. 예를 들어 <킬힐>은 안 해봤던 캐릭터이고 설레면서도 재밌게 찍고 있는데 정말 박수 받고 싶거든요. 그게 다예요. 이 작품으로 상 받고 싶어, 이 작품이 해외에 진출해서 잘됐으면 좋겠어,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역량 안에서 욕심을 부리고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배우가 된 계기가 특별하기로 유명해요. 듀스 故 김성재를 만나고 싶어서 모델에 지원했지요. 그 후에도 이토록 강렬하게 뭔가에 끌린 경험이 있나요.
너무 많겠죠(웃음). 그런데 전 소극적이지 않은 것 같아요. 남들은 부끄러워서 하지 않을 행동도 해요.
요즘 인생의 낙은 무엇인가요.
솔직히 말하면 아이죠. 그 행복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어요. 아이를 볼 때 시간이 멈춘 느낌을 되게 많이 받아요.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가 손자 손녀 보는 느낌이랄까요(웃음). 어제도 남편과 “얘는 잘 때 우리가 이렇게 괴롭히는 걸 알까?” 했어요. 아이가 잘 때 맨날 쓰다듬거든요(웃음).
연기란 늘 새로운 영감이 필요한 일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영감을 얻나요.
미술 작품을 본다든지 음악을 듣는다든지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는 대표적인 행위가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보다 평소에 세심하게 캐치해내요. 예를 들어 우는 아이를 보며 순수하게 울어야 하는 장면에서 감정을 봐요. 지금 인터뷰할 때도 에디터님이 입고 있는 옷이라든지 제스처를 봐요. 인물의 특징을 활용할 수 있는 감각이 늘 열려 있어요. 여행이 좋은 이유는 정말 많은 곳에 가고 정말 많은 사람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쇼호스트도 마찬가지예요. 홈쇼핑 채널을 보면 직업군 안에서 특유의 포인트가 있어요. 손톱을 이렇게 만진다든지 하는 동작이 뇌리에 박히면 연기할 때 튀어나와요. 언제 누구 역할을 맡을지 모르니까 항상 깨어 있는 게 중요해요.
갓 데뷔한 배우에게 묻는 질문을 새삼 던져볼게요.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신인 배우는 어디까지 올라가고 싶다고 꿈을 말하죠. 그런데 저는 내려가면 속상할 수 있지만 연연하지 않아요. 사실 지금이 너무 좋아서 계속 지금처럼 갔으면 좋겠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작품이 계속 따라오잖아요. 간혹 늦게 올 때도 있는데 이제는 좀 더 속도가 맞았으면 좋겠어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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