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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남남’이 말하는 ‘정상’이라는 것

2022.03.01

by 조소현

    만화 ‘남남’이 말하는 ‘정상’이라는 것

    오버사이즈 재킷은 펜디(Fendi), 셔츠는 에이치앤엠(H&M).

    눈 밝은 관찰력으로 정영롱이 창조한 세상 <남남>은 정상의 의미를 묻는 자연스러운 질문이다. 중심을 비켜가는 그 세상에는 사랑보다 강력한 우정과 종국의 귀여움이 가득하다.

    “챫챫챫챫챫…” 엄마 은미의 자위 장면을 목격하는 딸 진희의 이야기로 시작했던 만화 <남남>이 거시기를 만지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첫 경험을 한 꼬마 진희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3년 만에 완결됐다. 그 거대한 세계관을 두 눈으로 확인한 독자들은 ‘완벽한 수미상관’이라는 평을 쏟아내는 중이다. 중년의 성을 그려서 연재 초반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던 <남남>은 ‘대책 없는 엄마와 쿨한 딸’, 그 주변 사람들 이야기다. 싱글 맘, 동성애자, 비혼주의자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누구 하나 사회가 통상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으로 그리지 않는다. 은미는 고등학생 때 임신해 엄마가 되지만 <남남>은 은미가 어떤 고결한 희생을 하는지 아빠 없이 자란 진희가 얼마나 서러운지 같은 서사보다 물리치료사와 마케터 & 웹 디자이너로서 직업인의 일상, 친구와 떠난 여행 중 무조건 발생하는 짜증스러움 같은 실제 우리 삶의 분초를 채우는 일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너무 공감이 가서 ‘풉’ 웃음이 터지고 때론 코끝이 찡해지도록 눈물이 나서 만화 속으로 들어가서 이들과 ‘티키타카’를 나누며 살고 싶다. 그러니까 만약 <남남>이 공익을 달성한 바 있다면, 다양한 인물상이 당연한 세상을 창조해 정상이라는 프레임을 스멀스멀 녹인 공일 것이다.

    “왜 싱글 맘의 고충이 중심이 아닌가”부터 물었을 때 작가 정영롱은 “주변을 보면 싱글 맘도 동성애자 친구들도 많은데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어요. 굳이 사연을 넣어 불쌍하게 그리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마르지 않는 소재를 제공하는 중년의 이모 친구들 역시 혼자 사는 경우가 많지만 너무 재미있게 살고 계시다는 것. “<안녕, 프란체스카>도 드라큘라 가족 이야기가 평범한 일반 사람들처럼 나오잖아요. 저도 최대한 다양한 캐릭터를 만들어 사람들이 재미있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하고 싶었어요.”

    <남남> 속 여러 관계 중 가장 감동적인 건 은미와 미정 그리고 미정의 어머니다. 미정은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는 은미를 구출하고 미정의 어머니는 은미를 가족으로 맞는다. 장례식에서 “내가 정한 내 엄마였다”는 은미의 대사는 가족의 법적 정의를 공허하게 만든다. “후천적으로 이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너와 나는 가족이다’ 말했을 때 가족으로 느껴지는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피로 이어지지 않은 관계에서 저 사람이랑 나랑 연결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그걸 표현하는 단어로 ‘가족이다’라고 말하고 싶었거든요.” 혈연이라는 연결 고리가 없는 이들의 관계는 더 진실하게 보인다. 진희의 생물학적 친부인 진홍의 존재는 오히려 진정 의미 있는 관계란 무엇인가 질문하게 한다. 2부를 시작하며 “망해도 되는 사랑과 망하지 않는 우정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밝혔듯 <남남>에서 우정은 사랑보다 깊게 표현된다. 은미와 미정을 보고 있노라면 우정이란 사람 사이에 가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처럼 느껴진다. 진희와 친구들 관계에도 수식어나 설명이 필요 없는 오랜 믿음이 깔려 있다. 정영롱은 다음과 같이 ‘친구론’을 들려줬다. “세 가지 친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너무 힘들었어’ 이야기했을 때 ‘힘들었겠다’ 해주는 친구, ‘왜?’ 묻는 친구, ‘어, 나도 힘들었어’ 하고 자기 얘기하는 친구. 연인과는 헤어지면 제목처럼 남남이 되는데 친구란 오래된 앨범처럼 남아요. 언제 들춰 봐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존재예요.”

    캐릭터가 다양해 그룹화하긴 힘들지만,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은 자주 뒤집힌다. 진홍은 눈물이 많고 우유부단하고 은미는 관계의 주도권을 가지고 할 말은 다 한다. 재원은 한없이 소심하고 진희는 비유하자면 퓨리오사에 가깝다. “아빠를 보면서 진홍을 그렸는데, 저희 집이 여자들이 힘이 세고 아빠는 ‘알았어’ 하며 따라가는 분이라 처음에는 특이하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런데 독자들로부터 너무 유약하다는 반응이 왔고 더 그렇게 그려야겠다 싶었어요(웃음).” 센 남자 캐릭터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스트레스 받는 것도 원치 않았고, 스스로도 그리면서 스트레스가 될 것 같았다. ‘‘‘남자는 말을 잘 들어야 돼. 그런데 너무 착하면 네가 힘들다’ 같은 대사를 넣은 적 있는데 그렇게 생각해요.”

    할 말은 다 하는 여자들은 욕도 일상어로 사용한다. 자위 장면으로 19금 등급을 받은 김에 욕만큼은 등급 없이 펼쳐냈다. “된소리를 많이 내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해요(웃음). 엄마가 딸한테 저런 욕을 해? 같은 고정관념도 깨고 싶었어요.” 실감 나는 욕설과 달리 <남남>에는 외로움, 슬픔 같은 감정이나 힘든 상황도 담담하게, 태연하게, 대수롭지 않게 표현하는 정서가 있다. 정영롱은 쿨한 느낌은 아니라고 했다. “너무 힘들어도 며칠 잘 자고 일어나면 생각보다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라는 걸 결국엔 사람들이 알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남남> 속 인물들 역시 빠르게 회복시켜주고 싶었어요.” 현실적인 세계관 아래 빚어진 인물들은 그래서 어떤 일을 겪어도 밥 한 그릇 먹고 출근하듯 현재를 살아간다.

    그 밖에 도드라지는 건 적당한 거리감이다. 엄마와 큰 갈등은 없지만 진희는 독립을 한다. 같은 동네에 사는 진희와 한결은 자기 공간이 있는 상태로 만남을 가진다. 은미와 진홍은 중년이 되어 연애를 다시 시작하지만 살림을 합치지 않는다. 대신 진홍은 은미 집 바로 뒤 빌라로 이사를 온다. 아무 때나 5분 내로 만날 수 있는 거리다. “은미랑 진홍을 다시 붙여줄까 고민도 했어요. 그런데 여태까지 진희랑 잘 살아왔는데 굳이 그래야 하나 싶더라고요. 평소 제가 동네 친구를 되게 갖고 싶어 하는데 판타지라고 생각해요.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고 재밌게 놀고 헤어지는 깔끔한 관계가 잘 없잖아요.” ‘우리는 파도’ 편에서 이 거리감은 “그날 바다는 파도 모양이 제각각 조금씩 달라서 재밌어 보였다”는 마지막 문장으로 또 한 번 그 존재를 드러낸다.

    연재하는 동안 댓글에는 공감으로 가득했다. 지극히 현실적인 설정은 공감의 기초 배경으로 작용했는데 퇴근하고 소파에 기대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회사 험담을 하는 설정이 대표적이다. 정영롱은 이를“케이-소파”라고 표현했다. “보든 안 보든 드라마는 켜놔야 하고 대화하면서 항상 뭔가를 먹는 게 한국 문화죠(웃음). 서로 자기 할 말만 하지만 중간에 ‘뭐라 그랬냐?’ 돌아와 핑퐁처럼 오가는 설정을 저도 제일 좋아해요. 재벌 드라마에서 불편한 옷을 입고 깨작깨작 먹는 장면이 제일 답답해요(웃음).” 하이퍼리얼리즘은 내적 심리 묘사에서도 이어진다. 특히 ‘갱년기’ 편은 도대체 작가가 몇 살이길래 중년의 심리를 잘 아는가 독자들 사이에 미스터리였다. 비결은 중년의 이모들이다. “이모들과 친한데 이모 친구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은미 이야기 소재가 많이 나와요. 그리고 항상 작업하러 가는 카페가 있는데, 손님들 얘기를 슬쩍슬쩍 훔쳐 듣기도 해요(웃음).” 진희와 관련된 소재의 출처는 주변 친구들이다. “주변에 다양한 친구가 있는데 인터넷 친구도 많아서 이야기하다가 좋은 소재가 보이면 허락을 받고 각색해서 써요. 평소 작업할 때 자동 재생으로 아무 영상이나 틀어놓는데 게임 유튜버의 대사 하나에 꽂혀서 찾을 때도 있어요.”

    일상에서 건져 올리는 소재 사이에서 정영롱은 ‘이게 돼?’와 ‘왜 안 돼?’ 사이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는다. 맨 처음을 자위로 시작한 이유는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닌데 왜 거부감이 들어야 할까?’ 질문을 했으면 해서였다. “유튜브에서 아들과 엄마가 자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콘텐츠를 봤는데, 저 스스로도 충격을 받아 왜 충격적이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했어요(웃음). 그리고 아들이랑 엄마랑 얘기한다면 딸이라고 못할 게 있나 싶었죠.” 하지만 자위를 목격한 진희는 엄마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머리를 쥐어뜯지만 끝내 모른 척한다. 그러고 보면 가족의 어떤 면을 알게 됐을 때 우리 중 다수는 직면하기보다 덮어두고 넘어가는 선택을 한다. 정영롱이 이어가는 현실적인 전개는 어떤 소재도 있을 법한 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남남>의 배경은 서울이 아니라 근방 어딘가다. 정상 가족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처럼 배경도 경기도가 어울린다고 봤다. 진희는 스물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었고 작가에겐 ‘애매한 중간’이 키워드였다. 만화 전반을 지배하는 톤 다운된 색도 ‘중간’을 찾던 작가의 고민의 결과다. 빨간색과 파란색을 섞었을 때 나오는 중간색인 보라색, 연보라색, 연노란색을 배경으로 삼았다. 대사에 더 집중하도록 하기 위한 섬세한 장치이기도 했다. 간결하지만 인물의 감정은 고스란히 전달되는 그림체도 마찬가지다. 정영롱은 ‘표정’에 가장 중점을 두고 그림을 그린다. “항상 갈매기 눈썹인데 한 번만 꺾어줘도 진짜 슬픔이 느껴져요. 그림체가 짱구 같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봉미선 씨도 눈썹 한 번 꺾으면 진짜 화났구나 싶잖아요(웃음). 단순해 보이지만 놀람, 슬픔 등 감정을 잘 나타내고 싶어서 표정 컷은 사실 되게 열심히 그리고 있습니다.”

    탄탄한 완성도와 절묘한 구성력 때문에 예상하기 쉽지 않지만 <남남>은 데뷔작 <알아집니다>에 이은 두 번째 작품이다. 장래 희망으로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던 정영롱이 만화에 입문한 계기는 다소 시트콤적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지원금을 받으려고 계약서에 사인했는데 그게 연재물이라 어쩌다 보니 만화가로 데뷔하게 됐다는 얘기. “<남남>을 작업하며 내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이야기하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 이유 때문에 계속해나갈 것 같아요.” 정영롱의 관심사는 ‘여자의 시선에서 하는 다양한 여자 이야기’다. “요즘 여성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았느냐고도 하는데 저는 한참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여성 서사가 유행 아니냐고 한다면 오래가는 유행이었으면 하고요. 여성 작가들이 여성 이야기를 하는 <여명기>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데, 사랑 없이 여성 개인의 이야기를 조명하는 ‘비로맨스물’이에요. 어찌 보면 심심할 수 있지만 계속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게 좋은 현상 아닐까요.”

    어릴 적 이모와 함께 방을 썼던 정영롱은 알바비를 받으면 늘 만화책을 빌려온 이모 덕분에 만화의 세계가 구축되었다 말한다.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 속 줄라이 캐릭터의 빨간 쇼트커트 머리는 진희 헤어스타일의 모티브가 됐다. 이강주의 <캥거루를 위하여>도 사랑해 마지않던 작품이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공통점은 “인류를 너무 사랑해서 결국 인간 찬가를 그리는 작가들”이다. 타카노 후미코, 요시나가 후미 역시 남들이 약간 질릴 수 있는 부분이 있는 캐릭터도 결국 미워할 수 없게 사랑스럽게 그려낸다. 이들처럼 정영롱은 등장인물이 아무리 얄미운 짓을 해도 종국에는 귀엽게 느껴지도록 그리고자 한다.

    1990년대 순정 만화를 보며 자란 정영롱은 여성의 이야기가 폭발적으로 나오던 그 시절이 만화 역사에서 없었던 듯 넘어가려는 시류를 본다. 순정 만화의 전성기는 곧잘 폄하된다. “만화 박물관에도 그때가 아카이빙이 되어 있지 않아요. 순정 만화는 내가 겪은 만화 세상의 전부인데 없다고 하니 내가 본 건 뭘까 싶어져요. 요즘에는 여성 웹툰 작가 작품이 많이 나오고, 드라마가 되기도 해요. 이러다 보면 차곡차곡 쌓일 것이고 저 역시 할 수 있는 한 여성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요.”

    <남남>은 드라마화를 앞두고 있다. 웃음의 강도와 달리 시트콤이 아니라 16부작 드라마 형태다. 달리기 같던 연재를 마치고 개운한 기지개를 켜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남> 속 인물들은 결국 남남인지” 물었다. “가족은 남이면 좋겠지만 남일 수 없는 관계라서 ‘남남’이라고 제목을 지었어요. 남이라는 글자 두 개를 딱 붙이니 이상한 단어가 됐어요. 따로따로 있지만 어떻게 보면 같이 태어나는 이야기, 그게 <남남>입니다.” (VK)

    에디터
    조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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