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위크 이후, 우크라이나 모델들의 다음 행보는?
2022 S/S 디올 쇼에 섰던 모델 비카 레자(Vika Reza)는 패션 위크를 위해 지난 2월 24일 키이우에서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날 짐을 챙기는 대신 그는 폭격 소리에 잠에서 깨야 했다. 그리고 친구 세 명과 함께 차를 타고 간신히 우크라이나를 빠져나왔다. 보통 9시간가량 소요되던 슬로바키아 국경까지의 여정은 긴 피란 행렬과 연료 부족, 안전상의 문제 때문에 꼬박 3일이나 걸렸다.
3일째 되던 날, 그는 결국 차에서 내려 걸어서 국경을 넘었다. 에이전시 시스템(System)과 파리의 에이전시 우먼 360(Women 360)은 운전기사를 배치해 슬로바키아 국경을 넘자마자 레자를 픽업한 후 코시체(Košice) 공항으로 데려다주게 했다.
“파리에 도착하면 괜찮을 거라고, 식사나 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럴 수 없었죠. 큰 소리가 들릴 때마다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식당에 못 가겠더라고요. 친구들과 가족이 폭탄이 쏟아지는 그곳 지하실에 대피해 있는데 제가 아무렇지 않게 멀쩡히 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비카는 현재 얼마 전 도착한 다른 우크라이나인 두 명과 함께 파리 1구에 있는 친구 집에 머물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고향인 모델들은 살 곳, 그들의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갈 방법, 가족의 생명이 위협받을 때 대처할 방법 등을 강구해야 하는,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복잡한 상황에 직면했다. 레자는 우크라이나의 또 다른 모델 케이트 언더우드(Cate Underwood)와 파샤 하룰리아(Pasha Harulia)와 함께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화요일에 미우미우 쇼에 섰던 하룰리아는 27일 왓츠앱을 통해 “쇼에 집중하는 게 살짝 힘들었어요. 지금 제가 처한 상태는 평온함이나 침착함과 거리가 머니까요. 정말 슬프고 화가 나요. 제 신경은 온통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쏠려 있죠. 물론 패션쇼는 아주 근사했어요. 그런 자리에 참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스무 살의 보그단 피사렌코(Bogdan Pysarenko)는 패션 위크 때문에 파리로 이동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 사태로 그 계획이 연기됐다. 한편 우크라이나는 계엄령을 발동해 18세 이상의 남성들에게 남아서 조국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의 에이전트인 시스템의 창립자 제레미 루(Jeremie Roux)는 해결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라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시스템 지부에서 일하던 에이전트 세 명은 모두 안전하게 우크라이나에서 탈출했다. 그들은 EU가 부여하는 우크라이나 난민 특별 지위 신청을 통해 최대 3년(현재까지 우크라이나인은 90일만 솅겐 지역(Schengen Area)에 체류할 수 있다) 동안 EU 국가에 거주할 수 있게 됐고, 현재는 파리에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시스템은 얼마 전 계약한 15세 모델 폴리나 루츠케이(Polina Lutskay), 그의 가족과 함께 탈출한 또 다른 우크라이나인 가족을 위해 집을 마련하기도 했다.
제레미 루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의 상황이 가장 걱정된다고 한다. “소속 모델 두 명이 아직도 그곳에 가족과 함께 있는데, 3일간 아무 소식을 듣지 못했어요. 또한 탈출한 저희 직원들과 모델들의 가족 중 일부 역시 아직 그곳에 있지만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는 상황이죠. 신뢰할 만한 언론이 전하는 뉴스에서는 물, 음식, 전기 모두 끊겼으며 산부인과 병원을 포함한 많은 곳이 폭격당하는 바람에 사상자 중 여성과 어린아이가 많다고 합니다. 탈출로는 러시아군이 폭파했고요. 이미 처참한 상황이죠. 저희 모델들과 직원들의 상황을 굉장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어요. 정말 미칠 노릇입니다.”
모델 사샤 크리보셰야(Sasha Krivosheya)는 하르키우 출신이다. 러시아의 국경과 가까운 우크라이나 북동부에 있는 이 도시는 폭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는 전쟁이 발발한 첫날, 늦게 혼자 탈출했다. 총 36시간에 걸쳐 기차를 세 번 갈아탄 후 바르샤바에 도착했고 패션 위크 기간 동안 쇼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위해 그곳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저는 이곳에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요. 자원봉사하기에도 더 수월하고요.” 그러면서 크리보셰야는 현재 가족이 하르키우보다 더 안전하고 조금 더 서쪽에 있는 폴타바 부근 마을에서 지내기 때문에 한시름 놓은 상태라고 덧붙였다.
최근 장 폴 고티에 광고와 카사블랑카 F/W 캠페인에 등장한 바 있는 파리에서 활동하는 모델 케이트 언더우드는 전쟁 발발 직전 자신의 가족을 파리로 데려왔다. 그에 따르면 특히 폭격이 이른 아침 시간에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불안과 분노로 잠드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그는 모델로 계속 활동하면서 우크라이나 군대, 의료진, 인도적 지원 등에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는 등 멀리서나마 최선을 다하고 있다. 언더우드는 수십 개의 텔레그램 그룹과 접촉하면서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는가 하면 우크라이나를 탈출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소통한다.
파샤 하룰리아는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던 2014년 키이우로 이주했다. 그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생각하면 앞으로가 더 막막하다고 고백했다. “파리에 한 달간 머물 예정이에요.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다른 곳으로 이동할지 여부를 결정할 거예요. 우리 가족은 이산가족이 되었어요. 아버지가 키이우에 계시거든요. 많은 남자들이 그곳에 남아 있죠. 엄마와 남동생은 우크라이나 서부로 피란 갔어요.” 그러면서 그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자유를 누릴 우크라이나 국민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면서도, 그들이 견디고 있는 이 끔찍한 전쟁과 불의에 대해 세상 곳곳에 알리고 기부도 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레자는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밀란 패션 위크에서 보여준 침묵의 패션쇼를 비롯해 여러 브랜드가 보여준 희망의 메시지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구호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어요. 사실 저는 파리 패션 위크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돈을 벌어서 우크라이나를 돕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에 일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부디 우크라이나에 자유와 평화가 함께하기를… 그것이 모두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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