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바다로 둘러싸인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집

2022.03.18

by 조소현

    바다로 둘러싸인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집

    푸른 해원을 안팎으로 품은 파라다이스. 인테리어 디자이너 켈리 웨어스틀러가 이룩한 말리부 해변가 집은 바다로 둘러싸여 헤어나지 못하는 하나의 미로 같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포즈를 취한 켈리 웨어스틀러. 항상 새롭고 산뜻한 시도를 즐기는 그녀의 디자인 철학은 패션에서도 유효하다.

    토비아 스카르파 소파, 이탤리언 빈티지 램프, 필 와그너(Phil Wagner)의 페인팅 작품 등 수년에 걸쳐 수집해온 가구와 오브제가 놀라운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거실 전경. 주말마다 가족이 모여 하루를 마무리하는 공간이다

    구글에 켈리 웨어스틀러(Kelly Wearstler)를 검색하면 사람들이 자주 궁금해하는 질문이 연달아 뜬다. ‘켈리 웨어스틀러의 연봉은 얼마인가요?’ ‘어떻게 켈리 웨어스틀러는 부자가 되었나요?’ 등이다. 타고난 감각과 특출한 재능으로 경력을 켜켜이 쌓아온 그녀에게 ‘미국에서 가장 잘 버는’과 같은 수식어는 불가피하지만 때론 ‘금수저’란 피상적 단어처럼 억울한 잣대가 되곤 한다.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주말엔 레스토랑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때도 있었죠.”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나 보스턴에서 그래픽 디자인과 건축을 공부한 켈리는 졸업 후 LA로 건너가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세트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러다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닌 아발론 호텔(Avalon Hotel)의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는 기회를 잡았다. 미디어는 ‘마릴린 먼로가 살았던 화려한 아발론 시대의 부흥’ ‘중세기의 모더니즘에 대한 유쾌 발랄한 접근’ ‘주거와 아트를 접목한 전무후무한 스타일’이란 수식어로 칭찬을 하며 새로운 스타 디자이너의 탄생 소식을 퍼 날랐다. 이후 뉴욕 버그도프 굿맨(Bergdorf Goodman) 백화점, 프로퍼 호텔(Proper Hotel)을 비롯해 수십 개의 부티크 호텔 공간에 신선한 활기를 불어넣으며 켈리 웨어스틀러 전성시대가 도래했음을 증명했다.

    자수성가형 디자이너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회사를 설립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웬 스테파니, 카메론 디아즈 등 쟁쟁한 할리우드 스타들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그토록 갈망하던 부와 명성이라는 노동의 열매를 맛볼 수 있을 때쯤, 켈리와 부동산 개발업자인 남편은 LA 도심 한복판에서 벗어나 온전한 휴식을 누릴 수 있는 주말용 도피처를 갈망했다. 그리고 베벌리힐스 자택에서 약 30km 떨어진 말리부 해변에 자리한 529㎡(160평) 규모의 집을 발견했다. 단번에 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곳은 말리부 해안가의 여느 곳이 그렇듯 유명 인사의 소유물이었다.

    “자넷 잭슨의 집이었어요. 위치는 훌륭했지만 여기저기 손볼 곳이 많았죠. 빛과 전망을 고려해 구조를 바꿨어요. 공사하는 데 3년이 걸렸는데, 애정과 사랑이 듬뿍 담긴 일련의 노동이었어요.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켈리가 13년 전 그때를 회상하며 말을 이었다. “말리부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우리 가족의 생활 방식에 완벽하게 어울려요. 주말마다 질 좋은 시간을 보내는 특별한 장소가 되었죠. 아침마다 두 아들과 반려견 윌리, 하비에르와 해변에서 뛰거나 서핑을 하는데(침대에서 걸어서 2분이면 물속에 들어갈 수 있다!) 운동 후 즐기는 바다 수영은 그 어떤 느낌보다 황홀해요.”

    다이닝 공간에 브랜드 켈리 웨어스틀러의 주마 체어와 함께 매치한 직사각형의 석재 테이블은 그녀가 이 집만을 위해 맞춤 제작한 것으로 세상에 하나뿐인 디자인이다. 테이블 끝에는 빈티지 장식장을 놓고 페가소 갤러리(Pegaso Gallery)에서 구입한 작품을 걸었다.

    해안 풍경은 집 전체를 아우르는 테마. 따뜻한 천광이 쏟아지는 입구에는 코르누코피아 오브제와 노먼 처너(Norman Cherner)의 체어 두 개를 나란히 놓았다.

    거실뿐 아니라 부엌에서도 광활한 오션 뷰를 확보하기 위해 바닥을 서로 다른 높이로 설계해 입체감을 더했다. 천장에 머리를 맞댄 고무나무가 실내에 온기를 선물한다. 계단 위에 놓인 목재 조각 작품은 빈티지.

    유리와 황동으로 장식한 현관을 열고 집 입구에 들어설 때 <보그> 팀을 가장 먼저 반긴 건 거대한 크기의 코르누코피아(Cornucopia, 풍요의 뿔) 오브제다. 언젠가 남편과 함께 떠난 마이애미 여행에서 누군가의 집 뒷마당에 방치된 채 버려진 것을 발견했다.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생긴 고색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말해준다. “태곳적 표면이 말리부 해안과 꼭 닮지 않았나요? 공간을 디자인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건 주변 환경이죠. 이 집은 바다와 아주 맞닿았기 때문에 풍경이 주는 생동감을 살려 실내 에너지와 조화를 이루고자 했어요.”

    켈리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상상은 입구에서 걸어 나와 널찍한 거실에 다다를 때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일부러 바닥 플랫폼의 높이를 달리한 부엌과 거실, 시야를 가리는 방해물 없이 한 면 전체에 자리한 통창 덕분에 광활하고 푸른 ‘오션 뷰’를 풍요롭게 즐길 수 있다. 이 광경은 2층에 있는 부부의 침실과 두 아들의 방, 게스트 룸에서도 이어진다. “만조 때가 되면 파도가 집 아래로 밀려들어요. 마치 커다란 배를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죠.” 통창을 열어젖히니 파도가 철썩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적신다. 평화로운 이곳에서 보내는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순간은 언제일까. “가족과 이야기도 나누고 게임을 하면서, 수평선 위로 해가 저무는 걸 보는 저녁 시간이에요. 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이 거실에서 쌓아가는 주말의 순간순간이 너무 소중해요.” 켈리가 흐뭇하게 수평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다 테마를 이어가는 물결무늬의 대리석 벽이 1층과 2층 집 안 곳곳에서 다채로운 형태와 색상으로 눈에 띈다. 청량한 터키색부터 짙은 심해 빛깔과 붉은 화산토 빛깔, 말간 상아색까지! 색깔을 활용하는 데 거침이 없다. 굽이치는 듯한 파도와 부드러운 해안선을 완벽하게 빼닮은 모습이다. 켈리는 무늬가 선명한 대리석, 따뜻한 톤의 목재, 단단한 돌이나 회반죽으로 마감된 벽, 천연 모직과 울로 만든 러그로 해안 풍경을 은은하게 암시하고자 했다. “바다야말로 이 프로젝트의 영웅이자 영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어울리는 걸 목표로 했죠.”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 앞엔 천장을 뚫을 기세로 사랑을 먹고 자란 고무나무(Ficus Tree)가 보인다. 이 집의 절정이자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다. 엄청난 높이와 무게 때문에 크레인으로 들어 올리고, 아래로는 깊게 땅을 파는 대규모 공사가 진행됐다. “집 중앙에서 나무가 자라면 어떨까 늘 상상했어요. 해풍을 맞고 자란 나무죠. 맑은 공기와 풍부한 자연광을 선물하기 위해 나무 위로 개폐되는 천창도 만들었답니다.”

    켈리 웨어스틀러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살던 어린 시절에 앤티크 가구 딜러였던 엄마를 따라 벼룩시장이나 골동품 경매장에 놀러 가곤 했다. 엄마의 취향과 수집품을 보며 자연스럽게 미에 관한 안목과 자신만의 경쟁력을 갖게 됐다. 미술은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었으며 매일 아침 옷 입는 시간을 좋아했고, 중고품 가게에선 ‘득템’하려는 열정으로 들끓었다. 일찍이 창의적인 직업이 자신의 천직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질서와 혼돈, 강인함과 부드러움, 세련되지 않은 날것과 동시대적인 것을 함께 배치하는 감각은 그때 배운 것 같아요. 경계나 제약 없이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고자 합니다. 제게 인테리어 디자인은 패션과도 같아요.”

    집 안은 이렇듯 자유분방한 합리주의 속에 이야기를 가진 애장품으로 가득하다. 켈리는 그중에서도 거실 안쪽 벽에 놓인 신원 미상의 LA 목수가 만든 큐브 형태의 1970년대 조각품에 애착을 갖고 있다. “바다를 바라보고 섰을 때, 다이닝 공간이 왼쪽에 있고 오른쪽으로는 거실이 이어져요. 이 작품은 책꽂이 역할을 하는 동시에 무게감이 있어서 공간이 짧아 보이지 않게 깊이를 더하는 장치가 됩니다.”

    특유의 변별력으로 수집한 가구와 예술품은 캘리포니아 디자인 황금기라 일컫는 1960~1970년대 작품이 대부분이다. 파리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미국 아티스트 셰일라 힉스(Sheila Hicks)의 태피스트리 조각이 그중 하나. 키 큰 고무나무와 어울리도록 벽에 걸어놓았다. 거실에는 아프라와 토비아 스카르파(Afra and Tobia Scarpa)가 만든 소파와 의자, 가에 아울렌티(Gae Aulenti)의 대리석 커피 테이블을 함께 배치해 그 시대를 선명하게 되살리고자 했다.

    커다란 스크린처럼 자리한 통창을 통해 하루의 흐름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양쪽으로 다이닝 룸과 거실이 펼쳐진다. 성게를 형상화한 천장 조명은 브랜드 켈리 웨어스틀러 제품.

    루이스 네벨슨(Louise Nevelson)의 기념비적 조각 작품 덕분에 거실 벽난로가 한층 돋보인다.

    “소셜 미디어나 온라인 경매로 접근할 수 있는 루트가 많아졌어요. 지금이야말로 재능 있는 현지 아티스트를 알아볼 만한 기회죠.” 해외 여행길이 팍팍해진 지금, 일종의 ‘물건 사냥’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 “주로 로컬 컬렉터와 협업하거나 타 도시의 벼룩시장, 미술관을 방문하는 편입니다. 새로운 물건을 들일 때는 어디에 놓을지 사전에 신중하게 선택하고, 기존 작품과 어떤 조화를 이끌어낼지 고려합니다.” 켈리가 덧붙였다.

    요즘 눈여겨보는 아티스트는 오너 타이터스(Honor Titus), 로이 홀로웰(Loie Hollowell), 페테르 본데(Peter Bonde), 브레히트 라이트 갠더(Brecht Wright Gander)다. 역사가 깃든 빈티지 오브제와 신인 작가의 현대적인 작품을 나란히 놓는 과정을 반복한다. “과거와 현재가 가득한 이 집이 제 디자인의 구심점이에요.”

    실제로 켈리는 예술가와 꾸준히 협업 프로젝트를 이어간다. 네덜란드의 예술 그룹 로트한전(Rotganzen)과 협력하여 만든 컬렉션이 그 대표적인 예다. 로스앤젤레스의 젊은 아트 신에서 영감을 받아 녹은 디스코 볼을 연상시키는 퀼 페트(Quelle Fête) 시리즈는 며칠 만에 매진되었다. 최근엔 객원 에디터가 되어 루이 비통 시티 가이드 편집에 참여했다. 켈리 웨어스틀러 사전엔 결코 한계란 없다. “미래에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예술에 더 친밀하게 접근할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인테리어 디자인이나 패션, 첨단 기술이 하나의 수단이 될 수도 있겠죠. 다양한 카테고리의 산업이 예술과 융합하는 지점을 계속 탐험하고 싶어요.” (VK)

    유리와 황동으로 장식한 집 현관문. 긴 등받이가 돋보이는 스테이트먼트 체어는 퍼스트딥스에서 구입한 1960년 빈티지 제품이다.

    파도가 들썩이는 백사장을 연상시키는 게스트 룸 욕실 풍경. 빈티지 그림 아래는 뤼트 얀 코커(Ruud-Jan Kokke)의 나무 의자를 놓았다.

    부부 침실의 한 면은 토퍼 친(Tofer Chin)의 입체적인 페인팅 작품과 어울리도록 모노톤의 그림으로 장식했다. 창밖으로는 말리부 해변의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에디터
    조소현
    컨트리뷰팅 에디터
    우주연
    포토그래퍼
    김민은, Joyce Park(Portra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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