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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바너의 한국 첫 개인전

2022.03.24

by 김나랑

    제임스 바너의 한국 첫 개인전

    꽃 피는 대로, 비오는 대로, <보그>엔 다 당신입니다.

    ‘AGIP Calendar Model’, 1974.

    제임스 바너(James Barnor)의 한국 첫 개인전이 열린다. 1929년생인 그는 가나 최초의 전업 사진작가로 인물, 저널리즘, 패션, 음악 등 여러 분야에 걸쳐 3만2,000여 점의 아카이브를 보유하고 있다. 1950년대 초 작가의 고향 가나 아크라(Accra)에 스튜디오 ‘Ever Young’을 설립해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후 급변하는 가나를 담아냈으며, 1950년 런던으로 이주해 남아프리카 문화를 다루는 잡지 <Drum>에서 프리랜스 사진가로 활동했다. 그는 1970년대 초 귀환해 가나에 최초로 컬러 사진을 보급했고, 현재는 런던에 거주하며 활동 중이다. 2021년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 회고전에서 1950~1980년대 사진 작품을 소개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3월 17일부터 5월 8일까지 열리는 전시 ‘Ever Young’에서 1950~1980년대 주요 작품을 선보인다. 여전히 정력적인 94세의 사진가 제임스 바너를 줌(Zoom)으로 만났다.

    자신에게 사진은 어떤 의미인가?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기 전에는 교사였다. 사진이 내 인생에 찾아온 후론 늘 함께였다. 가나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초기엔 사무실이나 공항 등을 청소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사진으로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주목받았다. 사진작가로서 뉴스나 정치가를 쫓으면서 정말 많은 종류의 삶을 접했고,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1950년대 초 가나에 설립한 스튜디오 ‘에버 영’은 스칸디나비아 설화에서 따왔다.

    1945년 영어 선생님이 이둔의 정원 이야기를 들려줬다. 노르드 민족의 아름답고 젊은 여신 이둔이 ‘에버 영’이라는 예쁜 정원에 살았다. 이둔은 사과로 가득한 황금 수레가 있었는데 쇠약해진 용사들에게 사과를 나눠 주었다. 용사들은 사과를 먹고 젊음의 생기를 되찾았다. 이후 이둔의 정원을 찾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더 신기하게도 보이지 않는 손이 수레에 계속 사과를 채웠다. 설화 속 에버 영(영원한 젊음)은 스튜디오의 핵심과 통한다. 스튜디오에 오면 사진 촬영을 하며 달라진 나를 만나게 되지 않는가.

    ‘The Olas Comedians, an All-Male Troupe of Actors, Accra, Jamestown, Studio Ever Young’, C. 1953-1954.

    ‘Drum Cover Girl Marie Hallowi, Rochester, Kent’, 1966.

    ‘Erlin Ibreck at Trafalgar Square’, 1966-1967.

    ‘Young Girl with a Doll’, C. 1972.

    1950~1970년대 런던과 아크라에 일어난 정치·사회적 변화를 촬영했다. 포토저널리스트로서 활동한 이유는 일종의 의무감 때문인가?

    사진과 저널리즘은 이어져 있다.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45년, 마지막 학년에 학보 편집장을 맡았다. 발행 부수가 많은 학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문 양면을 펼칠 정도는 되었다. 1년간 매주 기사를 써냈다. 한번은 학교에 먹거리를 팔러 오는 행상인들의 자금 행방을 취재해 선생님을 놀라게 한 적 있다. 그런 학생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렇게 매사에 현안을 포착하고 책임을 다할 힘을 배웠다. 후에 가나에서 발행된 최초 영자 신문의 제안을 받아 저널리즘 사진도 많이 찍었다.

    당신의 1960년대 작품은 런던의 다문화 현상을 포착하고 이상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1960년대 영국에 갔을 때 만난 사진작가 데니스 켐프(Dennis Kemp)에게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그와 친해져 가나와 나이지리아에 함께 가 촬영하기도 했다. 1960년 10월 나이지리아 독립 현장도 그중 하나다. 그가 컬러 사진 인화 기술을 가르쳐줬다. 당시엔 사진가가 컬러 사진을 찍어도 인화할 줄 몰라 인화 전문소에 보내야 했으니 엄청난 배움의 기회였다. 게다가 데니스 덕분에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도 다녔다. 대학을 마친 1963년경 학교 측에서 컬러 사진 인화를 내게 맡겼고, <드럼> 잡지도 일을 의뢰했다. 그렇게 많은 런던 시대상을 담아낼 수 있었다. 당시 내게 주어진 이 모든 기회는 굉장한 것이었다.

    이번 전시에서 대표작 중 하나인 ‘Mike Eghan at Piccadilly Circus’을 볼 수 있다. 피카딜리 서커스에선 BBC 아프리카 방송인 마이크 이건(Mike Eghan)을 촬영한 사진이다.

    내 작품 중 처음으로 테이트 갤러리 컬렉션에 포함됐다. 마이크 이건은 가나 방송국에서 일하다가 BBC의 아프리카 방송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유명인이 되었다. 잡지 <드럼>에서 그의 기사를 쓰면서 내게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우린 대화를 나누다가 트라팔가 광장, 피카딜리 광장을 누비며 사진 작업을 했다.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좋은 사진작가란?

    “그냥 찍으면 되지 않나?”라는 이에게 나는 “좋은 교육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육과 건전한 정신은 ‘아무 사진’이 아니라 ‘목적 있는 사진’을 가능케 한다. 교육 기반이 부족한 아프리카에서는 특히 최소한의 교육만 받고 사진 일을 시작하곤 한다. 이것이 개선되어야만 사진을 예술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사진가여, 그저 카메라로 찍고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수준에서 벗어나라.

    이제 모두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SNS로 전 세계와 공유하는 시대다. 오늘 먹은 파스타도 사진을 찍어 수만 명의 팔로워와 공유한다. 이 풍경이 어떠한가?

    변화를 환영한다. “우리 세대는 이렇게 살아왔단다. 나는 까만 천을 뒤집어쓰고 카메라를 쓴 사람이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새로운 일은 일단 시도하고 결과를 지켜본다. 92세에 줌으로 인터뷰하기 얼마나 어려울지 생각해봐라. 결국 성공했고 덕분에 행복하다. 나는 “뼈까지 다 썩기 전에는 죽은 게 아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정말 손끝도 움직이지 못하면 모를까, 그 전까지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이번 인터뷰를 한 이유도 간단하다. 혹여 더는 사진 촬영을 않더라도 사진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는 사명 때문이다.

      에디터
      김나랑
      포토그래퍼
      James Barnor(Artworks), Jonathan Greet(James Barn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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