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과 마네킹이 없는 의복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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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과 마네킹이 없는 의복 전시

2022-04-08T11:53:16+00:00 2022.04.08|

 

어둑한 전시관에 처음 들어서면 베틀이 돌아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몇 폭의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고상한 분위기의 작품에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 전시장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런 초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그림이 아닌 캔버스에 인쇄한 사진이고, 심지어 인물들이 입은 옷의 일부에는 자수를 덧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포토그래퍼 반겔리스 키리스(Vangelis Kyris)와 자수 장인 아나톨리 게오르기에프(Anatoli Georgiev)의 독특한 의복 전시 <영혼을 수놓은 초상-그리스의 의복(영혼을 수놓은 초상)>에 대한 이야기다.

의복에 관한 전시지만 옷도, 마네킹도 하나 없다. 그리스 국립역사박물관이 1821년에 일어난 그리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 아티스트 듀오에게 프로젝트를 의뢰하자, 듀오는 200년 전의 전통 의복을 입은 모델들을 촬영한 뒤 그 사진을 캔버스에 인쇄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후 캔버스에 인쇄한 옷에 자수를 덧대 세상에 둘도 없는 의복 전시를 위한 작품을 완성했다. 200년 전의 그리스 의복이 2022년 서울 한복판에서 현대적인 사진과 전통적인 자수라는 두 분야의 만남을 통해 재탄생한 것이다. <보그 코리아>가 전시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반겔리스 키리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전시 <영혼을 수놓은 초상>에서는 의복 전시에서 필수라 여기던 옷과 마네킹을 찾아볼 수 없다.

모든 것은 아나톨리의 장난스러운 제안에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둘 다 “그냥 해보지 뭐”라는 식의 태도였지만, 생각해보면 이제껏 이런 의복 전시는 없지 않았나. 아나톨리의 제안이 전례 없는 아이디어라는 것을 깨달은 뒤 우리는 매우 진지해졌다. 그리고 나의 경험 역시 도움이 됐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 나는 세계 각지의 전통적인 장소, 아프리카 여러 나라와 예멘, 네팔 등 다양한 나라의 사진을 찍고 전시를 여는 프로젝트 ‘The Voyage Within(내면의 여정)’을 진행했다. 그 후 그리스 국립역사박물관에서 그리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의뢰받았고, 자연스럽게 사진이란 매체를 전통 의복 전시에 적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과거를 현재로 가져왔을 뿐이다. 내가 눈으로 영혼이 담긴 사진을 찍으면, 아나톨리는 실을 사용해 그것을 미래로 가져간다. 자수, 옛 의복 같은 그리스의 전통과 유산을 사진이라는 현대적 매개체를 통해 재탄생시킨 셈이다.

그리스의 자수 기법은 아주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전통 방식을 고수하면서 겪은 어려움은 없었나?

그리스에는 지역마다 서로 다른 자수 기법이 존재하고 몇몇 기법은 관련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아나톨리가 자수를 배우는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아나톨리의 재능은 단순히 수를 놓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사진의 전체적인 명도를 파악해 밝은 부분에는 자수를 강하게 놓고, 명도가 낮은 부분에는 자수를 옅게 놓아 작품을 더 사실적, 입체적으로 만든다. 어디에 자수를 어떻게 놓을지는 순전히 아나톨리의 결정에 달려 있다.

200년이 넘은 의복을 다루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실제로 프로젝트를 끝내는 데 1년 반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됐다. 국립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한 전통 의복을 스튜디오로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에 박물관에서만 촬영이 가능했고, 관계자들만 옷을 다룰 수 있었다. 오래된 옷인 만큼 옮기거나 입고 벗을 때 각별히 주의할 수밖에 없었고, 200년 전의 사람들은 현대 사람들보다 훨씬 왜소했기 때문에 모델 섭외에도 여러 제약이 있었다. 촬영 자체는 약 1년이 걸렸지만, 자수 작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세계 각지에서 전시를 열 계획이기 때문에 작품 수를 계속 늘려야 한다. 그래서 아나톨리는 한국에 올 때도 작업 도구를 가져와서 시간 날 때마다 수를 놓고 있다.

이를테면 ‘그리스적’ 외모의 모델 같은, 모델 섭외 기준이 있었나?

오히려 작품에서 그리스적 색채를 덜어내고 싶었다. 그리스 전통을 더 널리 알리고 싶기 때문에 다양한 느낌을 주는 모델들을 촬영했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공존하는 다양성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 모델들뿐 아니라 스페인, 이탈리아, 이스라엘 등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모델들을 섭외했다.

작품이 전체적으로 로맨틱하다고 느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리스는 400년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아 르네상스 시대를 경험하지 못했다. 르네상스 정신이 그리스 문화로부터 영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우리의 전통 의복을 르네상스식으로 로맨틱하게 해석하려 했다. 작품을 본 사람 중 다수가 사진이 아니라 그림 같다고 이야기한다. 흥미롭게도, 내가 사진작가로 성장하며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사람들 역시 화가가 대부분이었다. 로맨티시즘은 우리가 잃어서는 안 될 가치이고 더 많은 사람이 그것을 느꼈으면 한다.

여러 작품 가운데 특별히 마음에 드는 작품을 하나만 고른다면?

하나만 고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작품 전체가 곧 나와 아나톨리의 삶과도 같기 때문이다. 특히 아나톨리가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그가 기도를 올리는 신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집중력을 유지하고 장인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 대단할 뿐이다. 내가 사진으로 대상을 강렬하게 포착한다면, 아나톨리는 자수를 통해 전체적인 밸런스를 잡아주는 식이다.

<영혼을 수놓은 초상>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과거의 유산을 이어가면서 그것을 현대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것!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의 행보도 기대된다.

내년쯤 다음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인데, 한국의 전통 의복 한복을 다뤄보고 싶다. 나도 한복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고, 아나톨리 역시 아시아의 자수 기법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의 자수는 좀 더 섬세하고 우아하며 로맨틱한 느낌을 준다. 패션의 예술적 측면과 전통적 측면이 부각되는 작업을 꾸준히 할 생각이다.

3월 25일에 시작된 <영혼을 수놓은 초상>展은 6월 3일까지 KF갤러리 (https://www.kf.or.kr/kf/ru/cnts.do?resveMasterSn=11020&mi=1660)에서 온·오프라인으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