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에도 성별이 있을까?
‘여성용’ ‘남성용’. 향수는 명확히 젠더를 구분하던 문화에서 점점 멀어진다.
<향수의 모든 것(Perfumes: The A-Z Guide)>(1992)의 공저자 타니아 산체스(Tania Sanchez)에 따르면 현대 향수의 시작은 1882년 우비강(Houbigant)의 ‘푸제르 루아얄(Fougère Royale)’의 출시로 여겨진다. 화학적 합성물을 사용한 첫 번째 코롱이자 문화적으로는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닌다고 산체스는 설명한다. “푸제르 라인에는 굉장히 남성스러운 향조가 포함돼 있습니다. 브뤼(Brut), 드라카 느와르(Drakkar Noir), 쿨 워터(Cool Water)가 그런 제품인데, 당시 ‘진짜 남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안달이 난 이들을 위한 향수라고 할 수 있죠.”
1930년쯤에는 ‘푸제르 루아얄’의 광고에 “꽃향기는 여성을 위해 남겨두십시오”라는 광고 카피가 칵테일을 마시며 시가를 피우고 턱시도를 입은 남성의 이미지 앞에 적혀 있었다. 물론 그 꽃향기란 우비강의 ‘켈크 플뢰르(Quelques Fleurs)’ 향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재스민과 투베로즈, 바이올렛, 로즈, 일랑일랑을 다소 거칠게 조합한 향조다. 마치 보석을 고르듯 향수에도 신경 쓰는 ‘여성’을 위한 컨셉이었다.
이런 향수는 론칭 당시였던 빅토리아 시대에 부합하는 엄격히 정해진 젠더 역할을 잘 드러냈다. 그렇다면 과연 현재는 어떨까? 팝 스타 빌리 아일리시의 향수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지난가을 처음 출시한 ‘젠더 플루이드(즉 젠더 정체성이 고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것)’ 향수는 보틀이 여성의 가슴팍을 형상화한 디자인이다. 이 자극적인 향기를 만들어낸 스무 살의 빌리 아일리시는 “그 안에 있는 누군가를 볼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든 향수입니다. 그 누군가는 바로 당신일 수 있죠”라고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지난 30년간 ‘씨케이 원(CK One)’이라는 향수는 이런 ‘젠더 플루이드’ 향수로서 명성을 떨쳐왔다. 이제 새로운 세대는 향수가 이분법적 젠더 구분을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
‘향’이라는 순수한 형태는 결코 젠더로 정의되지 않는다. 버버리가 출시한 베르가모트 향의 ‘히어로(Hero)’ 향수의 최근 광고에는 상의를 탈의한 배우 아담 드라이버가 마치 켄타우로스처럼 말과 한 몸이 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꽃, 스파이스, 우드, 허브와 같은 원료가 젠더를 중심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인도 델리 베이스의 릴라누르 퍼퓸스(LilaNur Parfums)의 창립자 아니타 랄(Anita Lal)은 이야기한다. 재스민 삼박을 베이스로 한 ‘말리 인솔라이트(Malli Insolite)’를 대표로, 인도에서 나는 특별한 원료로 젠더 플루이드 향수 라인을 내놓은 기업이다.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귀중한 향료인 재스민이 예부터 여성스러운 향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주로 절이나 가정에서 사용하는 향으로, 모든 젠더 정체성을 아우른다. 장미 역시 꾸준히 젠더로 구분되는 향이라고 산체스는 덧붙인다. “바니스 뉴욕에 있는 프레데릭 말의 매장 직원이 저에게 사우디 남성 몇 명이 직접 사용할 목적으로 ‘윈 로즈(Une Rose)’ 재고 전부를 사갔다고 이야기하더군요.” 또한 아랍 문화권에서는 프레데릭 말 향수 중 투베로즈가 메인 향료인 ‘카날 플라워(Carnal Flower)’를 포함한 플로럴 계열에 대한 성 구분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프레데릭 말의 ‘비가라드 꽁쌍뜨레(Bigarade Concentrée)’는 비터 오렌지를 사용한 오 드 코롱으로, 젠더 구분이 모호한 향기라는 점에서 모이러앤비르츠(Maurer&Wirtz)의 클래식한 시트러스 향수 ‘4711’을 연상케 하는 상쾌함을 내세웠다. “광고나 다른 특색보다는 무언가 다른 것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죠.” 2020년 이솝의 ‘로즈(Rozu)’ 향을 창조한 바나베 피용(Barnabé Fillion)은 현대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한 장미 향에 베티버를 레이어드해 ‘젠더 간의 경계’를 표현했다.
이토록 젠더 간극은 점차 좁아진다. “아주 중요한 변화의 시기에 있어요.” 내추럴한 젠더리스 향을 표방하며, 대표 향수로 ‘아쿠아 비리디(Aqua Vridi)’를 보유한 시질(Sigil)의 창립자 패트릭 켈리(Patrick Kelly)가 말했다. “젠더의 이분법적 구분은 더 이상 먹히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향수가 이런 방향성을 그 어느 비즈니스보다 빠르게 좇고 있죠.” 이렇게 기존 사고가 변화한 데에는 바이레도 창업자 벤 고햄(Ben Gorham)과 같은 젊은 향수 사업가의 공이 크다. 그는 2006년 젠더에 대한 불가지론을 기반으로 한 바이레도를 론칭함으로써 기존 마케팅 관행을 성공적으로 뒤엎어버렸다. “꼭 젠더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없거든요”라고 고햄은 지적했다. 바이레도의 최신작 ‘데 로스 산토스(De Los Santos)’는 풍부한 허브 향이 함유된 머스크 노트로 이달 말 출시될 예정이다.
Z세대는 향수를 유혹의 도구보다는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사용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바나베 피용은 말한다. 그는 신경학적 공감각을 표현하는 일곱 가지 향을 메인으로 하는 아르파(Arpa)라는 브랜드를 론칭했다. “어린 세대는 ‘경험’을 더 찾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들은 젠더에 집중한 마케팅과 관계없는 시그니처 향을 찾는다. 중요한 것은 광고나 향수 보틀이 아니라 내용물 그 자체와 관련 기억인 것이다.
내가 고용한 스무 살의 베이비시터에게 향수 테스트를 직접 했을 때도 위와 같은 사실을 몸소 느껴볼 수 있었다. 위에 언급한 향수 라인에 대해 미리 알려주지 않고, 어떤 성별에 연관해 생각하지 않으면서 오롯이 개인의 향 취향을 따르라는 가이드를 줬다. 그러자 순서에 특별한 의미 없이 그녀는 세 가지를 골랐다. 첫 번째는 아이데스 데 베누스타스(Aedes de Venustas)의 ‘16a Orchard’로, 톡 쏘는 진저와 아이리스 향이 특징이다. 두 번째는 파우더리한 은방울꽃 향과 시프레, 레더 노트가 믹스된 프레데릭 말의 신작 ‘신테틱 정글(Synthetic Jungle)’. 마지막으로는 ‘2022 디올 옴므 스포츠(2022 Dior Homme Sport)’로 코끝을 찌르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앰버우드 향이 마치 ‘연인의 포옹’처럼 느껴졌다는 이유로 선정되었다.
“브랜드 라벨을 떼어낸다면, 대중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데 더 개방적으로 변할 겁니다.” 내가 며칠 후 뉴욕의 놀리타 지역의 자그마한 매장, ‘센트 바(Scent Bar)’를 방문했을 때 그곳을 관리하는 비제이 우탐(Vijay Uttam)이 이야기했다. 우탐은 직원 추천 상품이 진열된 가판대를 보여줬는데, 파를 무아 드 퍼퓸(Parle Moi de Parfum)의 ‘밀키 머스크(Milky Musk)’가 놓여 있었다. 착향을 해보니 크리미한 샌들우드 향이 나를 사로잡았고, 편안하면서도 유혹적이고, 동시에 기존 내러티브를 완벽히 뛰어넘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기존 것에서 자유로운 점이 조향사도 높이 평가하는 지점이라고 알베르토 모리야스(Alberto Morillas)는 말했다. 그는 피르메니히(Firmenich)의 마스터 조향사로, ‘CK One’을 조향한 인물이자 최근에는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이끄는 구찌 향수를 담당하고 있다.
구찌는 젠더 경계를 없앤 향을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해리 스타일스를 캠페인 모델로 한 캐모마일과 재스민을 베이스로 한 ‘메모아 뒨 오더(Mémoire d’une Odeur)’가 대표적인 것이다. 모리야스는 “어떤 특정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향료를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향수는 이제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길’ 원하는지를 반영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만약 당신이 아름다운 켄타우로스가 된 기분을 느끼고 싶다 해도, 이제는 충분히 괜찮은 시대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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