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의 새로운 심장, Le19M
섬세한 손끝으로 작품에 숨을 불어넣는 장인들. 샤넬이 이 아름다운 가치를 보존하고 새로운 세대와 함께 현대적 비전을 펼치기 위해 11개 샤넬 공방을 한곳에 모았다. 샤넬의 2021/2022 공방 컬렉션이 펼쳐진 Le19M, 그곳을 <보그 코리아>가 방문했다.
길게 뻗은 흰 기둥 사이로 스며 나오는 빛처럼 런웨이를 걷던 모델들, 삼각형 구조의 건물로 퍼져 나가던 모델 수주의 노랫소리는 반가웠고 장소는 생경했다. 지난해 12월, 샤넬의 2021/2022 공방 컬렉션이 펼쳐진 현장은 언제나처럼 그랑 팔레도 아니고, 컬렉션을 가늠케 할 역사적인 장소도 아니었다. 초대장의 주소는 ‘2 Place Skanderbeg 75019 Paris’. 파리지엔도 예측이 불가능한 이곳은 어디였을까. ‘공방 컬렉션(메티에 다르 Métiers d’Art)’이라는 단어에 정답이 숨어 있었다. 공방 컬렉션은 2002년부터 샤넬이 메종 장인들의 솜씨를 선보이기 위해 전개한 컬렉션이다. 샤넬과 공방의 긴밀한 관계는 1985년 사라질 위기에 처한 협력 아틀리에를 샤넬이 인수한 것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노력의 결정체가 바로 2021/2022 공방 컬렉션의 장소로 선정된 Le19M이다.
샤넬은 각지에 흩어진 다양한 분야의 장인들이 한 공간에서 효율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돕고, 그들의 진가를 알리기 위한 마음으로 Le19M을 건축했다. 말하자면 Le19M은 장인들의 노하우를 보존하고 전승하고자 하는 공동체 하우스이자 요새인 격. 샤넬이 소유한 40여 개 공방 중 르사주 앙테리어(Lesage Intérieurs)와 자수 예술 학교(School of Art Embroidery)를 포함한 자수 공방 르사주(Lesage), MTX 장식 부서를 포함한 자수 공방 몽텍스(Montex), 슈즈 공방 마사로(Massaro), 깃털과 플라워 공방 르마리에(Lemarié), 모자 공방 메종 미셸(Maison Michel), 플리츠 공방 로뇽(Lognon), 플루 공방 팔로마(Paloma)와 금세공 공방 구센(Goossens)을 포함한 총 11개 공방 그리고 란제리와 수영복 브랜드 에레스(Eres)가 Le19M에 합류했다.
Le19M은 건축 그랑프리를 수상한 바 있는 건축가 루디 리치오티(Rudy Ricciotti)가 설계했다. 무려 2만5,500m² 규모로 길게 뻗은 하얀 콘크리트 선은 실처럼 얽혀 건물을 장식한다. 아틀리에를 방문하기 위해 긴 복도를 통과하고 층을 오르내리며 바라본 이곳은 꽤 현대적인 공간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공방 곳곳에 자리 잡은 19세기부터 사용한 오래된 도구, 그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장인들의 온기로 새 둥지 같은 아늑함이 느껴졌다. 특히 여기서 일하는 모두가 찬사를 보내던 ‘빛’은 건물이 지닌 최고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르사주의 아트 디렉터 위베르 바레르(Hubert Barrère)는 “색은 빛이 있기에 존재한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려 빛은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우리처럼 매일 색을 봐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이 건물은 선물과도 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Le19M은 정확히 말하면 파리 19구와 오베르빌리에(Aubervilliers)의 경계에 있는데 오베르빌리에는 파리 도심에서 벗어나 섬유와 패션 관련 회사가 정착한 지역이다. 지난 1월 공식 오픈을 알리던 날 이를 축하하기 위해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이 아틀리에를 방문해 경제 관련 연설을 마친 뒤 자리를 떠났다. Le19M을 통한 샤넬의 행보는 프랑스의 문화유산이자 주요 산업을 영속시키고 보존하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았다. 샤넬은 이를 통해 젊은 층이 공방의 노하우를 이어가는 길을 열었고, 이는 고용 창출로 이어질 전망이다. 실제로 샤넬의 대표 브루노 파블로스키는 향후 3년간 30세 미만의 청년을 1,200명 이상 고용하고 견습생 제도를 통해 훈련시킬 것을 약속했다.
Le19M은 파리 19구와 가브리엘 샤넬의 생일 19 그리고 Métiers d’Art(장인 정신), Mode(패션), Main(장인의 손)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어떤 장소는 존재와 움직임만으로 울림을 주기도 하는데 Le19M이 그렇다. 버지니 비아르는 어느 때보다 아틀리에와 장인의 진정한 예술성을 염두에 뒀으니 Le19M을 공방 컬렉션의 장소로 선택한 일은 너무도 당연했다. Le19M 건물과 오베르빌리에 지역의 스트리트 아트를 연상시킨 르사주의 그래픽 자수, 그 위로 메달과 체인으로 가득 채우던 구센의 믹스 매치 주얼리, 마사로에서 만든 커다란 진주 장식의 투톤 메리 제인 슈즈, 메종 미셸의 도시적이고 세련된 트위드 모자, 몽텍스의 실버 시퀸 자수와 르마리에의 사뿐거리는 깃털 장식까지. Le19M을 향한 버지니 비아르의 공방 컬렉션은 그녀가 이끄는 샤넬과 공방 장인들의 미적 교감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Maison Michel
첫 번째 공방은 모자 공방 메종 미셸. 메종 미셸은 1936년 설립되어 1997년 샤넬 공방에 합류했고, 14세기부터 이어진 모자 제작 비법을 보존하고 전수한다. 말간 얼굴의 프리실라 호아예(Priscilla Royer)는 버지니 비아르의 권유로 2015년부터 메종 미셸의 아트 디렉터를 맡고 있다. 그녀는 밀짚으로 만드는 상단과 챙이 평평한 모자 카노티에(Canotier)를 설명하며 공방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카노티에는 100년도 더 된 바이즈만(Weismann) 재봉틀로 꼰 밀짚 리본을 재봉해 만든다. 사라질 뻔한 이 재봉틀은 메종 미셸이 가까스로 복원했으며, 이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장인 두 명의 손길을 통해 움직인다. 이어 모자 형태를 만드는 작업장으로 이동했다. 장인은 종 모양의 클로슈 펠트를 스팀 기계로 늘리기를 반복하고 이것을 나무틀 위에서 반죽처럼 펴고 고정하며 카노티에 모양의 하얀 펠트 모자를 만들어냈다. 눈앞에서 펼쳐진 장인의 손짓은 굉장히 강렬했다. 이 펠트 카노티에를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2021/2022 공방 컬렉션에서 선보인 트위드를 덧댄 ‘앱솔뤼’ 모자다. 주름과 봉제선 없는 완벽한 실루엣을 재현한 것처럼 메종 미셸은 제품 퀄리티와 제작에 초점을 맞춰 샤넬과 호흡을 이어간다.
Lesage
르사주 공방에 도착하자 벽면을 빼곡히 채운 아카이브에 압도됐다. 1924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 보존해온 7만5,000개의 방대한 샘플은 르사주의 독창적인 유산이자 꾸뛰르 하우스의 영감이 된다. 당대 수많은 하우스와 작업을 하며 명성을 얻은 르사주는 1983년 칼 라거펠트가 샤넬에 입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샤넬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샤넬을 상징하는 트위드 소재 역시 르사주를 통해 제작했다. 2002년 샤넬 공방에 합류했으며 현재는 자수와 트위드 외에 다방면으로 중요한 파트를 맡고 있다. 하지만 샤넬은 다른 공방과 마찬가지로 르사주의 개성과 독립성을 인정해 르사주가 다른 꾸뛰르 하우스와 협업하는 것을 허용한다. 르사주 공방의 작업은 크게 비즈와 시퀸을 패브릭에 직접 수를 놓는 작업과 페인팅 작업으로 도안을 그리고 자수를 위해 천에 표식을 남기는 과정으로 나뉜다. 점심 무렵이라 아틀리에는 한산했지만 몇몇 자수 장인은 영민한 손길로 비즈와 시퀸을 바늘에 꿰고 자수를 놓으며 묵묵히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공방 컬렉션의 팬츠 원단에 구슬과 모조 보석을 꿰는 장인에게 경력을 물으니 40년쯤 이 일을 했고 르사주에서만 14년을 보냈다고 답했다. 닳고 닳은 도구함과 손끝이 그의 시간을 대변하는 듯했다. 아트 디렉터 위베르는 이 모든 과정은 버지니 비아르와의 대화로 시작됐다고 이야기했다. 이번 컬렉션은 ‘그랑 르사주’를 표현하자고 버지니가 말했고, 위베르는 1980년대부터 2000년까지 프랑수아 르사주(François Lesage)가 그랬던 것처럼 원단과 재료를 상상하고는 휘황하고 반짝이는 것으로 컬렉션을 완성했다. 창작 과정이 지닌 의미와 스토리텔링을 중시하는 위베르와 르사주 공방의 세계관은 완성된 자수 못지않게 아름답게 지속된다.
Goossens
주얼리와 금속 세공을 담당하는 구센의 공방으로 향하니 한 무리의 관람객이 공방을 채우고 있었다. 구센의 제너럴 디렉터는 대중을 위해 공방의 문을 열어두는 날이라 했다. Le19M의 건물 왼쪽에는 모두에게 개방된 갤러리가 따로 있지만, 각각의 공방 역시 곧 대중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1950년부터 문을 열었다가 2005년에 샤넬 공방에 합류한 구센은 주얼리와 오브제 컬렉션으로 운영된다. 세공 기계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장인의 손끝에는 브로치 크기의 샤넬 CC 로고 장식과 사자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트위드 소재처럼 보이도록 로고 표면에 격자무늬를 세공하는 중이었다. 여기에 붙은 작은 사자는 과거의 조각을 3D로 복원해 사이즈를 줄인 것이라고 말했다. 구센의 장인들은 디자인 초안을 토대로 직접 주석을 조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영감이 되는 과거의 조각에 새로운 터치를 더하거나 다른 모티브와 결합해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샤넬 컬렉션을 구성해나간다. 구센은 가브리엘 샤넬의 캉봉가 아파트에 놓인 가구와 유리구슬 옆의 사자 장식을 만들기도 했는데, 오늘날 오브제 공방에서는 샤넬 부티크의 인테리어 장식을 담당한다. 간혹 샤넬 고객으로부터 캉봉 매장의 구센 테이블이나 샹들리에 제작 문의가 들어오기도 한다.
Massaro
오래된 가죽 냄새가 코끝을 찔러 단번에 마사로 슈즈 공방임을 알 수 있었다. 가죽을 길들일 때 힘이 필요해서인지 유독 남성 작업자의 비율이 높은 공방이지만 사실 마사로는 여성용 수제화를 제작하는 유일한 맞춤 공방이다. 최근엔 구두를 맞춤 제작하는 이가 예전보다 줄었지만 단골 고객은 여전히 마사로를 찾는다. 고객을 위해 맞춤 구두를 만들어내는 곳답게 라스트를 만들고 그 틀을 바탕으로 각 단계를 책임지는 장인들이 있다. 복도 끝에 층층이 보관된 나무를 깎아 만든 라스트에는 고객의 이름과 연도가 적혀 있다. 1894년부터 시작된 그들의 역사이자 고객이 마사로에 남긴 선물인 셈이다. 마사로와 샤넬의 인연은 이번 공방 컬렉션에서도 선보인, 그 유명한 투톤 슈즈를 통해 시작됐다. 1957년 투톤 슈즈는 얇은 힐로 제작했지만 가브리엘 샤넬의 제안으로 착용감이 더 편한 넓은 힐로 업그레이드됐다. 게다가 실용성을 위해 끈이 아닌 엘라스틱을 부착해 쉽게 신고 벗을 수 있게 만들었다. 요즘은 가죽보다는 얇은 섬유를 여러 겹으로 쌓아 올려 세밀하게 작업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작업에도 마사로 장인의 기술력과 전문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Montex-Lemarié-Lognon
Le19M에는 1939년에 설립된 또 다른 자수 공방도 있다. 신문에 자수를 놓거나, 3D 볼륨 효과를 위해 바게트 비즈로 만든 스파이럴 등 독특하고 현대적인 샘플을 만들어내는 몽텍스다. 샤넬 컬렉션에 등장하는 모던하고 혁신적인 모티브는 모두 니들 워크와 뤼네빌 크로셰 후크,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코넬리 기계를 통해 완성된다. 2021/2022 공방 컬렉션의 실버 시퀸 장식과 기하학적 패턴의 시퀸 스커트가 몽텍스의 DNA를 보여준다. 샤넬의 상징 까멜리아의 꽃잎 하나하나를 수작업으로 완성하기로 유명한 공방 르마리에도 이곳에 합류했다. 1880년에 깃털과 꽃 장식 공방으로 시작한 르마리에는 더없이 섬세하고 우아하게 샤넬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온갖 종류의 깃털을 세척해 다양한 색으로 물들이는 한편, 매년 4만 개에 이르는 플라워 장식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마주한 공방은 섬유와 가죽을 마치 종이접기 하듯 반듯하고 견고한 플리츠로 만들어내는 로뇽. 나이프, 플랫, 선레이, 와토, 피콕 플리츠 등 3,000여 개 모티브로 150년이 넘는 동안 독자적인 플리츠 모듈을 완성했다. 여느 공방과 달리 2인 1조로 정교하게 작업해야 하기에 장인 두 명이 호흡을 맞춰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로뇽의 장인들은 늘 새로운 도전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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