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우정의 무게
인터넷 친구는 실시간 동네 친구, 늦은 밤 심리 상담사, 무조건적 지지자를 포괄한다. 우정에 대한 갈망만큼 그 무게는 동일하다.
지난 2월 웹툰 <남남>의 정영롱 작가와 인터뷰를 하며 ‘작품 소재를 주로 어디서 찾나요?’ 질문했을 때 작가는 “인터넷 친구들이 많아서 이들과 대화 중 재미있는 소재가 나왔을 때 각색해서 써도 되냐고 물어보고 써요”라는 답을 들려줬다. 어릴 적 친구, 회사에서 친해진 친구와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말투였다. 실제로 작가에겐 그림 커뮤니티, 온라인 게임,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서 만난 인터넷 친구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우정이냐 물었더니 “물론이죠, 오래된 친구도 진짜 많거든요”라고 덧붙였다. “연재할 때 늘 집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가족 말곤 만날 사람도 없는데 인터넷 친구들은 늘 같은 자리에 있어주잖아요. 매일 밤 10시에 모여서 게임을 하는데, 같이 수다 떨고 고민 얘기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정말 많이 풀려요. 연재 후기에도 썼어요. 매일 같이 놀아준 디스코드 게임 친구들 고맙다고.”
온라인에서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 최근에 일어난 현상은 아니지만, 예전보다 더 온라인을 한계로 두지 않고 친밀함을 쌓는 관계가 늘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니까 과거 익명성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했지만(2003년 온라인 동호회의 폐해를 다룬 <한겨레신문> 기사 제목은 ‘온라인 친구에겐 우정을 묻지마’다),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로 거듭난 우리는 온라인의 특징을 필요에 따라 주체적으로 활용한달까. 과거 PC통신, 인터넷 카페 동호회와 마찬가지로 공동 관심사를 찾아 들어가 연결되는 관계라는 점은 변함이 없지만, 매체의 특성에 따른 소통 방식에 맞춰 보다 세부적인 욕구를 만족시킨다. 트위터에서는 #트친소로 만나 추후에는 마음 맞는 몇몇이 따로 모여 일명 ‘가두리 양식장’ 계정으로 마음 속 진득한 얘기를 나누고, 페북이나 인스타로 각자의 관심사에 호감을 표하다가 단톡방으로 옮겨 관심 주제에 대해 실시간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말이다. 그 가운데 기술의 발달은 취향으로 모인 불특정 다수 가운데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만날 확률을 높여준다. 예를 들어 게임을 하며 음성 채팅을 하는 경우 목소리, 말투 등에서 철학과 사상이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 그렇게 몇몇 필터를 거치다 보면 결이 맞는, 운명의 온라인 친구들을 만난다.
온라인 친구가 주는 가장 큰 기쁨에 대해 물었을 때 정영롱 작가는 “부르면 바로 응답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게임 서버에 접속하면 로그인한 친구는 초록색으로 뜨는데 그 불빛을 보면 그렇게 반갑고 안심이 된다는 것. 또 다른 후배 역시 온라인 친구를 “연락하면 바로 나오는 동네 친구”로 비유했다. 어찌 보면 나이 들수록 전화하면 슬리퍼 끌고 아무 때나 나오는 동네 친구가 유니콘 같은 존재가 되고 있는데, 이 환상이자 갈망을 온라인 친구가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취직, 결혼 등으로 각자 상황이 달라지다 보면 소소한 일상을 나누지 못하는데, 온라인 친구와는 오히려 손쉽게 이어지다 보니 이런 일이 가능해진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건 온라인이 가진 여전히 클래식하고도 놀라운 기능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에디터를 시작하던 2000년대 중반만 해도 한 달에 열흘을 새벽 3시에 퇴근하는 우리와 라이프스타일이 맞는 직종은 3교대 간호사밖에 없다고 한탄했다. 연애하기 힘들고 친구가 줄어든다며 에디터끼리 몰려 다녔지만 지금은 온라인 공간에서 정서적 교감을 할 수 있는 상대를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온라인 세상 속 누군가는 잠들지 않고 반드시 깨어 있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나희도와 백이진의 사랑을 맺어주지 않아 시청자들의 공분을 샀지만 나희도와 고유림의 우정을 영원으로 맺으며 ‘사랑과 달리 우정은 지속적이다’라는 명제에 설득력을 보탰다. 드라마에 과몰입해 울고 웃으며 가장 부러웠던 건 나희도와 고유림이 ‘라이더37’과 ‘인절미’인 채 매일 밤 파란 모니터에서 나누는 솔직한 대화였다. 둘은 하루를 끝내고 넉넉한 면티에 고무줄 바지를 입고 컴퓨터 앞에 앉아 좋았던 일, 설렜던 일, 힘들었던 일, 속상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현실에선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위로를 듣고, 풀리지 않는 고민에 결정적인 용기를 낼 수 있는 힘을 받았다. 그저 가만히 귀를 기울여주는 상대 앞에서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다가 스스로 해답을 찾고 앞으로 나아갔다. 서로가 누구인지 알게 된 후, 혼란을 겪지만 잠시뿐이었다. 완전히 솔직했던 시절을 통과한 이들의 우정은 더욱 단단해졌다.
인절미와 라이더37의 관계처럼 서로의 정보를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는 대체로 좀 더 솔직해진다. 온라인이 태생적으로 가진 이 지점이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관계로 이끌 때가 있다. 한 후배는 언젠가 온라인 친구를 붙잡고 평소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부모님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는 얘길 들려줬다. 부모님과 말다툼했던 날, 숨이 막히는데 마지막 자존심에 누구에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트위터에 그 마음을 남겼고 평소 같은 아이돌 팬이었던 트위터 친구가 위로를 건넸다. 그리고 둘은 밤새도록 가족이라는 굴레에 관한 고민을 나눴다. 후배는 현실 세계의 인맥과 겹치지 않고 앞으로 만날 일이 없다 생각하니 정말 속내를 다 털어놓을 수 있었다며 지금도 그날의 선의가 고맙다고 했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거나 단행본을 출간해 어느 정도 상황이 알려진 경우, 구원을 바라는 손길은 더 자주 찾아온다. 한 작가는 인스타그램에서 댓글을 주고받는 온라인 지인이 새벽에 DM을 보내서 고민 상담을 해준 경험을 들려줬다. “가족이나 ‘실친’에게 말할 수 없는 정신적 응급 상황에 인터넷 친구는 뜻밖의 위로가 된다”고 했다. 제한된 정보는 상대를 판단하지 않게 하고, 활자로 하는 소통은 문제 사안에만 집중하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온라인 친구는 이 시대에 심리 상담가 역할을 하는 셈이다. 또 다른 편집 디자이너는 출산과 육아로 힘들던 시절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비슷한 처지의 워킹 맘과 소통을 시작했다. 팬데믹을 거치며 비대면 페미니즘 독서 모임으로 발전했고 이제 자신에겐 온라인 친구가 동창이나 직장 동료 역할을 한다고 했다. 경험을 나누고 떠오르는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상대는 인생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온라인은 그런 존재와 최대한 근접하게 이어준다.
나이를 먹고 삶이 선명하게 보일수록 느끼는 건 내 삶의 방식을 긍정해줄 존재의 필요다. 어릴 때는 우정의 정확한 의미도 모른 채 숨 쉬듯 우정을 나눴지만 더 이상 우리는 하루 종일 든 감정 전부를 나눌 수 없다. 일상에서 불쑥불쑥 외로움을 느끼는 건 체화된 과거의 감각을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조영주의 단편소설 <절친대행>에는 시간당 돈을 내고 절친을 만나는 서비스가 등장한다. 혼자 있길 힘들어하는 주인공 재연은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만난 절친이 등산복을 입은 중년 여성이라 실망하지만 어떤 얘길 해도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쳐주며 추울까 봐 담요를 건네고 목마를까 봐 국화차를 따라주는 그녀에게 서서히 빠진다. 이토록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우정을 소중히 여겨주는 존재라니. 물론 돈을 낸 시간 동안뿐일지라도 말이다. 결국 주인공은 그 따뜻한 우정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해 모아놓은 재산을 모두 절친대행 서비스에 탕진하고 대출까지 받으며 소설은 극으로 치닫는다. 이 가운데 이해 못할 재연의 감정이 있을까.
얼마 전 나는 성수동에 있는 복합 문화 공간 LCDC를 방문했다가 편지 가게 ‘글월’을 발견했다. 그곳에서는 편지를 한 통 쓰면 다른 사람이 쓴 편지를 한 통 가져갈 수 있는 펜팔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문득 지금 느끼는 불안에 대해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들어 책상에 똑바로 앉아 그 마음을 써 내려갔고 모르는 이의 편지를 한 통 들고 나왔다. 귀여운 그림이 그려진 편지에는 봄을 찬양하는 예쁜 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잘될 거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왠지 내 고민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고 그냥 오늘을 더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온라인상에서 우리가 쌓는 우정은 내가 글월에서 편지를 쓰고 받은 것과 형태만 다를 뿐 또 같은 마음이었다. 서로에게 귀 기울이고 서로를 지지하며 보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이끌어주는 존재의 필요. 앞서 언급한 2003년 기사에는 온라인에선 다중 인격이 가능하니 오프라인 모임을 가질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킥킥거리며 농담을 던지고, 누군가와 험담을 하고, 사회 현상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고, 미래를 함께 개척해나갈 존재가 필요하다. 친구와 연결되고자 하는 그 마음에 ON과 OFF의 무게 차이는 없고, 누군가로 따뜻해진 그 마음이 우리 삶을 계속 지탱해줄 것이다. (VK)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SAM HISC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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