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빈이라는 바람
우리 곁에 조금씩 스며든 배우 신현빈. 이번엔 초자연 스릴러 <괴이>로 너울을 기대한다.
발이 새카맣게 탄 이유가 드라마 <괴이> 촬영 때문이라 들었어요.
지난해에 촬영했는데 색이 돌아오는 데 꽤 걸리네요. 인터뷰가 발 얘기로 시작되겠어요(웃음).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 차기작이 초자연 스릴러 <괴이>입니다. 연상호 감독이 공동 집필한 작품으로 <방법> <방법: 재차의>와 세계관이 연결되죠. 해보지 않은 스타일에 더 끌리는 편인가요?
그런 편이에요. 본래 장르물을 무척 즐기는 편은 아닌데, 이 작품은 장르물에 익숙하지 않은 이도 받아들일 만한 지점이 있죠. 저주받은 불상이 초자연 현상을 촉발한다는 특수성과 인물 간의 관계와 갈등이라는 드라마적 요소가 결합해 더 흥미롭죠. 극 중 아이를 잃은 젊은 부부(구교환, 신현빈)는 괴로워하다 별거를 해요. 마음이 떠난 것은 아니지만 서로 마주 보기는 힘들 수밖에요. 현실적인 드라마에서 다뤄지는 얘기인데 불상의 저주라는 상황을 헤쳐가면서 새롭게 발생하는 지점들이 있죠. 음… 촬영이 끝나고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이 작품은 한마디로 ‘마음으로 시작해서 마음으로 끝나는 이야기’예요.
<너를 닮은 사람>이 인물의 심리 상태를 중심으로 흐른다면, <괴이>는 사건에 집중된 작품으로 여겼는데 아니군요.
어느 사건이든 사람이 겪는 것이고, 그 안에서 감정이 생기며 변화해가죠. 캐릭터를 만들어갈 때도 그 점을 염두에 둬요.
<너를 닮은 사람>에서는 피폐한 심정이 외모에서도 드러나도록 신경 썼죠. 부러 푸석푸석하게 머리를 만지고, 메말라 보이는 화장을 하고요. “정수리부터 물을 주고 싶다”란 댓글을 보고 기뻤다죠. <괴이>에서는 외적으로 어떤 장치를 썼나요?
배우가 캐릭터를 전달할 때 가장 먼저 다가가는 부분이 겉모습이잖아요. 캐릭터와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로 어떻게 시청자를 설득할 수 있겠어요? 해당 캐릭터의 헤어와 의상뿐 아니라 움직임, 표정도 무척 중요하죠. <괴이>의 이수진은 특별한 장치를 쓰기보다는 거의 화장을 하지 않고 머리를 대충 묶거나 풀린 채로 두곤 해요. 몸짓과 말투도 확연히 티는 나지 않지만 어딘지 조금 이상해 보이도록 노력했어요. 수진이 아이를 떠나보내면서 자신도 잃었을 거 같았어요.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미묘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죠.
‘확연히 티 나지 않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연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그렇죠. 그 부분에 대해서도 감독님과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계시거든요.
장건재 감독은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로 굉장히 서정적이면서도 담백한 연출을 선보였죠. 그래서 이번 드라마의 가장 놀라운 캐스팅은 장건재 감독이란 얘기도 있어요.
배우로서 시청자로서 기대되는 점이기도 하죠. 이런 장르를 하던 분이 아니라서 오히려 그 점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거 같았어요. 무엇보다 감독님은 굉장히 섬세하고 예민한 눈을 가졌어요. 클로즈업이 아니라 풀 샷에 가까운데도 내가 얼마큼 하고 있는지 알아챘죠.
본인도 섬세하고 오래 준비하는 배우라 그런 점이 통했겠네요.
저 역시 납득이 가지 않으면 못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이해해야 연기로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잖아요. 나조차 이게 말이 되냐는 의문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잖아요. 어떨 땐 아주 작은, 별거 아닌 부분이 걸리는데 어떻게든 해결하려 하죠.
작품을 준비할 때 개연성과 공감을 매우 중시하겠군요.
‘내가 아니라 그 캐릭터라면 그럴 수 있는가’라는 관점이죠. 나 개인의 판단은 별개예요.
상대 배우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죠. 구교환 배우와 호흡은 어땠나요?
모든 배우가 그렇지 않을까요?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 관계가 있나 싶어요. 교환 선배는 유쾌하고 긍정적이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죠. 극 중에서 까딱하면 죽는 상황이라 감정적으로 쉽지 않은 장면이 많은데 선배의 도움을 자주 받았어요. 촬영할 때 외에는 서로 장난치느라 바빠요.
오늘은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촬영 때문에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왔죠. 드디어 신현빈 배우가 부잣집 딸로 나오는구나 기대했는데, 아니더군요.
다들 저는 사연 있는 역할만 한대요. 팬들은 제가 이제 고생스럽고 괴로운 역할을 그만 맡았으면 하더라고요. 양가 부모님에게 무탈하게 사랑받고 정상적인 남자와 연애하고 결혼해서 아이도 남편도 본인도 죽지 않는 역할이요(웃음). 그런데 드라마든 영화든 사연 없는 캐릭터가 어디 있겠어요? 평탄한 삶을 살다가도 문제에 휘말리죠.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할 때는 이야기 자체에 본인이 위로를 받았다고 했는데, <괴이>는 심리적으로 어려웠을 거 같아요.
극에서 새로우면서도 끔찍한 설정이 있어요. 개인이 살면서 겪은 가장 큰 지옥의 순간이 반복해 떠오르는 거죠. 나는 언제인지 생각해봤는데, 도저히 이어가지 못하겠더군요. 자연스럽게 삶을 돌아보게 됐어요. 어떻게 살아왔고, 살아갈 것인지. 아마 보는 이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작품이 개인 신현빈에게 영향을 줬네요.
항상 그랬어요. 이번에 맡은 수진이란 역할도 내가 겪을 수 없는, 현실에서 발생하기 어려운 초자연적인 일이지만 나라면 어떨까 대입하면서 영향을 받았죠.
초자연 현상을 믿는 편인가요?
믿지도 믿지 않기도 않죠. 약간 운명론자예요.
어떤 일이든 그럴 만한 운명이 있다?
비슷하죠. 일도 사람 관계도 뜻대로 되지 않잖아요. 좋든 나쁘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배우라는 직업을 가졌기에 자리 잡은 태도일까요?
일의 영향도 있겠지만, 본래 그렇기도 한 것 같아요. 어느 날 유치원, 초등학교 때부터 만나온 친구들과 얘기하다가 “우리가 처음에 어떻게 만났지?”란 질문을 던졌어요. 일하며 만난 사람들은 계기가 기억나는데, 학교 친구들은 기억나지 않는 거예요. 친구들이 너 정말 모르냐며, 저는 한 번도 먼저 다가가서 “넌 이름이 뭐니, 어디 살아? 집에 놀러 가자, 밥 같이 먹자”라고 말을 걸지 않았대요. 누군가 다가와주면 그걸 잘 받아서 친구를 사귀었던 거죠. 다만 한번 생긴 관계는 노력을 하는 편이에요. 덕분에 오래 두고 보는 친구가 좀 있죠. 하지만 결국 그것들도 자연스럽게 이어가야지 제가 억지로 붙든다고 되지 않아요. 작품도 그래요. 하고 싶었는데 못한 작품은 연이 닿지 않았던 거고, 그 작품이 잘됐어도 크게 미련을 두지 않아요.
하지만 불가피하게 거절한 작품이 크게 성공하면 순간이나마 아쉬울 텐데요.
제가 출연하지 않아서 잘됐을 수 있죠. 만약에 내가 했다면, 이런 생각이 의미 있나 싶어요.
이전에 “후회를 잘 하지 않는다”는 말이 기억에 남아요.
작은 후회는 매 순간 하죠.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도 다른 메뉴 시킬걸, 음료 대신 커피 마실걸, 선크림을 발랐으면 좀 덜 탔을 텐데 같은. 큰 후회는 잘 하지 않아요. 그러기 시작하면 불행해지잖아요. 다음에 하면 되고, 지금 이 상황에 집중해야죠.
명상 철학의 기본도 ‘지금 여기’죠.
어릴 땐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고, 이미 끝난 장면을 왜 이렇게 연기했을까 후회도 많이 했어요. 부족하면 만회하면 되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훨씬 중요해요.
인생을 돌아보면 후회되는 순간이 없나요?
스무 살 무렵에 어른들이 그런 얘기 많이 하잖아요. “그 나이 때가 좋은 거다, 스무 살로 돌아가고 싶다.” 그 얘기를 스물셋이 스물에게 한다니까요(웃음). 뭐가 그렇게 후회되냐고 되물으면,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못 놀아서” “너무 놀기만 하고 공부는 소홀히 해서” “친구는 많았는데 연애를 덜 해봐서”라며 아쉬움을 토로하죠. 20대의 저는 미련이 안 남게 다 해버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무엇을 해봤나요?
공부도 열심히 해보고 술도 많이 먹고 여행도 다니고, 공연도 진짜 많이 봤어요. 20대 중반까지는 웬만한 음악 페스티벌, 영화제, 연극 등은 거의 다 봤을 거예요. 해당 포스터가 뜨기 전부터 외국 밴드나 가수 홈페이지의 투어 리스트에서 코리아 일정을 찾아냈어요. 다시 하라고 해도 그렇게는 못할 거 같아요. 무척 즐거웠어요. 아, 학교에서 밤샘 과제 하는 건 좀 힘들었죠. 어쨌든 저는 과거로 돌아가서 뭔가 굳이 바꾸고 싶은 욕심이 없어요.
이것이 내가 뭘 좋아하고 어떤 사람인지 확신하는 이유 중 하나인 거 같아요. 평소 “나답다”는 말을 많이 하더군요.
사실 나도 나를 잘 모르지만, 어쨌든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도 나겠죠. 본능적으로 어떤 행동이, 감정이 나답지 않다는 직감이 들어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기도 하지만 그런 상황이 되도록 적게 오길 바라죠. 거기서도 나답지 않다고 고집 피우면 모두를 괴롭히는 거잖아요. 예전에 한 선배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배우는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배우는 타인의 마음을 이해해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이 캐릭터가, 이 사람이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크기를 키워야죠. 당시에는 막연하게 ‘착해야 연기를 잘한다는 건가’ 싶었는데 갈수록 그 말의 의미를 알겠어요.
살면서 펼쳐지는 온갖 상황에도 좋은 사람이 되기란 쉽지 않죠.
저는 운이 있어서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있죠. 다만 언제나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잊지 않으려 해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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