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네덜란드 주얼리 디자이너가 도시를 떠난 이유

2022.05.05

by 손은영

  • STEFF YOTKA

네덜란드 주얼리 디자이너가 도시를 떠난 이유

네덜란드 주얼리 디자이너이자 조각가 비비 판 데르 펠던은 가족과 함께 포르투갈로 이사했다. 감정 소모가 크던 시기를 뒤로한 채 새로운 시작을 위해 낙점한 곳은 마법처럼 아름다운 도시 신트라와 가까운 한 자연보호구역. “꿈같은 생활을 하고 있어요. 나중으로 미루는 대신 ‘지금’을 살아가며 모든 걸 즐기고 싶어요.”

비비 판 데르 펠던(Bibi van der Velden)은 가족과 함께 자동차로 떠나는 스페인과 프랑스 여행길에 전화를 받는다. 어린 자녀들은 자동차 뒷좌석에서 다투기 마련이지만, 그녀의 아이들은 진정한 ‘로드 트리퍼’. 그녀는 아이들이 아주 행복해했다고 말한다.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 그녀는 계속 출근길에 올랐다. “저는 강박에 가깝게 일했어요. 행사, 전시, 태국의 스튜디오까지 이곳저곳을 끊임없이 다녔죠. 그런 제게 록다운은 오히려 좋은 시기를 제공했어요. 이제는 모든 걸 서둘던 그 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작은 한숨과 함께 41세의 나이를 고백한 비비는 그녀의 나이가 문제는 아니어도 확실히 눈을 뜨게 했다고 말한다. “마흔이 넘었다는 건 정말로 어른이 되었다는 거죠. 변명할 여지 없이요.” 하지만 그녀가 남들보다 더 빠르게 어른이 된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2017년 그녀는 넉 달 동안 그녀의 남편 토마스 더 하스(39), 딸 하를리(9), 아들 발타자르(6)와 함께 호주와 뉴질랜드로 캠핑카 여행을 떠났다. 맨몸으로 수영을 하고, 모닥불 옆에서 잠들고, 지붕 위에서 석양을 바라보고, 모래가 가득한 침낭에서 자기까지, 캠핑의 모든 것을 경험했다. 서핑과 야외 활동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현지 생활 방식에 푹 빠진 가족은 어느 날 바이런 베이에 도착했다. “저희는 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뱀과 독거미, 상어가 가득한 그곳 환경은 어린 두 아이에게 좋지 않았어요. 하를리는 다섯 살, 발티(발타자르)는 고작 두 살이었거든요. 그러고 나니 포르투갈이 눈에 띄었어요. 서핑과 ‘무(無)’를 모두 즐길 수 있는 곳, 모험이 손짓하는 신비로운 곳이요.”

포르투갈로 떠나기 위한 계획은 완벽했다. 하지만 암스테르담의 집으로 돌아온 지 두 달 뒤, 그들의 세상이 무너졌다. 하를리가 백혈병 진단을 받은 것이다. “그 후 2년 동안 두려움의 시간이 계속됐어요. 게다가 화학요법과 치료 때문에 하를리의 혈액에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박테리아까지 생겼어요. 몇 달 동안 병원에서 지내야 했고, 하를리는 몇 주 내내 끊임없이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었어요.” 하를리는 용감하게 치료 과정을 견뎌냈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비비는 말한다. “부작용에 부작용이 계속 이어졌어요. 심장 부정맥이 온 적도 있었고요. 마치 수도꼭지를 열어둔 채 걸레질하는 것만 같았죠. 위트레흐트의 훌륭한 종양 전문 의사가 하를리를 치료했지만, 그 억센 치료 과정에서 어린아이들은 계속 다칠 수밖에 없어요.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많은 피해를 입게 되죠. 하를리는 수많은 부작용과 좌절, 고통, 트라우마를 겪었어요.” 비비가 의붓아버지 얀 뷜프 판 알케마더와 함께 하를리 브레이브하트 재단(Stichting Charlie Braveheart)을 설립한 이유도 그래서다. 재단은 간단한 주사부터 입원 치료까지, 어린아이들이 스트레스와 트라우마 없이 병원을 다녀갈 수 있도록 돕는다.

하를리는 이제 건강해졌다. “하를리는 서핑을 아주 좋아하고, 기타를 연주하고 작곡을 하며, 건강하게 지내고 있어요. 하를리의 성격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포르투갈에서 맞은 새 학기 첫날, 아이들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과 거짓을 한 가지씩 말하고, 둘 중 어떤 게 진실인지 맞히는 게임을 했대요. 하를리는 ‘나는 피자를 싫어해. 그리고 나는 암 환자였어’라고 말했대요. 영리하죠. 바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공개하고 친구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거예요.” 그녀는 발티 또한 무척 창의적인 아이라고 말한다. “발티는 그림에 재능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뛰어난 관찰가였거든요. 아기일 때 제가 복잡하게 생긴 귀고리를 했는데, 귀고리를 잡아당겨 저를 아프게 하는 대신 그걸 세심하게 살펴보며 관찰하더라고요.”

비비는 힘든 시기를 부부가 서로 의지하며 잘 이겨냈다고 말한다. “긴 시간을 좌절하며 어렵게 보내다 보면 서로 멀어질 수도 있겠지만, 저희는 꽤 빠르게 균형을 찾았어요. 모든 일에 대비하기 위해 아주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한 게 그 이유 중 하나일 거예요. 의사 선생님과 대화하기 위해 저희는 370쪽 분량의 치료 계획서를 읽었고, 하를리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기 치료를 공부했고, 아로마 테라피와 뮤직 테라피도 직접 했어요. 왜 하필 우리 가족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나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이제는 달리 생각할 수 있어요. 아마도 ‘우리 가족’이니까 그랬을 거예요. 우리 가족은 아주 끈끈하고, 토마스와 저는 더없이 단단하니까요.” 눌러두었던 감정을 처리하는 건 그 뒤, 그러니까 지금이다. “엄마로서 오랜 시간을 아드레날린이 넘치는 상태로 지내왔어요. 가장 힘든 순간이 지나자 우리는 새로운 곳으로 이사했고, 아이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집중했죠. 감정이 들어설 자리조차 없던 시기를 겪은 뒤 지금의 저는 더 감정적인 사람이 되었어요.” 하를리의 병은 그녀의 가족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탁 트인 공간과 자연이 필요하던 우리는 언젠가 해외에서 살고 싶었어요. 항상 기회가 되면 바로 떠나자고 말했죠. 꿈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자고요.”

친구와 포르투갈에서 주말을 보내던 중, 비비는 꿈의 집과 마주했다. 특이한 형태와 커다란 창문이 돋보이는 미드 센추리 모던 양식의 주택을 본 그녀는 그 집에 첫눈에 푹 빠지고 말았다. 건축가 조제 포르자스(José Forjaz)가 지은 이 주택에는 원래 아이가 없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각각 법학 석사와 고고학자였던 부부의 집은 책으로 가득했고, 나중에는 결국 모잠비크에서 교육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한 재단에 집을 맡겼다. “이 집을 사기 위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어야 했어요. 화상 통화로 우리가 이 집을 얼마나 소중히 여길 건지 설명했죠. 그리고 배선과 파이프까지 들어내 대대적으로 공사를 했어요. 2019년 말 하를리의 치료가 끝났고, 8월에 이사했죠.”

비비의 집은 휴양도시 카스카이스 근교의 자연보호구역에 있다. 숲을 따라 난 흙길 끝자락의 맨 마지막 집이다. 주택은 철저히 나무로 둘러싸여 이웃집과도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문명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어요. 대신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는 바다가 보이죠.” 습한 기후는 마치 동남아시아의 보르네오섬과 같다. 근처에는 신비로운 달의 산 몬테 다 루아(Monte da Lua)가 있다. 종종 짙은 안개가 드리우는 이 산은 사람과 자연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곳이라고 전해진다. 차로 25분이면 리스본이나 아이들의 국제 학교가 있는 신트라까지 갈 수 있다. 한때 마돈나도 이곳에 살면서 승마 연습장을 이용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한 유명한 건축가가 비비의 좋은 이웃이자 친구가 되었다. “이곳에는 좋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어요. 거의 모두가 이전에는 정신없이 바쁜 도시의 삶을 살던 사람들이고, 거기서 벗어나 숨을 돌리기 위해 이곳을 선택한 거예요. 실제로 자연인과 가까운 서퍼도 많이 살아요. 네덜란드인보다 좀 더 신중하고, 많이 더 겸손한 포르투갈인 친구도 많이 생겼어요. 포르투갈어를 잘하냐고요? 아직 유창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엄마로서 오랜 시간 아드레날린이 넘치는 상태로 지내왔어요. 감정이 들어설 자리조차 없던 시기를 겪은 뒤 지금의 저는 더 감정적인 사람이 되었어요.” 드레스는 짐머만(Zimmerman at Mytheresa).

“어떻게 보면 우연히 주얼리를 접했고, 그 길을 쭉 걷게 됐어요.”

석재 책장은 비비가 집 근처 석재 공장에서 직접 만든 것이다.

“인테리어에는 미드 센추리 모던 스타일에 제가 수년간 수집한 다양한 골동품이 섞여 녹아들어 있어요.”

그들의 새 출발은 더 이상 꿈을 미루지 않고 당장 실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암스테르담 동쪽의 옛 학교 건물에서 살 때는 옥상정원에서 채소를 길렀어요. 여기 포르투갈에서는 제대로 된 커다란 정원과 비옥한 땅이 있어서 다양한 채소를 마음껏 기를 수 있어요. 멜론, 애호박, 옥수수, 콩, 비트, 허브, 부추, 토마토, 딸기 등 모든 채소가 다 잘 자라요. 딜만 빼고요. 지금 귤나무는 해충에 감염돼 계속 잎사귀를 다듬고 땅에 철분을 줘야 해요.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비비는 본인이 어릴 때부터 타온 1978년형 랜드로버를 몇 년간 계속 원해왔다. 꿈을 현실로 만든 지금, 그녀는 매일 그 차를 타고 다닌다. 커다란 래브라도종인 구조견 막스도 입양했다. 막스는 쇼독 품종보다 더 거칠고, 강하고, 활동적이다. 호주에서 서핑과 사랑에 빠진 후, 서핑은 그들의 일상이 된 지 벌써 2년째다. “저는 원래 아침형 인간이 아니었지만, 이곳에 오면 자연스럽게 아침형 인간이 돼요. 주변의 모든 것이 일찍 깨어나거든요.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 토마스와 저는 아침 서핑을 즐기러 나가요. 암스테르담에 살 때는 운동과 거리가 멀었지만, 지금은 일주일에 두 번 요가를 하고, 매일 수영을 하고, 등산을 하고, 산악자전거도 타요. 산악자전거는 정말 재미있어요. 남편과 전기 산악자전거를 타고 산 위에서 나무 사이와 좁은 길을 빠르게 가로질러요. 바위를 뛰어넘을 때도 있죠.”

비비와 토마스는 네덜란드의 여름 축제 팔티퍼스트(Valtifest)에서 만났다. 토마스는 얼룩말 코스튬을 입었고, 비비는 어깨 위에 새를 달았다. “토마스는 내 사랑이에요. 벌써 거의 13년 동안 함께해왔죠. 처음 만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살기 시작했고, 그 뒤로 항상 서로를 바라보며 살고 있어요. 어떤 점을 가장 좋아하냐고요? 그는 제가 세상을 더 경이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줘요. 그는 안정적이고, 누구와도 대화를 시작할 수 있고,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요. 저는 종종 빠르고 충동적으로 거기에 빠지곤 하죠.”

당연히 암스테르담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매달 한 주 동안 그녀는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 그녀의 스튜디오와 갤러리에서 시간을 보낸다. 토마스 역시 한 달 중 한 주 동안 부부의 고급 주얼리 플랫폼 비비 판 데르 펠던(Bibi van der Velden)과 아우베르튀러(Auverture)의 CEO로 일한다. “서로 다른 두 세계의 가장 좋은 부분만 누린다고 생각해요. 암스테르담에 새로운 유행을 일으키면서요.”

“록다운은 좋은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이제는 모든 걸 서둘던 그 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500kg에 달하는 이 분홍색 대리석 탁자를 집 안으로 옮기는 데 무려 열 명의 이사업체 직원들의 도움이 필요했어요. 바닥에 닿는 부분을 안쪽부터 깎아내 조금이라도 가볍게 만들었죠.” 하를리의 튜닉은 짐머만(Zimmerman at Mytheresa), 발티의 스웨터는 마이테레사(Mytheresa), 팬츠는 돈셰(Donsje).

포트투갈의 집에서는 그런 유행과 패션이 멀게만 느껴진다. “주로 아주 편한 복장인 셔츠와 배기 팬츠 또는 카프탄을 입어요. 이곳의 모두가 인생을 마음껏 즐기지만 아무도 과시하지 않아요. 이곳의 친구들이 제 주얼리를 착용하냐고요? 다행히도요. 하지만 모두가 보석의 가치를 알고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소유물은 이곳에서 대화 주제가 되지 못해요. 새 자동차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 것처럼요. 이곳 사람들은 주얼리를 아주 캐주얼하게, 예를 들어 찢어진 청바지와 매치해 착용해요. 저도 그걸 가장 좋아한답니다.”

이제 그 아름다운 주얼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비비가 일을 처음 시작하던 16년 전부터 그녀는 해외시장에 초점을 맞췄다. 그때까지만 해도 네덜란드 내의 럭셔리 주얼리 시장이 아직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그녀의 주얼리는 런던, 뉴욕, 도쿄 등에 있는 아방가르드한 쇼핑몰 도버 스트리트 마켓(Dover Street Market)을 포함해 전 세계 40개 매장에서 판매한다. 미국은 그녀에게 가장 큰 시장이다. 그녀는 매년 특별한 주문 제작 아이템 70여 개를 만드는데, 가수 리한나 또한 유명한 그녀의 팬 중 한 명이다. “아주 좋아요. 리한나는 할인에 신경 쓰지 않고 주얼리를 구매하는 데만 집중해요. 브랜드의 진정한 서포터라고 할 수 있죠. 건축가 자하 하디드도 한때 고객이었고, 카니예 웨스트의 공연을 위해 특별한 주얼리를 만든 적도 있고, 캐리스 밴 허슨은 최근에 저희 브랜드의 앰배서더가 되었어요. 주문 제작 아이템은 아주 개인적이에요. 한번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돌로 약혼반지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도 있어요.”

그녀는 종종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그 예로 그녀는 이집트에서 신성하다고 믿는 딱정벌레의 밝은 녹색 날개를 마흔 개나 실제로 사용해 귀고리(Scarab Pop Art Bunch Earrings)를 만들었다. “이 딱정벌레는 태국에서는 진미로 여겨요. 버려질 운명이었던 날개를 농장에서 직접 구매했어요. 예전에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서 이 날개로 이루어진 200년도 더 된 드레스를 본 적이 있어요. 비누로 과하게 세척하지 않으면 색상이 잘 유지돼요.” 그녀는 화석화된 6만 년 전 시베리아산 매머드 상아도 재료로 사용한 적 있다. “참고로 합법적인 재료예요. 지구 온난화로 얼어붙은 땅이 녹으며 꽤 많은 양의 상아가 밖으로 드러나고 있거든요.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썩어서 없어지는 것들이에요.”

비비는 항상 작업에 이야기, 놀라움, 재미나 상징을 담아내고자 한다. 악어가 귓불을 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매머드 앨리게이터 바이트 귀고리(Mammoth Alligator Bite Earrings)나 회전하는 인어 꼬리가 달린 18캐럿 로즈 골드 반지처럼 말이다. 그는 작품에 움직임 등의 기술을 접목하는 도전을 좋아한다. 그녀의 뿔 딱정벌레 반지의 주둥이를 누르면 날개가 앞뒤로 움직이고, 등의 숨겨진 버튼을 누르면 속날개가 열리며 숨겨진 수정 몸통과 그를 장식하는 세 개의 작은 황금 머리 모양이 나타난다. “착용자에게 작은 비밀을 선물하는 게 재미있어요. 제 결혼반지에도 핑크 사파이어와 블루 사파이어가 감춰져 있는데, 하를리와 발티를 상징하죠.”

사실 비비가 처음으로 빠진 건 다름 아닌 조각이었다. “어떻게 보면 우연히 주얼리를 접했고, 그 길을 쭉 걷게 됐어요. 요즘은 그 두 가지 사이의 조화를 찾고 있어요.” 어릴 적 그녀는 조각가인 어머니 미헬러 데이터르스(Michèle Deiters)의 스튜디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여덟 살의 어린 나이부터 대리석 광택 작업을 도왔고, 금이 간 빈 타조알을 이용해 청동을 주조하는 등 작은 작품도 만들 수 있었다. 그녀와 어머니는 이제 각자 다른 작업을 하면서도, 조각가 듀오 비비 미헬러(Bibi Michèle)로 활동하기도 한다. 그들의 작업은 주로 추상화된 현실을 반영한 신체의 모습을 다룬다. 거울과 같은 표면은 주변 환경과 빛, 감상자를 비추며 정서적 경험을 이끌어낸다. “저희의 첫 작품은 프랑스의 한 수집가를 위해 만든 커다란 가슴 형상이었어요. 모든 프로이트 이론을 적용할 수 있겠죠.” 이 가슴(모양의 작품)은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에 위치한 테일로 피고트 갤러리(Tayloe Piggott Gallery)에서 2021년 전시했다. 전시를 위해 이 듀오는 그 외에도 벽에서 튀어나온 흰 석고 가슴으로 이루어진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비비와 어머니가 함께 작업할 때는 위계질서도, 어머니와 딸 사이의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과 관련된 모든 일을 잠시 멈추는 것이다.

비비와의 통화는 3주 뒤 다시 이어졌다. 그녀의 가족은 이제 자동차 여행에서 막 돌아왔지만, 바로 그다음 여행을 계획 중이다. 비비는 이미 암스테르담의 호텔 드 유럽(Hotel De L’Europe)에서 열릴 파자마 겸 기모노 파티에 가기 직전이다. 그녀가 직접 고안한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스위트룸이다. 그 뒤에는 스위스 크슈타트로 넘어가 세 개의 행사에 참여할 예정이다. 모르던 사이에 빠른 템포의 삶이 돌아온 듯하다. “코로나19 전처럼 숨 돌릴 틈도 없어지지는 않도록 경계하고 있어요. 짧은 기간에 아주 바쁘게 지내는 건 좋고, 그 뒤엔 다시 포르투갈로 가는 거예요.”

네덜란드로 다시 이사할 계획은 없을까? “가까운 미래에는 확실히 없어요. 시간 제약 없이 이곳에 머물고 있거든요. 하지만 이곳처럼 자연적인 곳에서 암스테르담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서 일을 처리하는 건 정말 골치 아파요. 무슨 일이냐고요? 정말 모든 일이요! 관공서와 의사소통은 물론이고, 유럽연합 밖에서 오는 소포를 받는 기본적인 것까지요. 엄청난 세금을 내기 전까진 절대 받을 수 없어요. 하지만 이곳에서 우린 바다로 시원하게 다이빙을 하고, 정원에서 직접 기른 채소로 포케 샐러드를 만들고, 저녁에는 보드게임을 하죠(아이들이 용돈으로 포커 게임을 할 수 있도록 이제 막 가르쳤어요). 그리고 수천 마리의 귀뚜라미가 노래하는 걸 들으며 모든 걸 잊고 편안하게 잠든답니다.” (VK)

“이 집을 사기 위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어야 했어요. 화상 통화로 우리가 이 집을 얼마나 소중히 여길 건지 설명했죠.”

에디터
손은영
STEFF YOTKA
사진
HANS VAN BRAK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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