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샤넬 Le19M 투어 4: 바늘처럼 영민하게 움직이는 자수 공방 ‘르사주(Lesage)’

2023.02.26

by 가남희

    샤넬 Le19M 투어 4: 바늘처럼 영민하게 움직이는 자수 공방 ‘르사주(Lesage)’

    할머니의 자개장 속에는 반짇고리와 둘둘 말린 천, 굵은 뜨개실과 가장 좋아하는 작은 보석함이 있었다. 장신구가 든 진짜 보석함이 아니라 비즈와 시퀸, 어디선가 떨어진 단추를 모아둔 상자였는데, 르사주(Lesage) 아틀리에에 들어가는 순간 할머니의 보석함을 열 때처럼 몹시 흥분됐다. 사실 이곳은 그보다 더 화려하고 달콤했다.

    수 세대에 걸쳐온 르사주는 오뜨 꾸뛰르의 출발점과 함께 성장해 프랑스 패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다. 1924년 르사주 가문은 자수 공방 미쇼네(Michonet)를 인수했다. 미쇼네는 300명에 이르는 자수 장인을 거느리며 꾸뛰리에 마들렌 비오네 같은 거장과 일하기로 유명했는데 비오네의 자수를 총괄 담당하던 이가 바로 마리 루이즈 르사주였다. 이후 1958년 아들 프랑수아 르사주가 할리우드 영화계 의상 일을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메종 르사주는 다양한 모티브와 기술력으로 디자이너들 사이에 이름을 알린다.

    공방 투어는 비오네, 디올, 지방시, 이브 생 로랑 등 이름만 들어도 흥분되는 하우스의 이름을 단 7만5,000개의 샘플이 보관된 아카이브에서 시작했다. 르사주의 역사이자 각각의 이야기를 담은 샘플은 검은 상자에 담겨 견고하게 벽면을 지탱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랍 가운데 줄지어 자리 잡은 샤넬 컬렉션을 보고 있으니 르사주의 아트 디렉터 위베르 바레르(Hubert Barrère)가 들어왔다. “Le19M에 들어오는 햇빛이 아주 좋죠. 르사주는 원래 19세기에 지어진 건물에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21세기에 걸맞은 이런 현대식 건물에 들어오니 우리까지 젊어지는 것 같아 기뻐요. 빛은 모두에게 중요하지만 특히 우리처럼 매일 갖가지 색상을 바라보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건물은 선물과도 같아요. 쇼펜하우어가 ‘색은 빛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했잖아요.”

    자수 샘플이 넓게 펼쳐진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겨 샤넬의 2021/2022 공방 컬렉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1983년 칼 라거펠트가 샤넬에 오면서 르사주와 인연이 시작됐죠. 샤넬 컬렉션은 늘 자연스럽게 진행되는데 칼 라거펠트 시절에도 버지니랑 작업을 많이 했어요. 그녀와 하는 작업 방식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늘 대화를 통해 아이디어를 서로 주고받아요. 입는 사람은 못 느끼더라도 창작 과정에 의미를 두는 것과 스토리텔링은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협업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버지니의 의견과 결정에 따라 르사주가 충실히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번 컬렉션에서 버지니가 ‘그랑 르사주’를 표현해보자고 하자 위베르는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르사주의 수장이었던 프랑수아 르사주가 그랬던 것처럼 원단과 재료를 상상했다. Le19M 건물의 하얀 기둥과 스며드는 햇살에 영감을 받아 재현한 자수는 가는 금사를 엮어 띠로 만든 것으로 코트의 포켓이 되고 베스트가 되어 컬렉션에 올랐다. 또 Le19M이 자리한 오베르빌리에 지역을 상징하는 그래피티 아트는 샤넬의 더블 C 로고와 하트 모티브에 진주 장식을 더해 창의적인 자수 패턴으로 완성됐다.

    2021/2022 Chanel Métiers d'Art

    2021/2022 Chanel Métiers d'Art

    2021/2022 Chanel Métiers d'Art

    2021/2022 Chanel Métiers d'Art

    2021/2022 Chanel Métiers d'Art

    점심 무렵의 공방은 한산했다. 고요한 가운데 몇몇 장인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바늘이 비즈와 시퀸, 원단을 넘나들며 영민하게 움직이면 서서히 화려한 자태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공방 컬렉션의 팬츠 원단에 구슬과 모조 보석을 꿰는 장인의 경력은 무려 40년, 르사주에서만 14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바늘에 찔리고 원단에 부딪히며 무뎌진 손끝과 닳고 닳은 도구함이 그의 긴 시간을 대변했다. 도안을 만드는 아틀리에에서는 밑그림을 위해 구멍을 뚫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복도 끝 공방에서는 르사주에 갓 들어왔을 법한 젊은 장인이 베틀 앞에 앉아 패턴 표에 맞춰 트위드 샘플 작업을 서둘렀다. 르사주는 자수 외에도 1998년 샤넬의 상징적인 트위드를 제작하기 시작해, 협력 공방으로 합류한 2002년부터 현재까지 꾸뛰르와 공방 컬렉션을 위한 새로운 소재의 트위드 제작에 심혈을 기울인다.

    르사주의 가능성은 미래지향적인 것보다 현실을 반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면 1950년에는 존재하지 않은 패턴을 1950년대 자수 기술로 만든다거나, 신기술을 이용해 과거의 패턴을 새롭게 만들어 동시대에 맞춰가는 것이다. 3D 프린터는 자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자수 작업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한다. 자수는 도안을 만들고 바느질하는 것뿐 아니라 아름다운 볼륨과 3차원적 빛 반사 등 시각을 통해 완성도를 높일 만한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위베르가 이끄는 르사주는 ‘컨템퍼러리’에 중점을 둔다. ‘현대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편안한 착용감과 아름다운 비주얼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웨어러블하면서 동시대적인 스타일을 이끌어내는 버지니 비아르와 샤넬을 조력하는 곳답다.

    르사주는 이런 독보적이고 풍부한 유산을 이어가기 위해 1992년 자수 학교를 열고, 젊은 층의 인턴을 선발한다. 자수에 열정이 넘치는 학생들이 전 세계에서 지원하는데, 대부분 다른 직업을 접고 참여할 만큼 열정적이다. 도안 파트에는 패션 디자이너나 섬유 엔지니어가 지원하기도 하고, 주얼리 전공자가 자수 파트에 함께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수 기술이나 패션에 전혀 경험이 없지만 자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면 르사주는 그들이 다른 분야에서 다듬은 창의성을 보고 고용하곤 한다. 창의력과 기술력의 밸런스를 맞추다 보면 가장 창조적이고 완성도 높은 작업물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감각과 관대함, 열정적인 에너지로 가득한 르사주 공방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빛처럼 퍼져나간다.

      에디터
      가남희
      이혜원(프리랜스 에디터)
      사진
      김형식, COURTESY OF CHANEL(2021/2022 샤넬 공방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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