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친절한 도슨트]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객관적 사진 속 무엇

2022.05.06

by 정윤원

    [친절한 도슨트]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객관적 사진 속 무엇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사진 속엔 서사도, 감정도 없다. 그래서 더욱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현대미술 기획전 ‘Andreas Gursky’ 전시 전경

    독일의 사진작가 안드레아스 거스키(Andreas Gursky)의 사진 작업 앞에서는 시간이 평소와는 다른 개념으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사진을 읽는다’는 표현이 매우 적절할 텐데, 그러다 보니 다른 작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머물렀다는 걸 전시장을 나온 후에야 깨닫는 식입니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물리적으로 큰 그의 작업에는 인류와 문명에 대한 깊은 통찰이 빼곡히 담겨 있습니다. 특히 공장이나 아파트, 선물거래소나 물류 센터 같은 공간에 들어찬 사람과 사물의 존재는 그 자체로 개별적인 서사가 됩니다. 즉 내러티브라고는 보이지 않는 그의 사진 앞에 선 나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서사가 생겨나고, 그 서사를 구성하는 숱한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 자리하게 되죠. 거대한 사회에서 익명으로 살아가지만, 저마다의 세상에서만큼은 주인공일 각각의 존재에 대해 숙고하는 것만큼 보는 이를 겸손하게 만드는 장치는 아마 없을 겁니다.

    ‘시카고 선물거래소 III(Chicago Board of Trade III)’, 2009, ⓒ안드레아스 거스키, 스푸르스 마거스 제공

    ‘아마존(Amazon)’, 2016, ⓒ안드레아스 거스키, 스푸르스 마거스 제공

    그런 이유로 오는 8월 14일까지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개인전 <Andreas Gursky>은 이렇듯 작가가 포착한 현 세계의 면면들, 그리고 그 세계를 구성하는 숱한 이름 모를 존재들에 대한 헌사처럼 느껴집니다. ‘시카고 선물거래소 III(Chicago Board of Trade III)’나 ‘아마존(Amazon)’ 같은 작품은 분명 소비 지상주의와 자본주의의 결정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콜로세움이나 만리장성 등에 버금가는 압도적이고도 숭고한 풍경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이 서 있기만 했다면 문제가 달랐겠지요. 거스키의 작품 속에 군집한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거나, 하고 있다는 걸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 분주한 움직임이 항상 인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고 확신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분명한 건 그것이 바로 솔직히 인정해야 하는 우리의 현 상태라는 사실입니다.

    ‘평양(VI Pyongyang VI)’, 2017(2007),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크루즈(Kreuzfahrt)’, 2020, ⓒ안드레아스 거스키, 스푸르스 마거스 제공

    ‘얼음 위를 걷는 사람(Eislaufer)’, 2021, ⓒ안드레아스 거스키, 스푸르스 마거스 제공

    안드레아스 거스키는 유형학적 사진을 창시한 베허 부부의 수제자입니다. 베른트 베허와 힐라 베허는 1950년대부터 20세기 초 산업화 시대의 상징적인 건축물을 촬영해왔습니다. 이들은 가능한 한 대상을 가장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렇게 그들의 작업은 당대를 증언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을 받은 거스키 역시 작가의 주관적 의견만이 사진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통념을 깹니다. 예컨대 2007년 북한에서 규모가 가장 큰 행사인 아리랑 축제의 매스 게임 장면을 찍은 ‘평양 VI(Pyongyang VI)’에서는 공산주의 체제의 상징은 물론 가치판단의 단서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더욱이 조그맣게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 수백만 송이의 튤립, 빼곡하게 들어찬 상품, 여객선의 작은 창문, 얼음 위를 걷는 사람들 등은 모두 추상 회화를 차용한 사진 작업을 구성하는 기하학적 요소일 뿐이라는 의심까지 들 정도입니다.

    ‘라인강 III(Rhein III)’, 2018, ⓒ안드레아스 거스키, 스푸르스 마거스 제공

    ‘F1 피트 스톱(F1 Boxenstopp)’, 2007, ⓒ안드레아스 거스키, 스푸르스 마거스 제공

    ‘무제 XIX(Ohne Titel XIX)’, 2015, ⓒ안드레아스 거스키, 스푸르스 마거스 제공

    거스키의 작업은 서사를 배제함으로써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들고, 인간을 부각하지 않음으로써 시대상을 강조하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숨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각종 사진 기술적 실험을 지속해온 세계적인 거장의 가장 도전적인 실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정윤원(미술애호가)
      이미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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