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보석 디자이너만의 ‘바로크 펑크’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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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보석 디자이너만의 ‘바로크 펑크’ 기술

2022-05-07T20:04:28+00:00 2022.05.09|

덴마크 보석 디자이너 아르예 그리그스트의 개성 있는 디자인은 모더니즘 디자인의 전형적인 틀을 깬다. ‘바로크 펑크’ 세공 기술이라는 그의 유산은 가족을 통해 명맥을 이어간다.

빈티지 테이블과 체어는 토비아 스카르파(Tobia Scarpa). 와인 잔은 아르예 그리그스트×재너두 글라스 서비스(Arje Griegst×Xanadu Glass Service). 포슬린 식기는 아르예 그리그스트(Arje Griegst) ‘Worn on Paper’ 컬렉션. 커틀러리는 아르예 그리그스트.

귀고리와 목걸이, 진주 반지, 다이아몬드를 더한 반지, 금반지, 나선형 팔찌는 아르예 그리그스트(Arje Griegst).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은 사람이었어요. 그가 만드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죠.” 이레네 그리그스트(Irene Griegst)가 세상을 떠난 남편 아르예 그리그스트(Arje Griegst)에 대해 말했다. 그녀는 코펜하겐 중심가에 자리한 그리그스트가의 집에서 아들 노암 그리그스트(Noam Griegst)와 함께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뒤에는 아르예와 이레네의 작업실로 올라갈 수 있는 나무 계단이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 소리가 들려오는 좁은 통로를 따라 올라가자, 아르예가 작업할 때마다 늘 틀어두던 오페라의 웅장한 소리가 우리를 맞이했다. 문 안쪽에는 그림 몇 점이 벽에 기대 있었고, 작업 중인 조각품이 작업대에 놓여 있었다. 그곳에서는 진한 담배 향기가 느껴졌다. “그이는 작업할 때 늘 시가와 과일을 갖다 두고,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먹곤 했죠.” 이레네가 설명했다.

노암도 이야기했다. “저도 똑같이 기억해요. 늘 쉬지 않고 일하셨어요. 최소 10가지 서로 다른 일을 10가지 다른 테크닉을 사용하면서 주변에 있는 10가지 재료로 동시에 진행하셨죠.”

아르예 그리그스트의 호기심이 만들어낸 컬렉션은 강한 인상을 풍겼다. 섬세하게 조각해 금박을 입힌 아르예만의 독특하고 유기적인 형체가 말 그대로 현대 디자인의 표준을 보여주는 듯했다. 덴마크의 가장 걸출한 보석 디자이너 아르예 그리그스트는 2016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한평생 작업한 방대한 컬렉션을 정리한다는 것은 일종의 도전이자 그의 아들 노암이 짊어진 중요한 과제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역할을 맡은 노암은 그리그스트 가문은 유산을 지키면서 계속 나아갈 것을 다짐했다.

아르예 그리그스트는 은세공사 유스트 안데르센(Just Andersen)과 함께 훈련하며 1960년대 초부터 커리어를 시작했다. 게오르그 옌센(Georg Jensen)의 매니저 안데르스 호스트루프 페데르센(Anders Hostrup-Pedersen)에게 스케치 40장을 보여주자, 페데르센은 아르예에게 반지 디자인 20개를 의뢰했고 보석과 진주를 한 움큼 들려 파리로 보냈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반모더니즘적이던 그 반지는 아르예만의 섬세한 접근 방식과 실험 정신의 근원을 보여줬다. 몇 년 뒤 아르예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왁스 혼합 방식과 주물 기술을 개발했다. 그 방식은 오늘날까지 그의 아들 노암과 그리그스트에서 일하는 세공사들이 동일하게 활용한다.

“작업실에서 모델로 몇 시간, 며칠, 몇 주, 몇 달 동안 서 있었던 기억이 나요. 저희 모습을 바탕으로 도자기에 얼굴을 조각하기도 했죠.” 노암이 회상했다. 1972년 아르예가 도자기로 주얼리를 만드는 것에 도전하던 때를 이야기했다. 이듬해인 1973년 아내 이레네를 본떠 만든 ‘로센담(Rosendame, Rose lady)’을 포함해 10개 정도의 작품을 완성했다. 평화롭게 잠든 막내딸 리아의 얼굴을 벨트 버클에 담기도 했으며, 아들 노암을 위해서는 혀를 내밀고 있는 말썽쟁이 아이의 얼굴을 형상화한 ‘프레크 웅에(Fræk Unge, Cheeky Kid)’를 만들었다. 제멋대로 뻗친 머리의 자기 자신을 솔방울에 도금한 형태의 펜던트 ‘에게만덴 (Egemanden, Oak Man)’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아르예가 주얼리로 초상을 표현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1967년 기사를 통해 눈과 오팔로 만든 입으로 ‘녹아내리는 얼굴’을 형상화한 주얼리를 “1960년대의 마약과 편집증을 표현한 것”이라 설명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이나 아티스트 가운데 마약이나 대마에 손을 대는 사람이 꽤 있었죠. 그이도 한두 번은 시도했는데, 잘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절대 극단까지 가지는 않았어요.” 이레네가 설명했다. 이 모든 것은 아르예가 자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해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레네는 아르예를 1960년대에 이스라엘에서 만났다. 그가 초빙 강사로 베잘렐 예술대학교를 방문했을 때였다. 그렇게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고 이레네는 말했다. “예루살렘의 길 건너편에 있는 아르예를 보자마자 ‘바로 저런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라고 생각한 게 기억나요.” 이레네는 그에게 직진했고, 곧 교제로 이어졌다. “그때 다른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어서 쉽지는 않았던 기억이 나요.”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결국 두 사람은 텔아비브의 ‘거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레네와 아르예는 ‘언제나 함께’였고, 아르예는 ‘언제나 일하는 중’이었다. 이레네는 작업에 소소하게 의견을 보태며 참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주얼리 만드는 법을 보여달라고 했다. “제가 만들고 싶은 귀고리가 있었어요. 원초적이면서 여성스러운 디자인이었죠. 아름다운 것에 둘러싸여 있으면, 당연히 영감을 얻기 마련이에요.” 그렇게 이레네의 첫 단독 전시회가 1988년에 덴마크 디자인 박물관에서 열렸다. “티아라를 만드는 데만 2년이 걸렸어요. 한 계절마다 한 개씩 제작했죠.” 스웨덴 말뫼에서 열린 덴마크 주얼리 박람회에서 티아라 두 개를 도둑맞은 것을 보면 그녀의 솜씨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진심으로 저도 칭찬으로 받아들였어요”라고 이레네가 말했다.

아르예의 도자기 초상인 ‘에게만덴(Oak Man, 떡갈나무 남자)’은 1975년 로얄코펜하겐 도자기 창립 200주년 기념으로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마르그레테 2세는 장인 정신을 지원하는 왕가의 전통에 따라 오랜 시간 아르예 그리그스트를 후원했다. 1976년 아르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현대식 티아라를 헌정함으로써 왕가와의 관계에 정점을 찍었다. 이 티아라는 여름의 초목을 나타낸 것으로, 꽃이 피어오르는 양귀비를 도금하고 진주로 수술을, 꽃술에는 다이아몬드가 점점이 박혀 있다. 아르예가 ‘북유럽의 황금’이라 부르던 호박을 금줄로 늘어뜨려, 마치 꿀이 떨어지는 것처럼 표현했다.

그리그스트 부부의 여행은 작업물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바르셀로나를 방문해 목도한 가우디의 초현실주의 건축과 예술 세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후로 작품이 굉장히 유기적으로 바뀌었어요. 주변 세계를 관찰하고 더 깊이 파고드는 사람이었어요. 이를테면 조개를 보면, 껍데기가 열리고 닫히는 것에 큰 흥미를 보였죠. 그 방식을 탐구했고요.” 이레네는 아르예가 30개 정도 되는 거대한 소라 껍데기를 모아서 스튜디오에 있는 로얄코펜하겐 선반에 올려두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는 소용돌이치는 부분의 질감부터 말려 닫힌 끝부분까지 모든 것을 샅샅이 분해하고 분석했다. 그런 과정에서 만든 것이 ‘콘킬리에(Konkylie, 조가비라는 뜻)’로 소라고둥 모양의 식기 세트다. 그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하우 테린(Hav-terrin, Sea Tureen, 바다의 그릇)’일 것이다. 빛나는 시그린(Sea-green) 색상의 유약을 만들기 위해서 여섯 가지 코발트가 들어갔고, 적절한 효과를 내기 위해 철분도 쓰였다. 유감스럽게도 제작에 너무 많은 시간이 들어 재정적으로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기에 10개 안팎의 작품만 생산했다. “그렇게 자기로 만든 작품이 귀하게 될지 몰랐어요. 저희는 샘플을 만들면 선물하곤 했거든요.” 오늘날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시그린 색상의 그릇 중 하나는 스톡홀름의 국립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80~1990년대에 아르예는 우주로 관심을 돌렸다. “그때 파리에 살고 있었죠. 20년 정도 왔다 갔다 했던 것 같아요. 그때 처음으로 코스모스 반지를 만들었죠. 완성하는 데 서너 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코스모스 반지는 빛나는 금이 휘몰아치는 성운을 표현한 작품이다.

“아버지는 16년 정도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어요. 임종 때까지 계속 안 좋아지셨죠.” 병으로 작업 속도는 느려졌다. “당시 아버지는 천천히 무너져가고 계셨죠. 작업을 함께 할 생각보다는 ‘저것들을 다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어요.” 동시에 아르예의 작업물과 비슷한 유기적인 스타일의 주얼리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노암은 자신이 가업을 잇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아버지의 작업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에 화가 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희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싶어요. 주요 목표 중 하나가 바로 세계적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입니다.” 2017년 아르예 그리그스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기 전 노암은 독립 사진작가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상업사진 작업을 하면서, 아버지의 창작물이 가진 중요성을 깨달았다. “자라면서 쭉 보아온 아버지가 만든 디자인 같은 것은 다른 어디에도 없더군요. 아버지가 남긴 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독특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고민하기 시작했죠.” 금세공사가 아닌 노암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자 반발이 적지 않았다. 발을 들여놓기까지 10개월을 고민했다. “일을 잘 모른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죠.”

“시작은 복잡했어요. 무언가의 가치를 알아내는 모든 과정이 있어야 했죠. 아버지의 작품을 집에서 일상적으로 보아왔어요. 테이블에 놓인 것들이죠. 그렇게 평범한 물건이 엄청난 금전적 가치가 있는 제품으로 어떻게 변모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재료부터 이해해야 했죠.” 이레네가 미소를 지었다. “저는 그냥 한 걸음 떨어져 있었어요. 제 나이에 아르예의 일을 이어가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이 없다는 게 얼마나 좋던지요. 아침 11시까지 잠도 자고요.”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맨날 그때까지 주무시죠.” 노암이 거들었다. 아르예는 연금술사처럼 실험을 하기도 하고, 물건을 손보기도 하면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갔다. 그렇기에 그의 발자취를 좇으려는 사람도 좀처럼 없다. “아버지의 작업물에는 손을 댈 수가 없어요. 완성도가 높아 바꿀 필요가 없으니까요.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새로운 시대에 이러한 디자인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라고 노암은 설명했다. “쇼룸은 이 작업의 일부입니다. 올해 막 문을 열었고 이 공간은 사람들을 우리의 우주로 초대하는 방법 중 하나죠. 박물관처럼 느껴지지 않으면서 옛것과 새것을 결합해 아름다운 균형을 보여줍니다.” 아르예 그리그스트의 우주는 우리의 우주가 그렇듯 계속 확장하고 있었다.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