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영화계 거장들이 현리를 찾는 이유

2022.05.19

by 김나랑

    영화계 거장들이 현리를 찾는 이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우연과 상상>에서 배우 현리의 대화 시퀀스는 압도적이다. 영화계 거장들이 그를 찾는 이유다.

    재킷은 펜디(Fendi), 귀고리는 코스(Cos).

    하마구치 류스케(Hamaguchi Ryusuke)는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거장’이라 불리기 시작한 감독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로 칸국제영화제 각본상,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을, 지난 5월 한국에서도 개봉한<우연과 상상>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우연과 상상>은 세 개의 단편을 엮은 작품이다. 첫 편인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엔 택시에서 새로운 연애 이야기를 하는 츠구미(현리)와 그 얘길 듣는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가 등장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도 돋보인 차 안에서의 대화 시퀀스는 10여 분 이어진다. 현리는 일본에서 나고 자란 한국 국적의 배우다.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오면서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고, 영화 <물의 목소리를 듣다>(2014)로 다카사키영화제 최우수 신인여우상을 받았다. <우연과 상상>은 오디션 없이 감독의 제안으로 출연했다. 둘의 인연은 세 번째다. 하마구치의 단편 <천국은 아직 멀어>(2016)를 함께 했고, 그가 극본을 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 <스파이의 아내〉(2020)에도 출연했다. 현리는 하마구치에게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물은 적 있다. 그는 “야사시이히토(やさしいひと)”라고 답했다. 따뜻하고 다정한 혹은 부드럽고 친절한 혹은 상냥하고 깊은. 현리에게 수식해도 무방하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우연과 상상>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편의 츠구미 역을 오디션 없이 제안했다죠.

    하마구치 감독의 단편 <천국은 아직 멀어>도 먼저 제안하셨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영광이죠. 그러고 보니 감독님과는 세 번 같이 일했군요. <우연과 상상>을 2019년 말에 촬영했는데, 몇 달 전인 가을에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의 <스파이의 아내>를 찍었죠. 그 작품의 각본을 하마구치 감독님이 썼어요.

    <드라이브 마이 카> 각색을 원작자 무라카미 하루키가 허락하기 전에 <우연과 상상>을 완성했죠. 국내에선 개봉 순서가 바뀌었지만요. <우연과 상상>에 출연할 때만 해도 하마구치 감독이 지금의 위상은 아니었죠. 2016년에 단편을 찍긴 했지만, 어떤 믿음으로 함께 하게 됐나요?

    단편 <천국은 아직 멀어>를 촬영하며 몸으로 알았어요. 이분은 대단한 연출가구나. 내가 출연한 영화를 보고 운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몇 번을 봐도 눈물이 났어요. 이미 그때도 마니아층이 두꺼웠지만, 여기저기에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녔어요. 이젠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두 감독님의 능력을 알고 있죠.

    하마구치 감독은 배우 오디션을 볼 때도 연기를 시키지 않고 대화를 나눈다고 들었어요. 기억나는 대화가 있나요?

    단편을 준비할 때 함께 중국 음식을 먹었던 것 같아요. 다른 감독님들과 달리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눴어요. “현리 씨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좋아요?”라는 질문이 특히 생각나요.

    어려운 질문인데요. 뭐라고 답했나요?

    당시 20대 중반이었는데, 나름 성실하게 답변하다 “감독님은요?”라고 되물었죠. 일본어로 “야사시이히토(やさしいひと)”라고 답하셨죠. 번역하면 다정다감한 사람,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 착한 사람 같은 여러 의미가 있어요. 이렇게 말하니 복잡해 보이지만 굉장히 단순한 답변이죠. 그날 밤 생각에 잠겼어요. 제가 중요한 걸 놓친 것 같았죠. 감독님은 제게 ‘야사시이히토’란 말을 심어줬어요.

    파란 셔츠는 미우미우(Miu Miu), 검정 슬릿 스커트는 유돈 초이(Eudon Choi), 나뭇잎 모양 골드 귀고리는 질 샌더(Jil Sander), 중지에 낀 반지는 헤이(Hei), 약지에 낀 반지는 드와떼(Doigté).

    하얀 원피스는 질 샌더(Jil Sander), 목걸이는 헤이(Hei), 귀고리와 반지는 드와떼(Doigté).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극 중 배우들이 체호프 연극을 올리기 위해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대사를 반복해요. <우연과 상상>은 어떤 준비 과정을 거쳤나요?

    감독마다 원하는 역할 접근법이 있고 배우라면 맞춰서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 변화를 즐기죠. <천국은 아직 멀어>부터 <우연과 상상>까지 하마구치 감독님이 꾸준히 한 말이 있어요. “상대의 배 속에 있는 종을 울린다는 상상을 하며 목소리를 내주세요.” 그런 마음으로 반복 또 반복했어요. 사실 내 목소리가 어떻게 가닿는지 알 수 없잖아요. 하지만 종을 울리려고 노력할수록 목소리에 진심이 담기는 것 같았어요. 그래야 설득력 있는 연기가 되죠. 단순한 대사 반복이 아니라, 내가 대사에 깊이 들어가고, 상대에게 그 대사를 깊이 심는 과정이었어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연극 워크숍 중 두 배우가 합을 맞추다 교감하는 장면이 있죠. <우연과 상상>을 촬영하면서 작품 혹은 상대 배우와 깊이 소통한 순간이 있나요?

    굉장한 경험을 했어요. <우연과 상상>에서 나 츠구미는 친구 메이코에게 바에서 만난 남자 카즈아키에 대해 10여 분간 혼자 말하잖아요. 그 연기가 힘들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영화에 실리지 않는 장면, 그러니까 카즈아키와 바에서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는 과정을 따로 촬영했어요. 감독님이 일부러 그 장면을 준비하셨죠. 분장만 하지 않았지, 실제 영화에 쓰일 것처럼 연기했어요.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에 가깝게 몸으로 체험한 거예요. 내 실제 경험(바에서 카즈아키와 나눈 대화)을 친구 메이코에게 그대로 얘기하는 것이니 정작 본 촬영은 아주 수월했죠.

    배우가 그 상황에 몰입하도록, 그것의 과거 사건을 경험하게 했군요.

    맞아요. 택시에서 친구 메이코에게 얘기하는 장면은 테이크를 7번 정도 갔지만, 100번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았죠.

    그러고 보니 구로사와 기요시의 <스파이 아내>에 이어 하마구치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까지 엄청난 감독들과 연이어 촬영했군요.

    하마구치 감독님은 구로사와 감독님의 제자예요. 두 분의 연출 성향은 달라요. 구로사와 감독님은 리딩이나 리허설을 하지 않고 테이크를 빨리 찍으세요. 오후 5시에 끝나는 일정이라면 오후 1시에 마무리되곤 했죠. 반면 하마구치 감독님은 워낙 리허설 기간을 오래 잡는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구로사와 감독님이 저에게 “정말 그 정도로 리허설이 길어요? 뭘 하나요?”라고 물어보신 기억이 나요. 제자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이 느껴졌죠.

    <스파이의 아내>에서 일본군의 생체 실험을 고발하려는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첫 등장이 강렬했어요. 기차역에 도착해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주인공 부부(아오이 유우, 타카하시 잇세이)를 돌아보죠. 

    감독님이 배역을 제안하면서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셨어요. “현리 배우에게 이렇게 적은 분량의 역을 부탁해서 미안하지만, 정말 중요한 인물이라 꼭 해주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씀하셨죠. 저는 무슨 말씀이냐며 꼭 하고 싶다고 했죠. 영화 <도쿄 소나타> 때부터 팬이었고, 말 그대로 거장이시잖아요. 말씀해주신 그 장면은 감독님이 조명의 5cm, 10cm 간격까지 신경 써가며 오래 촬영하셨죠. 본래는 정말 빨리 찍으시거든요. 그것 말고도 감독님께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극 중에서 남자 주인공과 끌어안으면서 다리가 살짝 보이는 장면이 있었어요. 제게는 무리 없는 장면인데도, 다리가 보여도 괜찮은지 세심하게 챙기셨어요. 실은 당시에 허리를 삐끗했는데 감독님이 모르시도록 참고 촬영했죠. 연기에 집중하느라 그다지 아프지 않기도 했고요. 집에 가는 차에서부터 통증이 왔죠.

    재킷은 펜디(Fendi), 귀고리는 코스(Cos), 반지는 드와떼(Doigté).

    마음이 가는 작품이라면 역할 비중은 중요하지 않아 보이네요.

    특별 출연도 많이 해요. 친한 감독님 작품이거나 대본이 좋으면 되는대로 달려가죠(웃음).

    일본에서 법학을 전공하다 연세대 교환학생으로 오면서 배우를 꿈꿨죠. 부모님 반대도 있었는데 10년 동안 연기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교환학생일 때 한국에서 연기 학원을 다녔어요. 선생님께서 “너는 한국이나 일본 어디서든 뭔가 해낼 것 같다”고 얘기해주셔서 용기를 얻고 재미있게 다녔어요. 무엇보다 학원에서 <백세개의 모노로그>란 책을 접하면서 인생이 바뀌었어요. 그 전만 해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죠. 말로 설명한다 해도 100% 이해시키긴 어렵다고요. 내 세계에 갇혀 있었죠. 하지만 책 속의 여러 모놀로그를 연기하면서 깨달았어요. 자란 환경과 시대, 인종, 국적이 달라도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같다는 걸요.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내 세계에 구멍이 뚫리면서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죠.

    알에서 깨어난 건가요?

    그럴 수도요. 이후로 사람을 더 이해하고 더 좋아하게 됐어요.

    좋은 배우가 되려면 먼저 좋은 사람이 되라는 어느 연기자의 말이 생각나네요.

    무척 공감해요.

    연기 학원 이후에 일본에서 데뷔했군요.

    일본이든 한국이든 어디서 시작해도 상관없었어요. 일본 대학의 법학과 졸업장을 받기 위해 한 번은 돌아가야 했어요. 그때 일본에서 오디션을 봤는데 합격했어요. 그 일을 계기로 일본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지금 이렇게 한국에서도 관객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해요.

    야마모토 마사시 감독의 영화 <물의 목소리를 듣다>(2014)에서 재일 한국인 무녀 역할로 다카사키영화제 최우수 신인여우상을 수상했어요.

    배우를 계속 꿈꿨지만 제대로 가고 있는지 의문이었어요. 내가 되고 싶은 여배우의 이상에 닿을 수 있을까. 신인여우상을 받으면서 일단 한숨 돌렸어요. 시상식 때 아버지가 오셔서 기뻐하셨죠. 2017년 서울 드라마 어워즈에서 아시아 스타상을 수상할 때는 어머니가 오셨어요. 두 분 다 연기하는 딸을 걱정하셨는데, 안심시켜드린 거 같았죠.

    드라마 <파친코>(2022) 7화에도 출연했어요. 일본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이라 <파친코>에 더 이입했을 것 같아요.

    2~3년 전 미국에 있을 때 원작을 사서 읽었고, 일본어와 한국어로 된 책도 갖고 있어요. 읽는 느낌이 조금씩 다르죠. 무엇보다 우리 가족의 이야기 같아서 매우 공감했어요. 애플 TV+에서 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꼭 참여하고 싶었죠.

    3개 국어를 하니 해외 작품을 하는 데 유리하겠어요.

    데뷔 초부터 얘기했는데 저는 나라를 가리지 않고 좋은 작품에 꾸준히 출연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이젠 국적과 상관없이 작품이 만들어지는 환경이 조성된 데다 일본, 한국, 미국에서 좋은 에이전시를 만났으니 배우로서 또 다른 시작인 것 셈이죠. 언어는 꾸준히 공부하고 있어요. 한국어와 일본어는 말할 때 쓰는 근육이나 공명이 조금 다르거든요. 그런 부분까지 완벽하게 구사하고 싶어서 줌(Zoom)으로 선생님과 연습해요.

    독서와 글쓰기가 취미라고 들었어요.

    일본 라디오 방송국 ‘J-WAVE’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요. 아침 9시부터 낮 12시까지 하는 생방송인데 지식인들이 책 구절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어요. 이와이 슌지, 구로사와 기요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님께서 저와의 친분으로 나와주셨죠. 방송이 끝나면 그날 언급된 책을 서점에서 주문해요. 읽어야 할 책이 이만큼 쌓여 있어요(웃음).

    <요미우리 신문>에 칼럼도 연재하죠.

    그 신문 기자가 제가 4년 반 정도 진행한 ‘J-WAVE’ 방송을 매주 들었대요. 어떤 주제든 좋으니 글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았죠. 제가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어서 보내요. (현리는 자신이 그린 오니기리 주먹밥을 보여주었다. 전문 일러스트 못지않다.) 하나 소개해드리면, 제목이 오니기리예요. 어릴 적 소풍날 친구들이 오니기리, 그러니까 삼각 모양의 김밥을 싸왔어요. 엄마는 그 모양을 내지 못해서 사각 김밥을 싸주셨어요. 김 위에 밥을 넓게 펴고 재료를 올려 사각으로 접으셨죠. 전 친구들 도시락과는 다른 모양을 보면서 ‘우리 엄마가 만들기 귀찮아하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몇 년 전에 사각김밥이 일본에서 엄청 유행했어요. 엄마랑 같이 어린 시절 얘기를 하면서 시대를 앞서갔다며 웃었죠. 속으론 엄마에게 무척 미안했어요. 당시에 엄마는 오니기리 만드는 법을 물어볼 친구도, 정보를 구할 책도 없었을 텐데, 딸의 요구에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런 내용의 글이에요.

    나중에 자신의 글과 그림을 출판하고 싶을 거 같아요.

    언젠가는 용기를 내서 진짜 해보려고요. 번역이 필요하면 그것도 제가 하고요. 실은 제 출연작의 자막도 만들어보고 싶어요. 학문적인 언어가 아니라 현실에서 살아 숨 쉬는 젊은 감각의 언어로 자막을 써서 여러 사람에게 소개하고 싶어요.

    영화 촬영을 위해 내일 일본으로 출국하죠.

    이런 일정은 전혀 피곤하지 않아요. 배우로서 작품을 만나러 가는 거니까요. (VK)

      에디터
      김나랑
      패션 에디터
      신은지
      포토그래퍼
      고원태
      헤어
      이혜영
      메이크업
      정수연
      로케이션
      국립기상박물관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