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와이너리 순례기
술의 산지를 찾아간다는 건 단편에 머물 경험을 일으켜 입체적으로 확장하는 시도다. 한국 와이너리를 순례하며 자연을 마셨다.
4월 어느 날, 벚꽃으로 뒤덮인 경남 하동. 나는 찻잎을 응용한 반찬이 가득 차려진 밥상 앞에 앉아 있었다. 주인장은 녹차 추출액과 차나무꽃 추출액이 발효한 난생처음 보는 차꽃 와인을 권했다. “단 술은 좋아하지 않아요”라고 했지만, 못 이기는 척 술을 마시자 봄꽃이 봉오리를 터트리는 듯했다. 잔잔하고 달콤한 액체는 하동 땅에서 난 재료로 만든 음식과 어우러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곰취나물의 쓴맛을 달랬고 표고버섯덮밥의 향기를 수렴했다가 감아 올렸다. 식사를 만끽한 후 식당에서 나와 연둣빛 녹차밭을 하염없이 걸었다. 바람에 연분홍 꽃잎이 날렸다. 지금 내가 마신 건 와인이었나, 봄날의 햇살이었나. 씹어 넘긴 건 음식이었나, 이 땅의 생동이었나. 마트에서 구입해 배달 치킨과 곁들여 먹었다면 느끼지 못할 경지. 술과 음식의 산지를 찾아간다는 건 단편에 머물 경험을 일으켜 입체적으로 확장하는 시도다.
‘아는 만큼 맛있다’는 명제는 술의 영역에 가장 크게 작용한다. 입안을 간질이는 기포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시간을 더해 무엇을 첨가했는지 같은 정보가 입력되었을 때 관성으로 일관하던 미각이 깨어나 그 맛을 인지한다. 맥주 양조장 투어가 갓 뽑은 생생함을 맛보기 위한 기꺼운 노력이라면, 숙성을 거쳐야 하는 와인의 영역에서 와이너리 투어는 좀 더 그 본질에 다가서고자 하는 애정이다. 두 뺨을 붉게 물들이고 살랑살랑 나부끼는 기분을 선사하는 이 신비로운 액체는 도대체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아보기 위한 탐험이랄까. 코로나는 로컬로 관심을 집중시켰고 한국 와인은 전통주로 분류되어 온라인 판매가 가능한 덕분에 매일 ‘재발견’되는 중이다. 그리고 지금 많은 와이너리가 와인을 직접 경험하고자 하는 이들의 관심과 방문을 반긴다. 어느새 더 따뜻해진 햇살이 곧 과실이 무르익을 계절이 찾아오고 있음을 알렸다. 차꽃 와인이 선사한 환희를 다시 맛보고자 나는 매 주말 와이너리 투어를 계획했다.
시작은 고민할 필요 없이 충북 영동이다. 11개 면에 걸쳐 40여 개 와이너리가 자리한 한국 와인의 대표 산지. 소백산맥 추풍령 자락에 자리해 내륙성 기후로 포도를 비롯해 사과, 복숭아가 달콤하게 농익는 곳. 한 번쯤은 들어봤을 ‘샤토미소’ ‘시나브로’ ‘여포의 꿈’이 모두 충북 영동 출신이다. 영동역에서 가장 가까운 산막 와이너리에 도착하자 대표 부부의 사위인 윤영준 부장이 양조장 건물 뒤 비탈진 포도밭으로 안내했다. “이 지역에서 자라는 산머루 포도예요. 지금은 이렇게 순을 틔우지만 8월 정도 되면 수확을 시작하죠. 저희는 제초제를 안 쓰고 일일이 다 손으로 풀을 제거해요. 제초제를 쓰면 땅에 좋지 않으니까요.” 포도밭 사이를 거닐며 설명하는 가운데에도 그의 손은 부지런히 잡초를 뽑았다. 산막 와이너리에서 재배하는 포도는 청수, 캠벨, 산머루 3종이다. 청수로 화이트 와인 ‘라라’를, 캠벨로 레드 와인 ‘화몽’을, 캠벨과 산머루를 섞어서 또 다른 레드 와인 ‘비원’을 만든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그랜드피아노로 뮤직바 같은 테이스팅 룸에 들어서자 윤영준 부장은 라라부터 따랐다. 연둣빛 포도 향이 피어올랐다. “8월에 밭에 가면 이보다 훨씬 달콤한 향이 가득 퍼져요. 그 자리에서 한 송이를 따서 베어 물면 입안 가득 그 향을 맛볼 수 있죠.” 달콤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산미가 있으면서도 드라이했고 이어 맛본 비원도 신선한 풍미가 느껴지면서 깔끔했다. 한 외국 평론가가 비원을 맛보고 “동아시아의 습한 기후가 잘 느껴지는 와인”이라고 평한 적 있는데, 방금 돌아본 포도밭이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산막 와이너리의 와인은 모두 낭만적인 이름을 가졌다. 와인을 처음 만들고 시음할 때 맛을 나누며 이름을 짓는 덕분이다. 꽃향기랑 달콤한 향이 많이 나서 ‘꽃 화, 꿈 몽’ 화몽으로 짓는 식이다. 비밀의 정원을 거니는 듯한 비원, 첫사랑을 떠오르게 하는 ‘초련’ 등도 마찬가지다. 와이너리 대표이자 화가 안성분의 그림을 와인 라벨로 제작하고, 공간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딸 부부의 즉석 콘서트를 여는 산막 와이너리에서 경험은 미각에서 시작해 예술적 감성으로 확대된다.
4년 전 <보그>는 한국 와인에 대한 기사에 “수입 와인과 독립된 카테고리로 봐야 한다”는 전문가의 말을 실었다. 특히 음식 페어링에서 수입 와인에 따른 공식은 의미가 없어진다. “양념 돼지고기랑 ‘라라’를 먹었는데 맛있었고, 연포탕에 ‘비원’을 곁들였는데 그것대로 괜찮았어요. 우리나라 음식은 조리법이 다양하기도 하고 그냥 한국 음식과 다 맞다고 보면 돼요.” 백반에 곁들일 수 있는 술이 한국 와인이다. 이 계절 산막 와이너리에서는 시음과 포도밭 투어가 이뤄지지만 여름이 되면 SNS를 통해 농활 신청을 받는다. 포도를 따고 양조장 일을 돕고 시음과 식사를 즐기고 자기 사진을 와인병에 붙여서 집에 가지고 돌아간다. 그 계절을 간직하는 것이다.
반짝이는 금강을 따라 달리며 두 번째 목적지인 시나브로 와이너리로 향했다. 녹음 천지인 송호유원지도, 양산팔경도 지났다. 와이너리가 주로 분포한 지역은 편의점 하나 찾기 힘든 온통 밭이다. 미국 나파 밸리나 프랑스 부르고뉴가 끝없는 포도밭 풍경이라면 충북 영동은 오히려 기세 좋은 용맹한 산이 쉼 없이 이어진다. 올라야 할 산이 아니라 포도를 달콤하게 영글게 하는 병풍으로 보니 그저 그 기세가 편안하게 느껴진다. 청수를 최초로 양조한 곳으로 유명한 시나브로 와이너리에서는 ‘뱅쇼 만들기’와 ‘족욕 체험’을 신청해뒀다. 시나브로 화이트는 ‘한국와인 고메위크’에서 맛본 적이 있다. 청수의 상큼한 포도 향에 우아한 흰 꽃 향과 경쾌한 시트러스가 만개한 와인이었다. 애피타이저부터 메인 디시, 디저트까지 모든 단계에 잘 어울려서 쭉 이어서 마신 기억이 있다. 양조장 건물 2층에 올라가자 통창 밖으로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아들 부부까지 함께 가족이 운영하는 시나브로의 이성옥 대표가 이야기를 들려줬다. “약목마을의 소원나무예요. 큰 시험 보러 가기 전에 와서 다들 안아보고 가요. 돈을 두거나 막걸리를 부어서 나무가 술 좀 많이 먹었어요(웃음).” 아래로는 1층 양조 시설도 내려다볼 수 있다. 레드 와인에 과일과 시나몬 스틱을 넣어 끓이는 뱅쇼를 기다리는 동안 칠링된 시나브로 화이트 한 잔을 들고 레드 와인을 푼 욕조에 발을 담갔다. 바짝 말랐던 피부에 기분 좋은 땀이 올라왔다.
포도밭을 일구고 양조하며 한국 와인 알리기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시나브로 와이너리는 와인 탐험가들 사이에 모이기 좋은 곳으로 이름 높다. “대학마다 와인 동아리가 있는데 정기적으로 찾아오죠. 페어링할 음식을 다 가져오는데 저희는 온도에 맞게 딱 와인을 세팅해줘요. 그러고 나면 계속 와인 얘기예요. 우리는 와이너리 얘기해주고 학생들은 또 토론하고 그런 게 다 재미죠.” 술 싫어하는 사람이 와이너리를 방문할 리 없으니 이곳에 오면 와인에 대한 얘기를 숙성시키며 나눌 수 있다. 어떤 질문도 편안하게 대화로 이어가는 가운데 한국 와인의 숙성 기간에 대해서도 물었다. “카베르네 소비뇽 같은 포도는 타닌감이 많아 힘이 있어서 숙성이 필요해요. 그런데 우리 와인을 만드는 캠벨은 생과용이라 숙성한다고 해서 맛이 더 좋아지는 품종이 아니에요. 2년 정도까지 진짜 맛있고 그 후로는 오히려 맛이 떨어져요.” 포도 품종을 이해하고 외국 와인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면 사실 한국 와인에 편견이 생길 이유가 없다. “캠벨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왜 좋냐고 물으면 떫거나 시지 않고 산뜻해서 좋다고들 해요. 삼겹살 먹다가 한 모금 딱 마시면 입안이 깨끗해진다고요. 마냥 가볍지 않고 우리한테 친숙한 캠벨 향이 남으니까 좋죠. 유럽 사람들처럼 스테이크를 자주 먹는 게 아니니 보디감을 굳이 찾을 필요도 없지요. 요즘은 외국 손님 접대할 때 한국 와인이 많이 들어가요. 그 나라 음식에는 그 나라 와인이 잘 어울리거든요. 빈티지 따질 것 없이 그 지역 와인을 마시며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와인은 그 역할을 다한 게 아닐까요.” 곧 샤인머스캣으로 양조한 와인도 출시를 앞두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으며 시나브로 와이너리를 나섰다. 달큼한 기분으로 소원나무를 끌어안은 뒤, 추천받은 옥계폭포에 들렀다가 위풍당당한 산자락 아래 식당에서 산채 정식에 레드 와인을 곁들여 먹었다. 영동에서는 어느 식당엘 가도 소주, 맥주와 동일한 폰트로 와인이 메뉴판에 올라가 있는데 외부인이 산지에서 느껴볼 수 있는 특별한 일상성이다.
한 주가 지나 찾은 곳은 강원도 홍천 너브내 와이너리다. 홍천강 주변의 유원지를 지나 좁은 비포장도로를 올라간 곳에 자리한다. 이병금 대표는 너브내 와이너리의 포도밭은 체험 공간에서 차로 15~20분 이동한 곳에 있다고 했다. “정말 끝도 없는 포도밭이 있어요. 농사는 쉽지 않아요. 흔치 않은 품종이라 모두 직접 키우고 있어요. 강원도에서 개발한 포도다 보니 확실히 냉해에 강해요.” 며칠 전 ‘너브내 스파클링 사과 와인’이 대통령 취임식 건배주로 선정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이병금 대표는 “새콤달콤 톡 쏘는 맛을 가진 18세 반항기의 맛”이라고 소개했다. 너브내 와이너리 역시 미리 연락하면 와인 테이스팅이 가능하다. 일주일에 한 번 체험도 진행하고 있어서 직접 만든 상그리아를 예쁜 유리병에 담아 집에 가져갈 수 있다. 한국 와인을 접할수록 느껴지는 건 포도 품종에 따라 생기는 개성이다. 강원도 홍천에서는 ‘청향’과 ‘블랙아이’ ‘블랙썬’이라는 품종이 고유한 맛으로 숙성되고 있었다. 모두 강원도 토양과 기후에 가장 잘 자라도록 개발된 품종이다. 청향은 청수보다 알이 좀 작지만 피가 더 두툼한데 청향으로 만든 너브내 화이트 와인은 향이 굉장히 풍부하고 무엇보다 여운이 길게 남는다. 레드 와인을 만드는 품종 ‘블랙아이’ ‘블랙썬’ 역시 너브내 와이너리에서 처음으로 심고 길러 와인으로 탄생시킨 스토리를 가졌다. 한식에 한 몸처럼 어울린다는 평을 받는데 그야말로 ‘강원도 테루아르 맛’의 결정체다. 이병금 대표는 너브내 와인과 페어링한 감자 이야기를 들려줬다. “몇 년 전에 와인 다이닝을 하면서 강원도 식재료를 활용하고 싶어 강원도 감자를 찌고 명이나물 페스토를 만들어서 화이트 스위트와 내놓은 적 있어요. 감자가 동날 정도로 호응이 좋았어요.”
너브내 와이너리는 샤르마 방식으로 스파클링 와인을 내놓는다. “기존 베이스 와인을 여과해 압력 탱크에 넣고 당과 효모로 발효시켜 자체 탄산을 만들어내요.” 남편 임광수 대표는 매일 새벽 연구하듯 양조법을 공부한다고 전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장비를 직수입했던 열정 그대로 얼마 전에는 오크통이 발생시키는 미세한 산소를 집어넣을 수 있는 산소 발생기까지 들였다. 포도 못지않게 잘 키운 스파클링 사과 와인에 대해 청해 들었다. “사실 홍천의 대표 과일이 사과예요. 매년 11월 첫째 주에 홍천사과축제를 열 만큼 맛있어요. 처음에 사과만 가지고 애플 스파클링을 만들었는데 약간 싱겁더라고요. 고민하다가 옆 동네에서 나는 돌배를 블렌딩해봤더니 산미도 있으면서 묵직한 보디감이 생기더라고요.” 마트 매대에서 봤다면 대통령 건배주가 얼마나 맛있는지 한번 먹어보자는 마음으로 집어 들었겠지만, 스토리와 함께 접하고 나니 돌배가 사과에 부린 마법이 더 궁금해졌다. 근처에 가장 가볼 만한 곳은 비발디파크라고 했지만 들르지 않았다. 대신 좀 오래됐지만 팔봉산이 잘 보이는 펜션에서 너브내 스파클링 사과 와인을 펼쳤다. 포도알의 당분을 키웠을 홍천의 차가운 밤공기도 함께했다.
레돔(Lesdom)을 만드는 충북 충주의 ‘작은 알자스 와이너리’는 ‘프랑스 농부가 한국에서 만든 내추럴 스파클링 와인’에 대한 궁금증으로 언젠가 방문해보고 싶었던 곳이다. 아내이자 소설가 신이현이 포도 농사를 짓고 와인을 빚는 삶에 대해 연재했던 다정한 글 덕분에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게스트 룸을 갖춘 양조장을 새로 지어 5월 말부터 와이너리 투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신이현 작가는 한창 정리 중이라면서도 얼마 전에 거위 두 마리가 합류했다고 알려줬다. “닭은 포도밭을 걸어 다니며 벌레도 잡아먹고 잡초도 뜯어 먹어 땅에 이로워서 키우는데 그 닭을 거위가 지켜줄 예정이에요. 거위를 조금만 키우면 개 못지않게 용맹하대요. 하도 시끄럽길래 루, 쿠쿠라고 이름 지어줬어요.” 와이너리를 소개하며 신이현 작가는 “술 만들기의 70%가 농사”라는 말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이곳 와이너리 투어는 농장을 둘러보고 농법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것부터 시작이다. “포도밭을 산책하며 테루아르를 같이 보는 거죠. 술은 사실 땅에 대한 이야기예요. 양조자는 농부에서 출발해요. 맛있는 와인을 만들려면 농사를 잘 지어야 하고 그러려면 땅을 사랑해야 해요. 땅이 좋으면 환경에도 좋고 순환된다는 걸 사람들이 알면 좋겠다 싶었어요. 와인 한 잔으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해요.” 포도밭이지만 토양에도, 포도에도 좋은 나무를 많이 심어놨다. 그 사이를 산책하다 보면 호밀을 만나볼 수 있고 마늘, 보리수, 나무딸기 그리고 각종 허브도 발견할 수 있다. 작은 숲에 온 것 같은 기분이 찾아온다. 신이현 작가는 오늘 본 나무가 1년이나 2년 뒤에 어떻게 자랐는지 볼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와인 역시 최소 1년이 지나야 맛볼 수 있는 술이다. 어떤 시간이 포도를 영글게 하는지, 어떤 시간을 겪어야 와인이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체험일 수도 있다. “문화 양조장이니까 한 달에 한 번은 술과 관련된 문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초대해서 이야기도 들어보려고 해요. 제철 재료로 요리하는 셰프와 함께 할 수도 있고요.” 포도밭에는 한창 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겨울에도 땅이 헐벗지 않도록 농부는 항상 무언가를 심고 가꾼다. 밭고랑 사이에 서자 초록 바람이 불어왔다.
레돔의 와인은 과일 껍질에 붙은 야생 효모로 발효한 내추럴 와인이다. 알코올 도수를 높이기 위한 가당을 하지 않는다. “알코올 도수가 좀 낮아요. MBA랑 머루로 만든 레드 와인은 12도, 청수로 만든 화이트 스파클링 와인은 9도, 사과 시드르는 6도 정도니까요. 모두가 와인이라고 생각하는 도수까지 못 미치지만 상관없어요. 유럽에서 나는 포도로 와인을 담갔더니 그 도수가 나온 것뿐이잖아요. 포도라는 과일이 준 당을 그대로 발효한 그 끝이 와인이니 12도일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레돔의 와인을 먹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편안하다’고. 충주 땅에서 자란 포도와 사과로 와인을 담그며 느끼는 건 그동안 들었던 ‘한국 와인은 부족하다’가 아니라 ‘괜찮다’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들꽃도 그 자체로 완전하잖아요. 자연이 준 그대로 어떤 첨가물도 넣지 않고 와인을 만들면 충주 포도와 사과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와인이 나와요.”
이곳에서는 발효 중인 상태의 술도 탱크에서 바로 뽑아 마셔볼 수 있다. “발효를 시작하면 맛이 나날이 달라져요. 그래서 전 만날 ‘그 순간의 술’이라고 말해요.” 지금까지 와인을 말할 때 늘 병에 들어간 후만 얘기했다. 와이너리를 찾아간다는 건 그 안에 들어 있는 시간을 맛보는 일이기도 했다. 레돔은 곧 토종꿀을 첨가한 시드르 신제품을 내놓는다. 꽃과 벌의 합작품인 꿀이 시드르에 또 어떤 마법을 일으킬지 상상만으로 침이 고였다. “포도가 잘 자라는 곳은 복숭아도 잘 자라요. 충주가 우리나라 중간이다 보니 포도도, 사과도 잘돼요. 위로 올라가면 사과는 잘되지만 포도는 힘들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또 사과가 안돼요. 수안보이다 보니 물도 참 좋고요. 이곳은 넉넉하고 편안해요.” 신이현 작가의 말을 들으며 완연한 여름에 부쩍 자란 포도나무를 보러 다시 이곳을 찾고 싶어졌다. 얼마 전 다음에는 대부도 ‘그랑꼬또 와이너리’에 가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대부도 포도가 엄청 유명해. 해풍을 맞은 농작물이 최고야”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고 보니 어떤 지역을 과일로 이해하려고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의 와이너리에서 맛본 와인으로 내가 나고 자란 땅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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